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9화
8. 화룡점정(1)
암스테르담 국립 레이크스 박물관.
내가 죽기 5년 전에 설립된 곳으로 여행 가이드에 따르면 250여 개의 전시실을 둔, 그야말로 네덜란드 문화예술의 보고라고 한다.
전시한 회화만 5,000점이 넘는다고 하던데, 과연 여행하는 동안 제대로 볼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여기다.”
할아버지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작은 인공 연못 건너편에 고딕풍의 거대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에도 와보지 못한 곳을 지금에서야 찾게 되니 이런 호강이 따로 없다.
사람이 많다.
연못 주변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박물관과 연못 사이의 조형물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다.
특이한 조형물이다.
I amsterdam.1)
‘I’와 ‘Amsterdam’의 ‘Am’을 채도 높은 빨간색으로 칠해서 ‘I am amsterdam’으로 읽을 수도 있도록 유도했다.
‘무슨 의미지?’
얼핏 보면 나는 암스테르담 사람이라는 뜻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다.
WH배움 미술관 앞 조형물도 그렇고 이 시대의 조형물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차차 알게 되겠지.’
나 또한 현대 미술과는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앞으로 조금씩 서로를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
조급할 필요 없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저 조형물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웃는다는 사실이니까.
“그럼 즐겁게 관람하세요.”
“감사합니다.”
직원이 준 티켓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화풍을 보면 렘브란트의 그림 같다.
“이게 야경이에요?”
“그래. 이곳에서 가장 흥미로운 그림 중 하나지.”
할아버지가 표에 넣을 정도면 말 다 하지 않았냐고 덧붙였다.
확실히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사랑받는 렘브란트의 <야경>은 관점이 달라지고 시대가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고유한 가치가 있다는 증거다.
“야경의 원래 제목이 따로 있는 걸 알고 있느냐?”
“네?”
“원래 제목은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였단다.”
길다.
이상한 점은 나조차 <야경>의 제목이 따로 있음을 처음 듣는다는 것이다.
“그림이 어두워져서 꼭 밤에 순찰하는 것처럼 보이게 됐지. 그래서 야경이란 별명이 붙었단다.”
“어두워졌다고요?”
“렘브란트는 야경을 그릴 때 연화물 안료와 버밀리온을 사용했는데, 거기 들어 있는 납과 황이 공기에 노출되어 검게 변했어.”
또 그놈의 납이 문제다.
“백 년 정도 지난 뒤에는 그림을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대. 그 때문에 한밤중을 그렸다고 착각한 거지. 또 이게 걸려 있던 곳에 벽난로가 있었는데 그 재가 묻어 어두워졌다는 이야기도 있더구나.”
반 고흐 미술관에 있는 내 그림도 변색이 심했지만 대낮을 한밤중으로 착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재료를 선정할 때 과학 지식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그럼 지금도 알아보기 힘들어요?”
“표면을 긁어내서 어느 정도는 복원했지. 하지만 렘브란트가 완성했던 모습은 그대로는 아닐 거야.”
그런 대작이 다른 이유도 아닌 무지 때문에 훼손된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직접 보면 알겠지. 올라가자.”
할아버지와 함께 계단을 올랐다.
명예의 전당이라는 전시실은 입구부터 사람을 경건하게 하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전시된 작품뿐만이 아니라 건물 자체가 예술 작품이다.
‘아.’
그 입구 바로 맞은편에.
렘브란트의 <야경>이 걸려 있다.2)
‘크다.’
세로 3.63m에 가로로 4.37m로 과연 대작이라 할 만하다.
이렇게나 큰 그림은 그려본 적 없는데, 이 작업이 얼마나 고될지 짐작조차 안 된다.
“……?”
그림이 뭔가 이상하다.
할아버지에게 그림에 변색이 있었다는 건 들었지만 가운데 두 인물이 정가운데에 있다.
물론 중요한 두 인물을 조명하기 위해 중앙에 배치했겠지만, 이렇게 역동적인 자세와 자연스러운 인물 배치가 돋보이는 작품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
렘브란트답지도 않다.
“왜?”
“렘브란트답지 않아서요. 그림은 진품 같은데, 가운데 두 인물이 너무 정가운데에 있어요.”
“하핳. 돗자리 펴도 되겠구나.”
갑자기 돗자리를 왜 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 그림은 원래 민병대의 집회소에 걸려 있었단다. 그것을 꺼내 전시를 하려는데 작품이 너무 커서 위와 왼쪽을 크게 잘라냈어. 오른쪽도 조금 잘라서 두 인물이 가운데에 오게 했지.”
제정신이 아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들이다.
“얼마나요? 얼마나 잘랐는데요?”
“음. 위와 왼쪽으로 60㎝ 정도 잘라냈다고 하더구나.”
만일 이 그림이 잘리지 않았다면 지금 보이는 가운데 두 인물이 좀 더 오른쪽에 위치했을 거다.
오른쪽에서 그림 가운데로 걸어오는 듯 느껴졌을 테고 당연히 이동하는 느낌이 훨씬 더 잘 살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그림을 잘라내는 게 드문 일이 아니었어. 그나마 1885년에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는가 싶었지.”
“아니었어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1976년이었을 게야. 정신 나간 놈이 칼로 그었어.”
“……이 그림을요?”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설마 하며 물었지만,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40년이 넘어선 2019년에야 복원했지. 기술이 따라주지 않았거든.”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다.
내 그림을 그렇게 많이 보유한 반 고흐 미술관이 왜 굳이 모조품을 걸어두고, 진품은 유리로 막아두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세상에 미친놈들이 너무 많아서다.
<야경>의 안타까운 사연을 뒤로하고 천천히 그림을 살폈다.
인물마다 부여된 개성 있는 표정, 의복의 섬세함, 여러 이유로 어두워졌음에도 알아볼 수 있는 특출한 명암대비, 풍부한 색조.
그리고 민병대를 상징하는 마스코트 닭을 멘 작은 마녀까지.3)
이 그림은 단순히 여러 인물을 그린 그림이 아니다.
여러 인물의 개성을 녹여낸 초상화를 가장 효율적으로 합쳐 놓은 작품이다.
렘브란트 판 레인은 이 작품으로.
기나긴 미술사에서도 손꼽히는 화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 걸작을 기점으로 렘브란트의 인생은 망가지기 시작했단다.”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렘브란트란 개인이 몰락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그림은 민병대원 18명이 함께 의뢰했단다. 아주 멋지게 그려달라고 했지.”
<야경>의 주인공들은 흔히 말하는 ‘있는 집 자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라를 지킨다는 명예 때문에 입대했지만, 훈련 상태는 엉망이라 <야경>에 드러난 것처럼 군인답지 않은 실수를 연발하기도 했다.
저 풍자적인 요소 또한 렘브란트의 대단한 점이고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정석대로 모두 정면을 보게 그렸다면 불만은 적었겠지. 바라던 대로 아주 근사하게 그렸다면 더 좋았을 테고. 하지만 그러지 않았고, 의뢰인들은 자신들이 실수하는 모습을 표현한 렘브란트에게 불만을 가졌단다.”
렘브란트의 예술가적 기질은 높이 평가하나, 의뢰한 민병대 입장도 이해한다.
같은 돈을 내고 저 뒤에 어둡게 그려진 사람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또한 실수로 총을 쏘는 남자는 얼굴이 화끈거렸을 것이다.
“이 그림 이후로 렘브란트에게 그림을 의뢰하는 사람이 없어졌단다. 단순했던 풍조에서 벗어나 자신의 관념을 부여하기 시작한 그의 그림이 당시엔 인정받지 못했던 거지.”
나는 실로 렘브란트를 존경하고 그와 같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수도 없이 연구했으나.
그와 비슷한 삶을 겪고 난 뒤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나와 그가 경제적인 문제를 겪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고 그렇게 번 돈으로 바라던 그림을 그렸다면 어쩌면 좀 더 오래, 더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계와 예술은 다르다.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대중이 좋아해 준다면 이상적이지만, 그것은 일부 축복받은 이의 전유물이다.
만약 렘브란트가 자화상 등으로 자신의 화풍을 확립해 나가면서, <야경>과 같은 의뢰 작품은 후원자의 요구에 맞춰주었다면 어떠했을까.
그는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
“…….”
죽은 뒤에 추앙받는 것은 위로일 뿐.
반 고흐 미술관에 머물면서 실로 큰 위안과 용기를 얻었지만 그만큼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삶도 그림도 포기해선 안 된다고.
그림을 그려야만 살아갈 의미가 있고 한편으로는 살아야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예전 같았으면 렘브란트가 의뢰인의 요구를 들어줬다면 <야경>과 같은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했겠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극한에 이르러서야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어느 한쪽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다시 한번 얻은 새로운 삶 속에서 내가 추구할 길은 하나.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고, 대중이 좋아할 것을 그리는 것.
이 둘을 함께하여 오래도록 건강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내가 진정 바라는 길이다.
* * *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은 정말 눈이 즐겁고 마음이 풍족해지며 등줄기가 짜릿한 작품으로 가득했다.
할아버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반나절 동안 2층조차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야경> 앞에서만 세 시간을 서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굶주린 배가 요동쳐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흠. 시간이 되었는데.”
할아버지가 손목시계를 툭툭 두드리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구 기다리세요?”
“음. 저번에 인터뷰 한 기자 있지 않으냐. 김지우라고.”
서울 미술관에서 만났던 부산스러운 기자다.
“기억나요.”
“인터뷰도 할 겸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고 해서 만나자고 했지.”
“여기까지 온대요?”
이인호도 그렇고 김지우도 그렇고 기자란 직업은 참으로 대단한 열정이 있어야 할 듯싶다.
“앞으로 네게 큰 힘이 되어줄 분이니 가까이 지내. 그렇다고 너무 많은 건 가르쳐주지 말고.”
“왜요?”
“기자와 적당히 친분을 나누면 그쪽에도 내게도 도움이 되지만, 사람은 너무 쉽게 믿는 법이 아니란다. 숨겨야 할 일도 쉽게 보도해 버리거나 나중에 약점으로 잡을 수도 있거든.”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슬픔은 지금도 여전한 듯하다.
“안학녕하힉세요!”
뒤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리니 김지우가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웃었다.
“학하죄송해헣.”
“아이고. 숨부터 골라요. 얼마 안 기다렸으니.”
“네헵. 훈이 안흐헙녕?”
안쓰러운 마음에 가지고 있던 물을 주자 호쾌하게 들이켰다.
“어.”
“켁케! 켁!”
할아버지와 함께 사레들린 김지우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좀 진정했으면 싶은데 그럴 수 없는 모양이다.
“히읍. 앙꾸억리 마르소랑 진짜 해? 진짜, 진짜?”
양팔을 잡고 다급히 묻는다.
숨넘어가겠다.
* * *
1)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 앞 조형물 ‘I amsterdam’은 2018년 12월 광장의 혼잡화와 지나친 개인주의의 상징이 된다는 이유로 철거되었다.
텔레그라피 트레블의 한 전문가는 “국립 박물관 안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보다 박물관 밖 조형물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렸다. 그 조형물은 무분별한 대중관광의 상징이었다.”라고 평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 이전에 넘쳐나는 관광객 억제 정책이 가장 큰 이유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에 시민 및 관광객들은 그들의 추억을 남길 장소가 사라졌음에 아쉬움을 내비쳤다.
출처: Natashah Hitti, Amsterdam council removes "I amsterdam" sign after it becomes selfie spot, dezeen, 5 December 2018.
2)야경, 렘브란트 반 레인, 캔버스에 유채 물감, 1642
3)마스코트(Mascotte(프): 행운의 부적): 작은 마녀(mascot)에서 유래되었다. 1880년 프랑스 출신 작곡가 에드몽 오드랑의 오페레타 이후 널리 사용되었다.
출처: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