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68화
35. 에로이카(4)
“주스면 됐지 왜 자꾸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해대요?”
“내가 여기 있는 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야! 잔소리 말고 빨리 지불해!”
“내가 미쳤어? 5유로짜리 음료수 마시겠다고 1,000유로를 내게?”
“너 자꾸 말이 짧아진다?”
“짧은 건 당신 생각이고! 어쩌자고 1,000유로나 준다고 한 거야? 당신 돈이야?”
“한 시간에 1,000유로면 싸지!”
“나한테는 아니야! 아니, 누구한테도 아니야!”
“번 돈 다 어쩌고 궁상을 떨어?”
“궁상은 얼어 죽을! 어쩔 거야! 주인장 기대하고 있잖아! 설레고 있잖아!”
도저히 시민들과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없었던 앙리 마르소가 억지를 부렸다.
그러지 않아도 손님이 적어 울적하던 카페 사장에게 앙리 마르소가 제시한 한 시간 대관 비용 1,000유로는 반갑기 그지없었다.
“후.”
흥분했던 고훈이 숨을 고르며 간신히 진정했다.
“이제 10분밖에 안 남았어요. 사람들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요? 더 민폐 끼치지 말고 조용히 소다나 마시고 나가요.”
“이게 내 잘못이야? 네가 얌전히 대관했으면 저것들이 저렇게까지 안 모여들잖아!”
“지금까지 뭘 들었어요! 그럴 돈 없다고!”
“왜 없냐고!”
고훈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다정다감한 가정과 화가로서의 성공, 가슴 벅찬 경험으로 평온을 되찾았거늘.
앙리 마르소와 언쟁을 나누다 보니 옛 성질이 비집고 나왔다.
“그래! 있다! 돈 많다! 네가 그림 사 줘서 돈 많아!”
“이제야 말이 통하네. 빨리 내.”
“하나도 안 통했어!”
그렇게 주문도 하지 않고 싸워대길 얼마간.
고훈과 앙리 마르소의 싸움을 구경하고자 몰려든 사람들이 음료와 군것질거리를 주문했다.
카페 사장은 두 사람이 카페를 빌리지 않아도 좋으니 되도록 오래도록 싸워주길 바랐다.
“어머. 어머. 세상에 이게 무슨 난리람. 잠시만요. 들어갈게요.”
그때 한 중년 여성이 인파를 뚫고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셰리!”
“유모!”
고훈과 앙리 마르소가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잠시 후.
셰리 가도의 미니 쿠퍼에 올라탄 고훈과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돌린 채 입을 내놓았다.
“훈이 잘 지냈어?”
“네. 셰리도 잘 지내셨어요?”
“그럼. 건강해 보여서 보기 좋다.”
셰리 가도가 앙리 마르소의 눈치를 살피곤 타일렀다.
“아무리 반가워도 그렇지. 사람들 많은 곳에서 그러면 어쩌니.”
“반갑긴 뭐가 반가워!”
그러지 않아도 인내심이 바닥 난 앙리 마르소가 짜증을 부렸다. 보조석에 무릎이 닿아 편히 있을 수 없었다.
“기껏 걱정해서 왔더니 보자마자 헛소리야.”
고훈이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1,000유로도 못 내는 녀석이 남 걱정은. 밥 먹으러 온 거지.”
“앙리 샤를 페르디낭 마르소.”
셰리 가도가 엄한 목소리로 부르자 앙리 마르소가 입술을 씰룩이곤 입을 다물었다.
“훈이 점심 먹었니? 블루베리 타르트 만들어 놨는데.”
“정말요?”
고훈이 블루베리 타르트를 만들어 놨다는 말에 반색했다.
“거봐. 밥 먹으러 온 거 맞잖아.”
“앙리.”
앙리 마르소가 혀를 찼다.
셰리 가도는 천방지축 아들을 달래고자 말을 붙였다.
“그나저나 아르센은? 같이 나갔던 거 아니었니?”
“몰라.”
앙리 마르소가 고훈과 다투느라 잊었던 일을 떠올렸다.
뒤늦게 현장으로 돌아와 구두 자국이 난 차량에 당황하고 사라진 앙리 마르소에 두 번 당황한 아르센은 생각도 못 한 채.
이 모든 일이 아르센이 늦게 왔기 때문으로 여겼다.
* * *
점심 식사 전.
셰리 가도가 블루베리 타르트를 가져다주었다.
솜씨는 여전하여 가장 완벽한 타르트라고 할 수 있었다. 직접 만들었다는 커스터드 크림은 정말 상품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걸 적당한 가격에 판매한다면 순식간에 부자가 될 것이다.
“너 이러고 있을 시간 있어?”
앙리 마르소가 턱을 괴고 물었다.
“왜요?”
“공모전.”
“완성했어요. 말로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뭘 그렸는지 몰라도 그걸로 되겠어? 기한까지 계속 그려도 위험할걸?”
“전에는 우승할 거 아니까 참가하는 거 아니냐고 해놓고. 합.”
오븐에 구웠을 텐데 어떻게 블루베리 과육이 이렇게 신선하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다.
“그건 그때 일이고.”
“자신있어요.”
“뭐?”
“잘 나왔어요. 할아버지도 말로도 좋아했고.”
무슨 꿍꿍이인지 말없이 지그시 노려본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된 일이에요?”
“뭐가?”
“SNBA.”
“뭔 소린가 했더니.”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를 언급하자 앙리 마르소가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어떻게 안 써요.”
앵테르미탕 제도는 전 세계 예술인이 동경하는 복지 제도다.
모든 예술가가 언젠가는 경제적 독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인정받기 전까지 그들에게 안정적인 생계유지가 얼마나 간절한 바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앙리 마르소가 손을 풀곤 의자에 등을 기댔다.
“뭐가 궁금한데.”
“왜 싸우는지?”
“쓰레기 버리는 게 어떻게 싸움이야?”
가끔 잊는데 이 사람과 대화할 때는 상식이라든가 통념을 잠시 내려놔야 한다.
눈높이를 맞춰서 물어봐야 대화가 통한다.
“그 사람들이 왜 쓰레기에요?”
“나눠 쓰라고 준 돈을 지들끼리 쓰잖아. 감히 내 돈을.”
역시나 오해로 생긴 일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프랑스 출신의 여러 예술인이 앙리 마르소를 비난하고, 거리에서 시위도 벌이지만 정작 규탄되어야 할 쪽은 그들이다.
“증거가 있을 거 아니에요.”
“있지.”
“그런데 왜 얘기 안 해요?”
앙리 마르소가 날 빤히 바라보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누군데.”
돈 많은 깡패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또 쓸데없이 싸울 것 같아서 어깨를 으쓱였다.
“난 정치하는 사람도 아니고 협회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니야. 경찰이나 판사는 더더욱 아니고.”
맞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데, 넌 잘 알아 둬. 내게 예술 외의 일을 기대하지 마. 남 돕고 정의를 실현하고 그런 일 따위 아무 관심도 없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종종 ‘난 무엇이 아니야’라는 말을 꺼냈던 것도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번 상황은 조금 다르다.
“피해를 받고 있잖아요. 자기를 변호해야죠.”
“피해?”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젖혀 웃었다.
“이 내가 피해를 받았다고?”
“아니에요?”
“마음대로 떠들라고 해. 내 팬들이 눈 하나 깜짝하나.”
“…….”
“내 작품을 보고 내 목소리를 듣고 나를 아는 사람들이 짐승 소리에 귀나 기울일 것 같아? 천만에.”
이상한 사람이긴 하지만 이런 태도는 정말 부럽기도 하다.
본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깊이 믿는 거다.
작품으로 연대한 그 관계가 깨질 리 없다고 믿는 거다.
그만큼 자부심과 자긍심이 강하다는 말이고 동시에 그런 자신을 좋아하는 팬들이 헛소리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뜻.
생각해 보면 저 개차반 같은 성격으로도 자기 팬만은 끔찍이 여겼다.
가끔 자아가 비대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가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리라.
“그렇네요.”
인정한다.
그는 그렇게 생각할 만한 실력과 결과를 여러 번 보여주었다.
“갑자기 뭐야.”
“사실이니까요.”
다만 그가 간과하는 문제가 걱정이다.
“팬들은 그렇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있잖아요. 선동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어요?”
앙리 마르소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에 믿음대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아군도 적도 아닌 사람 중에서는 저들이 하는 거짓말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생겨날 거다.
한 번 고정된 관념을 바꾸는 일이 쉬울 리 없다.
“나서 봤자 변하는 건 없어.”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삐딱하게 틀곤 말했다.
“내가 잘났다고 아무리 말해봤자 남은 인정하지 않아. 다수의 남이 잘났다고 해야 그렇게 되는 거야.”
할아버지의 예술관과 같은 말이다.
“내가 내 입으로 난 정당하다고 말해봤자 그놈들이 믿겠어?”
“그럼요?”
“절대다수가 입을 모으게 해야지.”
걱정과 달리 나름대로 생각해 둔 일이 있는 것 같다.
“3,000명. 그래. 많이 쳐줘서 3만 명이 그놈들 말을 믿는다고 해. 내가 그놈들 다 잡아들여서 고문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그 수는 변하지 않아.”
“그럼요?”
“나머지 70만 명을 내 사람으로 만들면 돼.”
대충 지금 프랑스 예술인 인구가 73만 명 정도 되는 모양이다.1)
“어떻게요?”
“부당한 심사 때문에 수혜 대상에서 제외된 40만 명이 이번 주부터 실업 급여를 받게 돼.”
앵테르미탕 이야기다.
“시작이야. 내년에는 모든 예술인이 받게 될 거야. 고용 보험뿐만 아니라 협회 재단에서 의료 보험 비용의 절반을 지불해 주지.”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오는데요?”
“나오는 게 아니라 원래 있던 돈이야.”
앙리 마르소가 케일 주스로 목을 축였다.
“도둑질하는 놈들만 사라져도 충분히 굴러가. GDP의 30%가 사회보장비용인데 부족할 리가.”2)
혹시나 사비를 들이나 싶었더니 그건 아닌 모양.
전부터 유럽에서는 돈 많기로 소문난 나라답게 이런 일도 가능한가 보다.
“정치적인 일은 안 한다고 했으면서 잘하네요.”
“권리 행사야.”
앙리 마르소는 끝까지 본인의 행동을 정치와 연결 짓지 않았다.
예술인으로서 권리를 행사하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으로 73만 명이나 되는 예술가들이 혜택을 볼 수 있다면 뭐라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아니지.
협회에서 제명된 3,000명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제외될 거다.
“복잡한 이야기 따위 해봤자 아무 소용없어. 먹이를 받아먹을 수 있단 사실과 그걸 누가 주는지만 인식시키면 돼.”
“그렇게 말하면 오해받아요.”
사람을 가축 취급하듯 말하니까 오해가 생기는 거다.
“아니.”
앙리 마르소가 잔을 내려놓았다.
“누가 진짜 개돼지 취급하는지는 당해본 사람이 잘 알아. 마음에 안 들면 단두대에 끌고 가는 인간들이야. 이 나라 인간들은.”
이러니저러니 걱정되었는데 다 생각이 있구나 싶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럼 요샌 뭐 해요?”
“뭐 하긴. 작업하지.”
“무슨 작품?”
“……어?”
“무슨 작품 하냐고요.”
“그냥.”
대답이 떨떠름하다.
“오랜만에 왔는데 구경 좀 시켜줘요.”
“……안 돼.”
“왜요.”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무슨 보물을 숨겨놨길래 비싼 척하는지 모를 일이다.
저렇게 정색하고 거절하니 더 보고 싶다.
“놀았죠?”
“뭐?”
“남한테는 최선을 다하라니, 죽을힘을 다하라니 하면서.”
앙리 마르소의 얼굴이 뒤틀렸다.
제명된 사람들이 도발할 때는 꿈쩍도 안 하던 사람이 이럴 때는 곧잘 반응하는 게 귀엽다.
* * *
1)2028년 프랑스 예술 인구를 예측한 과정을 설명하는 주석입니다.
안 읽으셔도 됩니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2010년에 분석한 ‘주요국가 문화예술통계 실태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07년 프랑스의 문화예술 종사자는 490,500명이다.
다만 위 보고서는 13p에서 “예술가 인구수에 대한 파악은 각국의 조사 시점 및 기준이 상이하여 수치만으로 비교할 경우 오해의 소지가 있음”이라고 밝히며, “기준차이로 인한 오류의 가능성이 크다”고 명시해 두었다.
또한 피에르 미셸 멩거는 ‘Les artistes en quantités. Ce que sociologues et économistes s'apprennent sur le travail et les professions artistiques’에서 205p에서 프랑스 예술 노동력의 증대 비율을 분석했다.
1982년에서 1990년까지 문화 예술인이 37% 증가했으며 1990년과 1999년 10년 사이에 19% 증가.
1999년과 2005년 7년 사이에 16%가 증가해 2000년대에도 20%에 근접한 성장률을 보였다고 밝혔다.
덧붙여 프랑스 전체 노동인구보다 4.5배 빠르게 증가했고, 2005년에는 프랑스 전체 노동자의 2%를 차지하는 위치까지 올랐다고 설명한다.
비슷한 추이로 2010년대와 2020년대가 진행되었다고 가정할 때, 2007년 문화예술 종사자가 490,500명이니 10년 주기로 20%가 성장했다면 작중 시점 2028년에는 706,320명 정도가 문화 예술인으로 활동하지 않을까 하는 추론.
근 미래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 통계 자료를 찾을 수 없기에 필자 나름의 예상 수치이며 인구증감, 예술 환경 변화 등이 고려되지 않은 수치다.
2)2016년 프랑스의 사회보장수당은 GDP의 32.1%인 7,145억 유로(한화 약 954조)에 이르렀다.
출처: “프랑스, 사회보장 비용 유럽에서 최고, 효율성 확인”, <유로 저널>, 2018.06.27, 전은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