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굴왕-405화 (405/409)

외전 19화. 취중뒷담(악마가 내려왔다) 中

"주헌 씨, 이쪽!"

낯익은 여자가 주헌의 팔을 붙잡았다. 이번엔 수녀가 아니었다.

"가, 갈리나!"

일리야는 제 소꿉친구의 모습에 기겁했다. 갈리나는 금발의 미인이었다.

주헌은 그녀의 등장에 내심 놀란 듯 했다.

뭐 일리야만 하겠느냐마는.

"갈리나, 지금 뭐하는 거야! 거기서 안 비켜?"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개무시하고 주헌을 잡아끌었다.

"자, 빨리요!"

"야! 잠깐, 거기 안서? 갈리나!"

그렇게 갈리나는 주헌을 데리고 도망을 치고 말았다. 사제들은 그 광경에 뒷목을 잡았다.

"왜 하필! 저 아이가!"

"아무튼 이럴 때가 아닙니다."

"빨리 모든 문 봉쇄하고, 추적유물 발동해요!"

한편 그 무렵. 갈리나에게 끌려온 주헌은 숨을 헐떡이며 죽으려고 했다.

"너, 무슨 발이 그렇게 빨라! 인간의 속도가 아니잖아!"

그러자 사슴처럼 달려왔던 갈리나가 꺄르르 웃었다.

"그냥 주헌 씨가 느린 거야."

"웃기시네. 너도 유물을 쓴 거면서. 냄새가 풀풀 나거든?"

"!"

갈리나는 잠시 당황한 듯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느끼지 못할 유물의 기운까지 느끼다니.

"와, 주헌 씨 확실히 상당히 재능이 있구나."

"재능보다는 그냥 될 때까지 지랄발악을 했던 거지."

"그런데 그런 실력을 가지고도 유물을 쓰면 안 된다니. 정말 판도라에서 허가 못 받았어?"

그 말에 주헌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머리엔 빌어먹을 판도라 직원의 말이 맴맴 맴돌고 있었다.

아마도 몇 달 전이었나.

'아, 유물 사용자 허가증을 발급 받고 싶다고요?'

'네. 여기 그 신청서...'

'서주헌 씨. 죄송하지만 서주헌 씨는 유물사용자 등록을 할 수 없어요. 고로 허가증도 드릴 수 없습니다.'

'네? 왜 등록을 못해요? 이렇게 A급도 쓸 수 있잖아요!'

'글쎄요, 아무튼 그 정도로는 안돼요.'

'장난해요? B급 유물만 써도 유물사용자로 등록돼서 발굴을 다닐 수 있을 텐데!'

'그러니까 안 된다고요. 어, 유물사용자가 너무 포화상태라.'

'허, 그럼 지금도 저기 뻔질나게 등록하는 B급 놈들은 뭔데?'

'아무튼 서주헌 씨는 SS급이라도 다루고 난 뒤에 오세요.'

빌어먹을 판도라 놈들.

'꼭 무덤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 당시의 주헌은 미술상 조폭들의 따까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불과 두 달 전 이야기.

자신의 형인 김 형사가 큰 부상을 입게 되면서 목숨 걸고 탈출한 것이다. 인신매매로 끌려갈 뻔한 걸 겨우 탈출했지.

'그보다 당장 수술비가 필요해.'

김 형사는 고분화 현상에서 일반시민들을 보호하다가 다리가 잘리고, 유물증후군 탓에 장기이식까지 받아야 했다.

하지만 국가에서는 별 다른 조치도 취해주지 않았다. 뭐, 윗선에는 의인이라며 표창장을 내리고 사진을 찍어갔지만 그딴 종이쪼가리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기껏 들어온 성금도 중간에서 먹튀해 갔고.'

그러나 돈을 받았다는 소식에 아주 사돈의 팔촌까지 찾아와서 신나게 괴롭히지를 않나.

어쨌든 여러 가지로 방법을 다 찾았지만 실패. 결국 주헌이 택한 게 바로 유물 밀수다.

하지만.

'꼬마야, 니가 감히 우리 허락도 없이 우리 구역을 휘젓고 다녔냐?'

'!'

기껏 긁어모은 모든 유물들은 대형발굴단들에게 빼앗기기 일쑤. 운 좋게 도망쳐도 엿 같은 판도라에게 걸렸다.

'젠장, 이대론 안 돼. 상급 유물이라도 얻어서 무덤에서 직접 유물을 발굴해야해.'

덕분에 주헌은 발굴단에 들어가고자 했지만...

'젠장, 이 자식이 유물을 훔쳐갔어!'

'아니요! 억울합니다. 전 훔치지 않았어요!'

'그럼 니 가방에 든 이건 뭔데!'

'씨이?!'

또냐!

아니 이놈의 유물 놈의 새끼들이 일부러 그러는 건지, 툭하면 자신의 가방 속에서 쿨쿨 자고 있었던 것이다.

'이씨, 이놈의 똥 같은 새끼들! 나한테 무슨 원한을 져서!'

그럴 때 마다 유물들은 깡충거리며 뭐라뭐라 했다.

[#$*#&*!]

니놈 가방이 자기에 딱 좋아!]

[#$*$#&*!]

키야 니놈, 꽤 쓸 만하구나! 어서 우릴 모셔라! 모셔라!

물론 이땐 마몬이 없어서 뭐라 지껄이는 건지는 하나도 몰랐지만.

아무튼 그러다보니 도둑놈이라고 블랙리스트로 찍혀 발굴단엔 입단조차 할 수 없게 되었고.

"뭐 어째, 혼자서라도 상급 무덤을 발굴해야지."

그 말에 갈리나가 웃었다.

"그래서 바티칸에 온 거야? SS급 유물을 얻으러?"

주헌은 입을 삐죽거렸다.

그랬다.

그가 바티칸에 온 이유는 바로 이곳에 있다는 SS급 유물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보통 그 정도 되는 유물은 주인이 있기 마련인데, 이곳의 유물은 주인도 없이 버젓이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가지면 나도 왕급의 반열에 설 수도 있어.'

힘을 가지게 될 것이었다. 당당히 유물사용자로 등록할 수 있었다.

판도라 새끼들도 더 이상 유물사용자로 등록 안 해준다는 둥, 그딴 개소리를 지껄이지 않겠지.

"아무튼 그걸 얻기 전까진 난 바티칸에서 나갈 생각이 없다고."

그렇게 주헌이 움직이려 할 때였다.

"허, 네까짓 게 그걸 다룰 수 있을 거라 생각해?"

"!"

주헌은 누군가에게 걷어차였다.

* * *

"큭!"

주헌을 누르듯 짓밟은 건 다름 아닌 일리야였다.

"딱 걸렸어, 이 도둑놈."

"!"

일리야는 포승줄을 꺼내 주헌을 묶기 시작했다.

"이 도둑놈 새끼, 넌 당장 경찰서행..."

"꺄악! 일리야! 지금 감히 우리 주헌 씨를 밟은 거야? 빨리 그 더러운 발 안 치워?"

"?!"

갈리나가 씩씩 활르 내며 일리야를 걷어차자 일리야는 황당해했다.

"갈리나! 너 지금 누구 편이야!"

"뭘 물어! 당연히 주헌 씨 편이지!"

"뭐, 뭐라고?!"

일리야는 잠시 멘붕이 왔지만 곧 눈을 부릅떴다.

"아 됐어! 이 자식은 오늘 판도라에 넘겨버릴 거니까. 다시는 얼굴도 못 볼..."

"누가 누굴 넘긴다고?"

"크윽!"

일리야는 주헌에게 걷어차였다.

'!'

주헌은 어느 사이 밧줄을 풀어낸 채 일리야를 비웃고 있었다.

"내가 그런 거에 한두 번 붙잡혀봤던 줄 알아? 이 등신아. 아 배고파죽겠네."

"...!"

주헌은 짜증을 내면서 일리야를 보았다.

"아무튼 지금 나 빈털터리야. 있는 돈 다 털어서 겨우 비행기표만 산 거라 잘 곳도 없고. 그러니까 부탁한다."

"뭘 부탁해?"

"바보야? 오늘부터 니네 집에서 재워달란 소리잖아."

이게 돌았나.

"싫으면 말고. 갈리나 집에서 자면 되니까. 슬슬 노숙하기도 춥단 말이지."

이 뻔뻔한 놈이 뭐가 어쩌고 저째?

"어이가 없어서. 그래 봐야 소용없거든? 갈리나가 얼마나 조심성이 많은데 너 같은 놈을 집에 들일 리가..."

"세상에, 주헌 씨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야! 내 침대도 쓸래? 난 바닥에서 자도 되니까!"

"?!"

일리야의 표정이 볼만했다. 동시에 주헌은 갈리나의 어깨에 슬쩍 손을 얹었다.

"아냐, 아냐. 여자를 바닥에서 재울 순 없지. 우리 같이 자자. 히히."

"#$*$*!"

멘붕에 빠진 일리야는 바로 그를 붙잡았다.

"알았어, 내 방 빌려줄 테니까 갈리나 집은 가지마! 절대로!"

"오케이 계약 성립."

그러나 일리야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래봐야 넌 우리집에 갇히는 거지. 집에 있는 동안 판도라 사람을 불러올 테니까.'

하지만 그럴 때였다.

"판도라 놈들 불러도 상관은 없는데 갈리나도 같이 잡혀갈지도 모를걸?"

"?!"

"난 갈리나가 도와줬다고 말할 거거든."

이 씹새끼!

"그러니까 얌전히 잘 모셔. 밥은 대충 한식이면 되고, 침대사이즈는 적당히 퀸 사이즈면 되고."

주여, 정녕 이 새끼를 데려가실 의향은 없으신 겁니까.

* * *

서주헌.

몇 주일 전, 느닷없이 바티칸에 나타난 동양인.

일리야는 이를 뿌득 갈면서 쌀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있었다.

오늘의 메뉴는 바로 김치찌개라는 것이었다. 뭐, 김치찌개라는 게 뭔 요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보르쉬(비트로 만든 빨간 야채국, 러시아 전통요리) 같은 거 아닌가?'

그럴 때였다.

"지금 이걸 김치찌개라고 만든 거냐? 다시 만들어, 바보야."

일리야는 파르르 손을 떨었다. 이걸 진짜!

"제대로 안 만들면 갈리나 집에 가 버릴 거니까."

"젠장!"

그는 주헌이 얄미운지, 주헌의 밥그릇에 퍽퍽퍽퍽 굵은 소금을 쳐댔다.

동시에 주헌이 낄낄 웃으며 물었다.

"너 갈리나 좋아하지?"

"좋아하긴 누가!"

"그럼 바티칸 사제가 된 것도 그 아이 때문이야?"

"!"

일리야는 눈살을 찌푸렸다.

주헌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갈리나는 악마에 씌어있다.'

갈리는 일리야의 오랜 소꿉친구이자 마음에 품은 상대. 하지만 몇 년 전, 갈리나는 소위 악마라고 불리는 것에 씌어버렸다.

이름난 염매나 엑소시스트까지 동원했지만 전부 실패.

'유일하게 바티칸에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하지만 그 방법을 아무에게나 알려주진 않았다. 그래서 일리야는 결심했을 뿐이다.

'내가 직접 들어가서 알아내겠어.'

설령 사제가 되어 평생 금욕하며 결혼을 못하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갈리나만 행복할 수 있다면.

다소 무모할 수도 있었지만, 일리야에게는 그럴 만한 재능이 있었다.

뭐, 갈리나는 바티칸의 사제가 된다는 걸 탐탁지 않아했지만.

'일리야. 나 때문에 신부님이 되겠다면 그만 둬.'

그렇게 붙잡는 갈리나를 향해 일리야는 비웃었다.

'돌았냐? 내가 왜 너 같은 것 때문에 금욕생활을 감수해야 하는데?'

'뭐? 하지만...'

'꺼져. 공주병도 그 정도면 재수없어. 원래도 삼촌 때문에 신학공부를 하고 있었고. 신앙심도 있었어. 그리고 의외로 신부님 목사님이 돈이 된다니까. 권력도 있다고.'

'...천벌 받는다 너.'

아무튼 신학공부를 마친 일리야는 견습부터 시작해 주교의 눈에 띄어 구마사제까지 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갈리나를 고쳐줄 수 있어.'

방법까지 알았으니 완벽했다. 그런데 왜 서주헌 이놈이...!

"까까 사줄게, 그러니까 집에 돌아가면 안 되냐?"

"뭐래. 너희가 가진 그 SS급 유물을 얻을 때까진 이 나라 못 떠나."

"하..."

일리야는 피곤하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그 SS급 유물은 하느님의 권세 유물이야. 어차피 넌 못 다룬다니까."

"뭐?"

"너 고작해야 B급 유물밖에 못 쓰지 않아? 척 봐도 그런데."

그러자 주헌은 화를 냈다.

"야, 무시하지 마! 내가 지금은 없어서 그렇지, SS급도 충분히 다룰 수 있다고! 다뤄본 적도 있어!"

"어이쿠, 그러셔? 그런데 그렇게 왕급 소질이 있으신 분이 무덤에도 못 들어가시고 좀도둑질이나 하고 계셔요?"

"새끼가 안 믿네."

"흥, 네가 진짜 SS급을 다룰 수 있다면 판도라에서 진작 모셔갔겠지. 그리고."

"그리고?"

"그 SS급 유물은 내거야."

"!"

"갈리나를 치료할 수 있는 유물이니까. 조금 더 바티칸에서 기반을 다지면 그 유물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거든."

"에이, 그 전에 내가 가져간다니까."

"그러니까 넌 절대 못 다룬다니까."

"좋아, 그럼 내기해."

"뭐?"

주헌은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그 SS급 유물 쓸 수 있으면 어떻게 할래?"

"주님께 맹세코 네 따까리가 된다."

일리야는 웃었다.

* * *

"그래. 새끼야. 넌 이제 내 따까리야."

주헌은 낄낄거리며 박물관에 숨어들어가고 있었다.

불이 다 꺼진 바티칸의 박물관은 몹시 어두웠다. 길을 잃기 딱 좋았지만 사실 상관없었다.

여차하면 갈리나가 준 유물을 쓰면 되니까.

'주헌 씨. 이거면 그 SS급 유물을 얻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이탈리아의 길거리에서 객사할 뻔한 자신을 구해준 갈리나. 그녀는 주헌이 그 신급 유물을 가져가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뭐, 갈리나의 도움이 아니더라도 이정도 쯤이야.'

그리고 주헌이 SS급 유물에 다가갔을 때였다.

"꼼짝 마라!"

"!"

갑자기 박물관의 불이 켜지면서 주헌의 주변으로 사제들과 경비들이 몰려왔다.

그 모습에 주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일리야가 냄새를 맡고 동료들을 데리고 왔다.

"오늘로 너도 끝이야. 서주헌."

그러나 주헌은 비웃으면서 바로 유물을 썼다.

번쩍!

그리고 섬광탄이 터져나가자마자 주헌은 바로 유리관을 부셨다.

쨍그랑!

유리관에 있던 SS급 유물은 성모마리아 상 모양의 유물.

"미안하지만 이걸 가져가는 건 나야!"

주헌은 바로 계약을 위해 유물을 발동시켰다.

"저, 저놈이!"

그런데 그럴 때였다.

"!"

잘 계약할 것 같았던 주헌의 표정이 돌연 일그러졌다.

가짜라서가 아니었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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