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57화
34. 여름 너울(3)
1958년 문화예술인의 생계 안정을 위해 시행된 앵테르미탕은 1969년 예술인의 실업급여 제도로 확대되었다.1)
덕분에 예술가들은 소득의 절반을 보험료로 지불하는 대신 수입이 없을 때, 본인의 기준소득을 실업 수당으로 받게 되었다.
프랑스의 공연예술가는 작년 기준소득이 월 2,000유로였고 올해 한 달 수입이 500유로에 그쳤다면, 보험료로 소득의 50%인 250유로를 지불하고 1,500유로의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혜택을 누리는 예술가는 영화, 공연, 방송 분야에 그쳤는데, 2024년 프랑스 모든 예술인에게 적용되었다.
메종 데 아티스트(예술가의 집)만으로는 생계를 보장받을 수 없었던 화가들에게도 혜택의 길이 열린 것이었다.
막강한 재력으로 정치인들을 협박하고, 강력한 발언력으로 여론을 주도한 앙리 마르소의 업적이었다.
혜택 조건이 극적으로 완화되며 앙리 마르소는 프랑스 예술계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2024년 이후 개선된 앵테르미탕의 수혜 대상은 올해 2028년 14만 8,753명.
2023년 13만 2,442명에 비하여 고작 1만 6,311명이 늘어난 데 그쳤다.
이유는 앵테르미탕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노동 시간 조건 때문이었다.
영화사, 기획사, 극장 등 일정 시간 고용되어 활동하는 예술인들은 비교적 노동 시간을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반면.
화가의 작업 시간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기에 화가들은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를 통해 노동 시간을 인증받아야 했고.
그 결정권을 가진 협회인은 이를 자신의 권력 수단으로 삼았다.
그들은 실업급여가 절실한 이들을 상대로 노동 시간을 인정해 주는 대가를 받아냈다.
앙리 마르소는 자신의 위업을 이용하는 이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셰바송 협회장과 함께 그들을 도려내고자 여러 방법을 강구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행정에 이의를 제기하려 했으나 후환이 두려웠는지 나름의 기준을 세워두었기에 긴 싸움이 예상되었다.
그 시간 동안 피해는 계속 누적될 터였다.
그렇게 벼르고 있던 차, 일부 협회인들이 공모전 심사 방식에 반기를 든 것이 앙리 마르소를 자극했다.
“그렇게 됐어.”
설명을 들은 미셸은 걱정되었다.
제아무리 앙리 마르소라 할지라도 대학과 학계, 언론, 현장을 아우르는 그들과 정면으로 싸우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언제부터?”
“두세 달.”
그녀가 앙리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잔소리를 들으리라 생각했던 앙리 마르소는 미셸이 아무 말 않자 의아했다.
“뭐야.”
“뭐가?”
앙리는 그녀의 태연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지만, 하고 싶은 말을 참는 성격이 아님을 알기에 굳이 더 묻지 않았다.
“씻는다.”
“응.”
앙리가 욕실로 향하고 혼자 남은 미셸은 나름대로 생각을 이어갔다.
그의 속내는 뻔했다.
프랑스 예술계가 그로 하여금 더욱 발전하고, 모든 예술인이 그를 찬양하고 나서길 바랄 터였다.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예술계에 기생하여 이권을 챙기는 이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일을 적당히 타협하고 시간을 끌며 해결할 성격도 아니었다.
문제는 저들의 대응.
이미 3,000명 이상이 협회의 지침을 반대하고 나섰고 그 수는 매일 불어나고 있었다.
미셸이 스마트폰을 펼쳐 프랑스 미술 포럼 사이트에 접속했다.
역시나 앙리 마르소와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를 규탄하는 게시글이 속속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지금 앙리가 위험한 이유 적는다]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가 소속 평론가, 예술가 3,000명 제명했단 기사 보고 적음.
문제는 제명 시기가 저들이 공모전 심사 폐지를 주장한 바로 다다음 날이라는 거임.
협회인 3,000명이 정당한 방식으로 성명서를 냈는데 참작하기는커녕 제명한다? 그것도 바로 이틀 뒤에?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을 텐데 가능함.
다들 알다시피 SNBA은 실질적으로 앙리 마르소가 장악했다고 봐도 무방함.
셰바송 협회장이 방침을 따르지 않은 이미 경고한 사항이고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말했지만 웃기는 이야기임.
방침이란 거 자체가 앙리 마르소 입맛대로 바뀌는데, 그걸 따르지 않았다고 제명하는 건 결국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자르겠다는 말임.
대단히 위험한 발상 아닌가?
제명된 사람들이 부당한 요구를 한 것도 아님.
공모전의 취지가 좋은 작품을 조명하기 위함이니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말임.
평생 미술 공부했던 사람들이 나서겠다는데 그걸 일방적으로 거부하는 건 몰지각한 행위임.
어차피 앙리 마르소가 바라는 대로 진행되겠지만 이런 비민주적인 행태를 막을 수 없다는 게 너무 속상하다.
나중에 옳은 말 하는 사람들은 다 없어지고 앙리 마르소 눈치만 보게 될까 봐 무섭고.
미셸은 여러 글을 보며 입술을 자근거렸다.
실제로는 부정한 일을 저지른 이들이 이권을 지키기 위해 탈퇴하겠다며 협회를 협박한 일이었다.
그들과 협상할 생각이 조금도 없던 앙리 마르소는 원하는 대로 해줬을 뿐이었다.
그러나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제명당한 이들이 억울하게 당한 것처럼 비칠 수 있었다.
정론을 들먹이며 정당성을 얻고 앙리 마르소의 약점을 꼬집는 글들은 하나같이 일반인이 쓴 것처럼 보였다.
‘이럴 줄 알았지.’
미셸이 걱정하는 일은 하나.
예술가는 평판으로 먹고사는 존재며 그것은 아주 손쉽게 뒤집힐 수 있었다.
앙리 마르소가 설령 정당한 목적을 위하고 절차적으로 문제없이 행동했다고 하여도 도덕적 흠결이 발목을 붙잡을 수 있었다.
여러 사이트에 올라오는 글들도 그것을 노렸다.
자유의 가치를 그 무엇보다 중시하는 프랑스인들에게 앙리 마르소가 비민주적인 절차로 사람들을 핍박했다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었다.
한번 잘못 알려진 사실은 돌이킬 수 없었기에 미셸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건수 잡았다고 생각할 텐데.’
앙리 마르소와 친분을 유지하는 정당은 정권을 틀어쥔 앙 마르슈!(En Marche!)2)
그와 정치적 반대 입장에 있는 사회당(Parti Socialiste: 파르티 소시알리스트)에게 이번 사건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협회의 제명 지시가 정당한지를 두고 논란이 생길 게 분명했다.
‘빨리 움직여야 해.’
모든 싸움은 선제공격이 중요했다.
미셸이 입술을 깨물었다.
주변 사람 마음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이 주제에 머리 회전은 빠른지라 걱정은 덜하지만, 타인을 무시하는 거만함은 큰 약점이었다.
‘해명으로 끝내면 안 돼. 철저히 뭉개야지.’
미셸 플라티니는 이 상황을 타개할 가장 좋은 방법은 앵테르미탕 제도를 악용한 이들을 단두대 위에 올리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앙리 마르소도 충분히 고민해 봤을 테고 그런 일이라면 비서 아르센의 전문 분야였다.
“미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답을 찾기 힘든 상황에 앙리 마르소가 그녀를 불렀다.
“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앙리의 진지한 목소리에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살롱전과 그 공모전을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에게 맡긴 이유는 단 하나였다.
최고의 미술제로 꾸며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감동하고 공감하며 슬퍼하고 기뻐하길 바랐기에 그녀에게 손을 내민 것이었다.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다른 걱정은 하지 말라는 그의 말로 미셸은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그래. 걱정 마.”
미셸이 시원하게 답했다.
“뭔 소리야.”
앙리 마르소가 젖은 머리를 넘기며 얼굴을 내밀었다.
“빨리 들어와.”
* * *
강원도로 가는 길에 차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안 힘드세요?”
“음?”
“계속 운전하시는 거요. 자율주행하시면 편하실 텐데.”
할아버지는 씁쓸하게 웃을 뿐 대답하지 않으셨다.
어머니, 아버지를 잃은 사고가 트럭 운전자의 졸음운전과 자율주행 시스템의 문제가 겹쳐 발생한 일이라 나도, 할아버지도 쉽게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고속도로나 집과 학교처럼 정해진 코스 정도는 자율주행이 가능하지만, 운전대를 고집하시는 이유다.
화제를 바꿨다.
“할아버지, 막국수 먹어요. 동치미 막국수가 맛있대요.”
“좋지. 동치미 막국수도 알아?”
“찾아봤어요.”
여행 오기 전에 무슨 음식이 맛있을까 찾아봤는데, 강원도는 막국수라는 음식이 맛있다고 한다.
“동치미 막국수가 뭐야?”
“동치미 국물에 메밀로 만든 국수 말아서 먹는 거래.”
살얼음이 낀 동치미 막국수 사진을 찾아서 보여주었다.
“신기하다. 막국수는 비빔밖에 안 먹어 봤어.”
“강원도 물막국수가 별미지. 감자 옹심이 같이 하는 곳이 있으면 좋을 텐데.”3)
강원도에 별장을 두신 할아버지답게 이것저것 알고 계신 게 많은 것 같다.
“감자 옹심이가 뭐예요?”
차시현과 동시에 물었다.
“감자 간 걸 빚어서 육수랑 같이 끓인 거야. 쫄깃쫄깃한 게 맛있어.”
어떤 음식일지 감이 잘 안 온다.
감자는 전으로 부쳐 먹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과연 그 아성을 넘어설 수 있을지 궁금하다.
집에서 출발하고 3시간 정도 흘렀을까.
고속도로를 벗어나 작은 도시가 들어왔다. 동해시란 곳이다.
“여기서 밥 먹고 들어가자.”
새로운 음식을 먹을 수 있어 들뜬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던 차에 단층 건물 앞에 이르렀다.
자동차가 많은 걸 보니 맛집인 듯하다.
자리를 잡고 앉아 차림표를 보곤 깜짝 놀랐다. 차시현도 마찬가지인지 나보다 먼저 반응했다.
“꿩?”
꿩만두라는 걸 팔고 있다.
“꿩이 뭐예요?”
“닭 같은 거야. 꿩꿩 하고 울어서 꿩.”
“영어나 프랑스어로는 뭐라고 해요?”
“으잉? 글쎄. 찾아보자.”
영어로는 Pheasant라고 나와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기로는 상당히 고급 식재료인데 8,000원밖에 안 한다고 하니 놀랍다.4)
“먹어 볼래?”
“네.”
고급 식재료인 만큼 한 번쯤 꼭 먹어 보고 싶은 나와 달리 차시현은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먹어도 돼요?”
“그럼. 먹어 보면 똑같아.”
차시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먹자고 하는 건 안 먹으면서 할아버지가 권하는 건 믿는다. 저번에 익히지 않은 해바라기씨를 먹었던 탓인가.
“물막국수 세 개랑 만두 하나 주세요.”
“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공모전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이 많더구나.”
“네. 마르소가 반대하는 사람들 다 잘랐대요.”
“그런 식으로 해선 적만 늘릴 텐데.”
“알아서 할 거예요.”
짜증 나는 놈이지만 멍청하진 않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그랬을 것이다.
“그보다 생각보다 규모가 커서 놀랐어요.”
“얼마나?”
차시현이 끼어들었다.
“1,700명이나 신청했대.”
입을 떡 벌린다.
“그걸 다 어떻게 전시할지 모르겠구나. 공간 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러니까요.”
할아버지 말씀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예선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특정 집단의 판단을 배제한 공모전이기에 모두 관람객의 선택으로 정해지게 된다.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가 추가 공지한 내용에 따르면 모든 참가자는 11월 10일까지 작품을 파리 SNBA 본부에 배송해야 한다.
작품은 11월 30일부터 12월 6일까지 파리 전역에 전시되어 관람객과 가상 전시실 방문객에게 평가받는다.
“플라티니 대표가 골치깨나 썩겠어.”
“많아서요?”
“그렇지. 작품이 어디에 전시되는지에 따라 노출도가 달라질 수 있잖니. 간접적으로 투표에 영향을 줄 거야.”
“아.”
할아버지 말씀대로다.
같은 건물이라도 전시 순서에 따라 영향이 생기는데 하물며 이 경우는 더욱 문제가 될 수 있다.
그 많은 작품을 같은 공간에 전시할 수 없으니, 여러 곳에 분산해 둘 텐데 공정할 수 없다.
미셸 플라티니가 뛰어난 큐레이터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싶다.
“음식 나왔습니다.”
직원이 만두와 막국수를 가져다주었다. 큰 만두가 열 개나 있다.
“이걸 원래 이렇게 많이 주시나요?”
“원래 다섯 개인데, 사장님이 더 드리라고. 팬이시래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고개를 돌리자 막국숫집 사장이 멋쩍은 듯 웃었다.
인사하고 얼음이 살짝 낀 육수를 들이켜자 세 시간 동안 자동차 안에 있어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하게 뚫렸다.
“햐!”
* * *
1)출처: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박문각
<다시 태어난 반 고흐>의 앵테르미탕은 프랑스에서 실제로 시행 중인 앵테르미탕에 부정이 개입되었다는 가상의 설정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사실과 다름을 밝힙니다.
좋은 제도예요.
2)정식 명칭은 정치쇄신을 위한 협회(Association pour le renouvellement de la vie politique). 에마뉘엘 마크롱이 창당한 정당이다.
짧게 앙 마르슈!(전진!)로 불린다.
3)감자를 갈아 반죽하여 새알만 한 크기로 동글동글하게 빚어서 만든 음식(강원도).
출처: 우리말샘
4)유럽 특히 영국에서는 꿩 고기를 고급 식재료로 다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