다시 태어난 반 고흐 228화
43. 죄와 벌(4)
데미안 카터와 앙리 마르소의 경합지는 양측의 합의 아래 네덜란드의 항구도시 로테르담으로 결정되었다.
보이만스 반 뵈닝겐 미술관,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현대적 건축물 등으로 문화 관광이 융성하고.
철도, 도로가 발달하여 인접 국가에서 접근이 용이하며 유럽에서 가장 큰 항구와 항공 인프라를 갖췄기에 바다 건너 영국과 타 대륙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한 달 전, SNBA 살롱전 시상식장에서 벌어진 두 거장의 충돌은 시시비비를 떠나 미술 애호가들의 관심을 끌어내기에 충분했고.
로테르담은 때아닌 수십만 명의 관광객에 북적거렸다.
“어머.”
약속 장소인 파크호이벨 식당에서 고훈을 발견한 장미래가 깜짝 놀랐다.
몇 달 전만 해도 통통했던 고훈의 볼살과 배가 눈에 띄게 들어가 있었다.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
장미래가 고훈의 양쪽 뺨을 감싸고 물었다.
“학대당했어요.”
“학대?”
“아동학대요.”
학대당했다고 하기엔 너무나 건강해 보였다.
어렸을 적부터 작업을 오래 한 탓인지 어깨가 굽어 있었는데 자세가 교정되어 있었다.
수면 시간이 충분하지 않고 불규칙적이라 어린아이치고 피곤해 보이던 얼굴도 혈색을 되찾았으며 피부에 윤기가 흘렀다.
“운동 시작했더니 엄살 부리는 게야.”
고수열이 껄껄 웃으며 설명했다.
장미래가 안심하곤 고훈의 머리를 조심스레 만졌다.
“왜. 보기 좋은데.”
“…….”
“머리도 새로 했네?”
고훈은 옆머리를 짧게 자르고 길게 남은 윗머리를 가르마를 타 옆으로 넘기고 있었다.
고훈이 입꼬리를 내려 불만을 내비쳤다.
이전 생에 겪었던 탈모가 머리를 뒤로 넘기고 다녔기 때문이라고 믿는 고훈은 머리를 최대한 자르지 않고 내리고 다녔었다.
덕분에 모친 이수진이 관리해 주어 단정했던 1년 반 전과 달리 덥수룩했다.
고수열도 몇 번 미용실에 데려가려고 했으나 고훈이 완강히 거부하여 더는 강요하지 않았었다.
앙리 마르소가 짜장면으로 유혹하지 않았더라면 허락지 않았을 터였다.
“이런 머리 하면 머리카락 빠져요.”
어린아이가 벌써 탈모 걱정을 하니 방태호와 장미래가 웃었다.
“아핳하. 괜찮아. 할아버지도 아빠도 탈모 아니잖아.”
“혹시 모르죠.”
“작년에 특효성 입증된 탈모 치료제가 나와서 괜찮아.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방태호가 음식을 주문했다.
일행은 식사하며 그간 나누지 못한 일과 앙리 마르소, 데미안 카터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진짜 대단하더라고요. 전부 마르소랑 카터 씨 이야기뿐이던데.”
장미래가 오는 길에 뉴스, 커뮤니티 사이트, 포럼 게시판, SNS, 뉴튜브 등에 올라온 글과 영상을 언급했다.
고수열과 방태호는 고개를 끄덕였고 고훈은 오전에 본 데미안 카터의 작품을 설명했다.
“멀리서 잠깐 봤는데 엄청난 패턴이었어요.”
“패턴?”
“스테인드글라스요. 가까이서 보고 싶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오후에 보려고요.”
고훈은 멀리서 얼핏 봤음에도 장엄한 이미지를 전해준 데미안 카터의 작품에 흥분해 있었다.
“흐응. 마르소는?”
“자화상이요. 안에 들어가서 볼 수 있는데 직접 봐야 해요.”
“들어갈 수 있다고?”
“개벽으로 그렸거든요. 엄청 커요.”
장미래는 앙리 마르소가 개발한 신기술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참. 다큐멘터리는? 재밌었어?”
“네. 생각보다 편했어요.”
“쉽지 않았을 텐데.”
“감독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서요. 방송하는 것처럼 했어요.”
“참. 그러고 보니 훈아, 그림 소개하는 콘텐츠 어때? 파리에서 살게 되면 돌아다니는 것도 편할 테고.”
방태호가 뉴튜브 채널에 올릴 영상 콘셉트를 제안했다.
“많이 하고 있지 않아요?”
“다들 하니까 해야지. 검색량이 많은 건 그만큼 관심이 많단 뜻이거든.”
100만 명 이상의 구독자를 확보한 장미래가 방태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똑같은 말을 하면 의미 없어도 모든 사람이 같은 눈으로 보진 않잖아.”
“미래 교수님 말이 맞아. 같은 소재라도 차별성을 보이면 조회 수도 쉽게 확보할 수 있어. 관심 있는 분야는 계속 찾아보게 되거든.”
장미래와 방태호의 설득에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큐멘터리 <빈센트>를 촬영했을 때와 같은 느낌이라면 부담도 적고 미술 작품을 공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듯했다.
“그럴게요. 이모는 전시회 잘 끝났어요?”
“그럼. 내가 누군데. 그렇죠, 선생님?”
“껄껄. 수고했다.”
전 세계 동시 전시라는 큰일을 치른 장미래는 2028년 개인전을 연 예술가 중 가장 큰 성과를 거두었다.
유럽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아시아와 북미, 남미에서 장미래는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를 연상시킬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훈이 장미래의 큰 성공을 기뻐하며 물었다.
“파리에선 왜 안 했어요?”
장미래가 예술의 수도로 불리는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SNBA 살롱전이 워낙 세니까 시기가 겹친 것도 있고. 실은 전시회 때문에 살롱전 거절했었거든. 아무래도 눈치 보이더라.”
“아.”
“시장 문제도 있죠?”
“음. 없다곤 못 하죠. 저 혼자 하는 일도 아니고.”
고훈이 방태호의 질문과 장미래의 답변에 의아해했다.
SNBA 살롱전과 같이 큰 전시회와 날짜가 겹치면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할 수밖에 없는 건 이해했지만, 파리는 예술의 수도였다.
아르누보 공모전과 SNBA 살롱전을 찾은 사람은 최고의 미술 축제라는 휘트니 비엔날레를 한참 웃돌았다.
시장 문제라고 하니 납득할 수 없었다.
“사람들 많이 모이잖아요.”
“그게 꼭 수익이랑 정비례하진 않거든.”
장미래가 달짝지근하게 조린 비트와 곁들여 나온 거위 간 요리를 먹으며 말했다.
“휘트니 비엔날레가 가장 큰 미술 축제인 건 거래액이 제일 많아서야. 방문객은 사실 엄청 많은 편은 아니지.”
“아.”
방태호가 고훈이 알아보기 쉽도록 미술 시장 규모를 나타낸 표를 찾아 주었다.
미국 45%, 중국이 26%, 영국 20%를 차지하며 세 국가가 전체 미술 시장의 91%를 차지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6%로 EU 가입국 중에서는 가장 큰 시장을 보유했으나 미국, 영국, 중국에는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1)
독일과 스위스, 스페인이 2.9%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다른 국가는 모두 합쳐도 0.1%에 지나지 않았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요?”
“자본 차이 때문이야. 세금도 영향을 미치고.”
앙리 마르소에게 미술 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여럿 들었던 고훈이 의아해했다.
“영국은 관세 때문에 거래하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프랑스보다 훨씬 많잖아요.”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생각했는데 EU 규제가 생각보다 깐깐하거든. 고액 거래가 될수록 세금을 많이 물어. 유럽이 전체적으로 미술품 거래하기엔 그리 좋진 않아.”
“미국이나 중국은 좀 나아요?”
“상대적으로 그렇지. 대신 전시회 같은 경우는 유럽이 좀 더 나아. 방문객 단위가 다르거든.”
방문객은 유럽이 앞서고.
미술 거래액에서는 미국과 중국, 영국이 앞선다는 말이었다.
“영국은 어떻게 그렇게 커요?”
관세 문제라면 큰 차이가 없는 프랑스와 큰 차이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데미안 카터처럼 고액 작품을 파는 사람이 많아서 그럴걸? 워낙 인기가 많으니까 관세를 부담하고도 사려는 사람도 많은 거지.”
데미안 카터, 제이 조플링, 영국 소더비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르는 장미래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사건의 전말을 아는 고수열과 방태호에겐 이보다 심각한 상황이 없었다.
전 세계 미술 시장의 20%를 차지한 영국은 장미래의 설명대로 브렉시트 이후 줄곧 하향길을 걸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근 10년이 지난 현재 영국 미술 시장 점유율은 2020년과 동일했으며 거래액은 도리어 껑충 뛰어 있었다.
그것이 데미안 카터와 제이 조플링, 영국 소더비 사이의 담합으로 이뤄진 일이라고 생각하니.
그들이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융통해 왔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선생님.”
“음.”
장미래가 고수열과 방태호를 번갈아 보고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고수열이 고훈을 바라보았다.
충격을 받을까 걱정하여 그동안 모른 척했으나, 오늘 경합 결과 이후에 사건을 공표하기로 했으니 더는 숨길 수도 없었다.
“곧 알게 될 테니.”
고수열은 앙리 마르소가 밝혀낸 사실을 요약하여 고훈과 장미래에게 전달했다.
두 사람은 놀라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장미래는 21세기 가장 성공한 예술가인 데미안 카터가 저지른 일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미술품으로 자금세탁을 하는 경우는 봐 왔지만 데미안 카터처럼 여러 사람에게 추앙받는 인물이 직접 나서서 작품 가격을 조작했다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증거 확보가 되었다고 하더구나. 고발이 접수되면 조사 들어갈 테고 그때 명확히 밝혀지겠지.”
앙리 마르소는 고수열에게 영국 국세청이 곧장 조사에 들어갈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전했다.
“대체 왜요?”
데미안 카터가 아르누보 공모전과 SNBA 살롱전에서 보인 행동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의 작품을 이해하고 싶었던 고훈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할 수 없어 되물었다.
고수열이 고개를 저었다.
방태호가 입을 무겁게 열었다.
“무명 시절이 너무 괴로워서 유혹에 빠진 건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장미래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나섰다가 멈칫했다.
데미안 카터와 제이 조플링이 <영원>의 낙찰가를 의도적으로 높이고, 투기꾼과 불법 자금을 세탁하려는 이들에게 작품을 판매해 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21세기 가장 비싼 작품 중 하나라는 데미안 카터의 작품들이 정말 그런 식으로 가격이 책정되었을까.
그럼 대체 미술품의 가격은 무엇이란 말인가.
혼란스러웠다.
“…….”
고훈이 말없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무명 시절의 막막함과 절망감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었다.
고훈은 방태호의 말대로 데미안 카터가 기나긴 무명 시절을 벗어나기 위해 제이 조플링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사람이 견디기엔 너무나 가혹한 일이니 유혹에 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아니 되었다.
고훈은 데미안 카터를 깊이 이해하고 동정하는 만큼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 * *
데미안 카터는 <눈부신 삶>을 다루는 뉴스 기사, SNS 글을 살피곤 미소 지었다.
제이 조플링은 데미안 카터의 위명을 유지하기 위해 영국은 물론 유럽과 북미의 유력 언론사를 포섭하고 이름 있는 평론가와 인플루언서를 기용했다.
앙리 마르소의 위협에 위기감을 느낀 탓에 평소보다도 훨씬 많은 이에게 접근했고.
그것은 부담으로 돌아왔다.
많은 언론과 유명인이 <눈부신 삶>을 찬양하고 나서면 그만큼 표를 얻을 수 있겠지만, 관리에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혹시라도 데미안 카터가 언론을 포섭했단 소문이 나돌면 안 하느니만 못한 상황에 이를 수 있었다.
“왜 그리 안절부절못하나.”
데미안 카터가 여유롭게 말했다.
초조한 나머지 우왕좌왕하던 제이 조플링이 신경질을 냈다.
“너무 무리했어. 한 놈이라도 입을 잘못 놀리면 일이 이상하게 돌아갈 수 있어.”
“걱정도 많군.”
“데미안. 이건 내 일도 아니고. 네 일도 아니야. 우리의 일이라고.”
데미안은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제이 조플링은 그 의연한 태도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도 모르겠어? 너는 최고일 때 가치가 있어. 최고가 아니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그렇군.”
제이 조플링이 입술을 씰룩였다.
그가 데미안 카터의 멱살을 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비렁뱅이 주워다 키워줬더니 주제를 모르는 것 같은데. 착각하지 마. 내가 아니었으면 그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 것 같아?”
데미안 카터는 자신을 위협하는 남자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의 손을 밀쳐내고 옷매무시를 단정히 했다.
“잘 아니까 하는 말일세.”
“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인간을 금세기 최고의 예술가로 만들어 준 장본인이 무얼 걱정하나.”
“…….”
“하던 대로 하게.”
데미안 카터는 아무 걱정 없이 찻잔을 채웠다.
* * *
1)2019년 기준 세계 미술 시장 국가별 점유율(거래액 기준)@.
미국 44%, 영국 20%, 중국 18%, 프랑스 7%, 스위스와 독일이 2%, 스페인이 1% 나머지 모든 나라의 합이 6%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미술시장 규모는 641억 달러.
*미국은 무역 전쟁으로 아시아, 유럽에 관세를 부과하여 미술 시장이 축소되었다.
*영국은 브렉시트 이후 EU국과의 관세가 발생하여 미술 시장이 축소되었다.
*프랑스는 브렉시트 이후 영국을 대체할 국가로 부상했으며 실제로 2019년 미술 시장이 유일하게 성장한 국가지만 유럽 연합이 규제와 조세 제도를 강화하여 유럽 시장 전체가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
출처:
<규모는 감소했으나 밀레니엄 세대의 활약 돋보여 –2019년 세계 미술시장 주요 이슈>, 박수강, 예술경영 459호, 2020.12.10.
<2020 미술시장 보고서>, 아트바젤+ UBS, 3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