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67화
35. 에로이카(3)
“예술인의 생활을 보장하라!”
“억울하게 제명된 이들을 도와주세요!”
“앙리 마르소는 사퇴하라!”
파리에 와 보니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거리 곳곳에 앙리 마르소를 규탄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루브르 박물관 앞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SNBA의 만행을 고발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간 뉴스를 통해 어떤 상황인지 조금은 알고 있었지만 충격이었다.
“심상치 않구나.”
할아버지가 혀를 찼다.
“함께해도 어려운 시기에.”
같은 생각이다.
영화계를 접하면서 미술계가 얼마나 작은 시장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일부 작가의 작품이 수천억 원에 거래되는 것조차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것은 결코 화가들의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없다.
방태호의 말에 따르면 작년, 미술 시장에서 거래되는 금액 중 80퍼센트가 죽은 사람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현재 미술계는 살아 있는 사람이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미술계조차 그림을 투자 대상으로 여기고, 투자자를 유치하는 데 주력하고 있으니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어서 희소성이 높은 작품.
즉, 죽은 화가나 고령 화가의 작품이 잘 팔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와 장미래, 앙리 마르소, 페르디난도 곤잘레스 같은 사람이 많이 생겨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미술계에 유입되는 이가 늘 테니까.
할아버지의 작품을 좋아해서 미술관을 찾은 사람이 다른 작가의 작품을 보게 되고 그렇게 조금씩 영역을 넓혀나가다 보면 자본은 자연스레 따라붙게 된다.
돈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 따르기 마련이다.
활동하는 화가들이 안정된 삶을 추구하기 위한 근본적 해결책은 지원 정책이 아니라, 그림을 보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고.
화가들은 그들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다양한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누가 틀리고, 내가 옳고를 따지는 건 시장을 위축시킬 뿐이다.
“정말 반대해서 제명했을까요?”
“단면만 보면 그렇게 보이는구나. 하지만 볼 수 없는 곳도 상상할 수 있지.”
할아버지 말씀대로다.
사건을 있는 그대로 두면 앙리 마르소가 자신에게 반기를 든 이들을 내친 일이 맞다.
다만 최근에는 앵테르미탕 제도의 수혜자가 폭발적으로 늘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혹자는 이를 여론을 수습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간 SNBA 내부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의심해 볼 수도 있다.
여하간 직접 물어보면 알게 될 일.
마담 셰리 가도의 초대를 받았으니 겸사겸사 대화해 볼 생각이다.
퐁뇌프 역 앞이 보인다.
“여기서 보기로 했어요.”
“할아버지가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일 있으시잖아요.”
“걱정되니까 그렇지.”
시간을 확인해 보니 11시 30분이다.
12시에 순회전 관련해서 루브르 박물관과 미팅을 하기로 하셨는데, 샤똥에서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다.
여기서 50분 거리의 마르소 저택을 왕복했다간 약속 시간을 어기게 될 것이다.
“지금 바로 가셔야 하잖아요. 괜찮아요. 12시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할아버지가 고민하시더니 이것저것 챙기셨다.
“호텔 주소는 알고 있어?”
“네.”
“지갑이랑 핸드폰은 잘 가지고 있고?”
“네.”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해야 한다? 모르는 사람 따라가면 안 되고.”
“걱정 마세요. 애도 아니고.”
“네가 애지. 어른이야?”
할 말이 없다.
“안 되겠다. 좀 늦어도 가도 씨가 올 때까지 같이 있자.”
“안 돼요.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어서 가세요.”
이대로 대화하다 보면 12시가 될 듯해서 차에서 내렸다.
할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 당부하셨다.
“가도 씨 만나면 할아버지한테 전화해. 만났다고.”
“그럴게요.”
연락을 안 드리면 경찰이라도 부르실 것 같아서 꼭 그러겠다고 약속한 순간 길 건너편이 소란스러워졌다.
“앙리다!”
“꺄아아!”
고개를 돌리니 앙리 마르소가 자기 차를 걷어차고 있다.
“마르소가 대신 나왔나 봐요.”
“그래. 재밌게 놀다가 와.”
할아버지가 안도하시곤 차를 돌렸다.
* * *
“왜 이렇게 안 와?”
한편 아르센에게 를 맡긴 앙리 마르소는 차 안에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피에르 말로가 에 넋을 놓은 탓도 있었고, 아르센이 를 그린 사람이 앙리 마르소임을 숨기기 위해 동선을 복잡하게 잡은 탓도 있었다.
분장을 지우고 오기까지 한참 더 걸릴 터.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앙리 마르소가 아르센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가 포기했다.
평소 스마트폰 및 모든 짐을 아르센이 가지고 다녔기에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허기도 밀려들었다.
“칫.”
앙리 마르소가 답답함을 못 참고 차에서 내렸다.
“깜짝이야.”
“앙리잖아?”
“멋있다.”
유명 인사답게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마다 한마디씩 꺼내며 앙리 마르소를 관찰했다.
“여긴 왜 왔지?”
“혼자 왔나?”
“혹시 시위 때문에?”
저 멀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앙리 마르소를 규탄하는 시위 소리도 들려왔다.
갑갑해서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귀찮은 상황을 접하는 것보단 나을 것으로 판단한 앙리 마르소가 차 문을 열고자 했다.
“……?”
덜컥덜컥-
앙리 마르소가 당황했다.
평소 아르센이 운전하고 관리하던 차량이라 어떤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지조차 몰랐다.
“이거 왜 이래?”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뭐야? 못 들어가는 거야?”
“왜? 키 없나?”
앙리 마르소가 손잡이에 정맥을 댔다.
“뭐 하는 거야?”
“비싼 차는 저렇게 정맥 스캔해서 연대.”
“정말? 신기하다.”
그러나 몇 번을 반복해도 인식되지 않는다는 경고등이 깜빡일 뿐이었다.
뒤쪽 문 센서가 고장 났나 싶어 차량 주변을 돌며 한 번씩 시도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빌어먹을.’
문득 그의 뇌리에 정맥 등록이 귀찮은 탓에 아르센에게 등록하라 지시했던 기억이 스쳤다.
열 방도가 없었다.
“안 되나 봐.”
“귀여워.”
앙리 마르소가 이를 바득 갈았다.
백성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창피를 준 차를 폐차시켜야만 속이 풀릴 듯했다.
분풀이로 차를 걷어차자 경보음이 요란히 울렸다.
시장하고 지루한 데다 차까지 말썽이니 앙리 마르소의 얄팍한 인내심이 바닥나고 말았다.
“가요.”
때마침 고훈이 길을 건너왔다.
앙리 마르소가 고훈을 의아히 바라보았다.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데리러 온 거 아니었어요?”
“무슨 말이야?”
“셰리 가도랑 여기서 보기로 했는데.”
며칠 전 유모 셰리 가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초대하지 말라고 했거늘 기어이 들일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래? 언제 보기로 했는데.”
“30분 뒤에요.”
이 상황을 30분이나 참을 수 없었던 앙리 마르소가 고훈을 훑어봤다.
“돈 있어?”
“돈?”
“여기만 아니면 돼. 그래. 저기 들어가면 되겠네.”
앙리 마르소가 역 근처 카페를 가리키며 말했다. 서민들이나 다니는 싸구려 카페였으나 길바닥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돈 없어요?”
상황을 모르는 고훈이 의아히 물었다.
“그렇게 됐어. 있어. 없어?”
“있긴 한데.”
고훈이 스폰지빵 지갑을 꺼냈다.
카드가 있었지만 할아버지 고수열이 비상금으로 꼭 가지고 다니라고 환전해 준 20유로 지폐 다섯 장이 들어 있었다.
“왜 그것만 가지고 다녀?”
“이 정도면 충분하죠.”
“다음부턴 넉넉히 들고 다녀. 그걸로 차나 마실 수 있겠어?”
“혼자 쓰기엔 충분해요.”
“나는.”
“내가 왜 당신까지 챙겨야 하는데요?”
두 사람이 만나자마자 옥신각신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돈 빌리는 거야?”
“돈이 없나 봐.”
“앙리 마르소가?”
사람들의 말에 고훈이 인상을 썼다.
그러지 않아도 여러 구설수에 휘말린 앙리 마르소가 또다시 의도치 않은 오해를 사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왜 저러지?”
“돈 주기 싫나?”
앙리 마르소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이상한 말 하니까 그렇죠.”
“그럼 웃어.”
“어떻게 웃어요.”
“웃으라고. 너 때문에 더 이상하게 보잖아.”
고훈이 억지로 웃어보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되진 않았다.
다행히 상황을 파악한 사람들은 두 사람의 만담을 즐겼다.
“큭큭. 웃으래. 꼭 돈 뺏는 사람처럼 말한다.”
“그러게. 흐흫.”
앙리 마르소를 걱정하는 고훈에게 그들의 대화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뺏는 거 아니에요. 깡패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당연한 말을 왜 해!”
앙리 마르소가 버럭 소리쳤다.
“오해하잖아요.”
이미 여러 사람에게 공격받는 앙리 마르소가 또 다른 빌미를 줄까 봐 걱정되었다.
“제가 주는 거예요.”
고훈이 가지고 있던 지폐를 모두 앙리 마르소의 손에 쥐여 주었다.
“자, 보셨죠? 뺏는 거 아니에요. 사람 돈 뺏고 그런 쓰레기 같은 사람 아니에요.”
“그러니까 당연한 말을 왜 하냐고! 이건 또 왜 날 줘?”
“오해는 풀어야 할 거 아니에요. 청소년한테 돈 뺏는 인간 말종 쓰레기라잖아요.”
“그렇게까지 말 안 했어! 가져가!”
“그러니까 그런 사람 아니라고 하는데 왜 자꾸 화를 내! 쓰라고! 가져 가라고!”
“이이이이익!”
앙리 마르소가 고훈의 손목을 낚아채 카페로 향했다.
* * *
[억만장자 앙리 마르소 거리에서 돈 빌리다?]
[앙리 마르소 파산?]
[고훈, “다시 한번 말하지만 뺏긴 게 아니라 준 거예요.”]
[고훈, “앙리 마르소는 깡패가 아니다.”]
오늘 오전, 퐁뇌프 역 근처에서 앙리 마르소와 고훈이 또 한 번 친분을 과시했다.
모종의 이유로 자차에 탑승하지 못한 앙리 마르소를 지나가던 고훈이 발견하고 도운 것.
현장에 있던 사람은 앙리 마르소가 지갑을 두고 내렸는지, 고훈에게 돈을 빌리려 했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오해가 생길 것을 걱정한 고훈이 시민들에게 “청소년한테 돈 뺏는 인간 말종 쓰레기는 아니다”고 당부했다.
평소 고훈이 앙리 마르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일로, 두 사람 사이가 여전히 각별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한편 두 사람은 퐁뇌프 역 카페를 전세 내느냐 마느냐로 또 한 번 다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