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40화 (1,107/1,205)
  • 1140화

    내가 신랄하게 쏘아붙이자, 라파엘은 할 말이 없어졌는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젠장. 이래서는 역효과만 나겠군.

    아무리 이쪽이 맞는 말을 하더라도, 여론이라는 건 때때로 지는 쪽을 동정하는 쪽으로 움직일 때가 있다.

    그리고 아무리 짜증 난다지만 라파엘은 은사모 최고의 권력자다. 지금부터 전력으로 바프라를 상대해야 하는데 내부에까지 적을 만들 필요는 없지.

    "뭐, 하지만 바프라를 믿고 싶은 마음은 알겠어. 그래도 평생을 모셔왔던 주군인데, 그렇게 쉽게 너희를 내칠 거라고는 믿기 힘들겠지."

    "그, 그렇습니다!"

    내가 우선 다독이듯 그렇게 말해주자, 라파엘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어떻게 이런 놈이 최고 권력자가 된 거지? 차라리 케이로스가 훨씬 더 낫지 않아?

    …그러고 보니 바프라도 케이로스의 이름만 꺼냈었지. 라파엘이 은사모 회원이라는 것도 모를 정도로 둔감한 놈도 아닌데 말이야. 그렇다는 건…그런가. 이 녀석은 그냥 허수아비인가. 이인자 위치에 조종하기 쉬운 놈을 하나 앉혀두면, 바프라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질 테니까.

    "하지만 개국공신이신 사무엘 님도 조금 전에…."

    이것 봐. 그래도 케이로스는 이렇게 날카로운 구석이라도 있잖아. 대화 주제가 사랑이나 섹스 같은 게 되면 사람이 조금 바보가 돼서 그렇지.

    "그래. 거기에 놈은 아직 은사모가 놈을 칠 계획까지 하고 있었다는 건 모르고 있었어. 그냥 ‘섹스 합법화를 위해 움직이는 조직’ 수준으로 알고 있더군. 그래서 이렇게 우리한테 손을 내민 거야. 하지만 만약 놈이 우리가 뒤에서 꾸몄던 짓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낮에 그 사람들도 반역을 꾀했다는 이유로 처분당한 거잖아?"

    케이로스의 의견에 힘입어서, 나는 조금 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선동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웅성웅성 자기들끼리 걱정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좋아. 나와 라파엘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사람들이 서서히 이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했어.

    "하지만 바프라 님이 보내주신 계획은…!"

    "그래. 은사모한테 천천히 권력을 옮겨준다고 했지. 하지만 바꿔 말하면, 권력이 약한 척만 할 뿐, 놈이 끝까지 왕좌를 지키게 되는 계획이야. 놈은 왕좌에서 일어날 생각이 전혀 없어. 당연히, 자신의 왕좌를 위협하는 놈들은…말 안 해도 알겠지?"

    꿀꺽. 하고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제일 최악인 건, 시내에 퍼지고 있는 소문이야. 여기에 있는 대부분도 그 소문을 듣고 은사모에 합류하게 된 거잖아? 한 번 퍼지기 시작한 소문은 막을 수 없어. 언젠가는 바프라의 귀에도 소문이 흘러 들어갈 거고, 그렇게 되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귀에 소문이 닿는 걸 막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겠지."

    "그, 그럼…!"

    역시나 라파엘이 소문을 통제하고 있던 주범이었는지, 라파엘은 사시나무 떨 듯이 바들바들 떨면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래. 바프라는 합리적인 추론을 내리겠지. 내게 소문이 닿는 걸 막은 그놈이 소문을 퍼트린 주범이 아닐까? 그리고 놈들은 어떤 목적을 위해 소문을 퍼트린 걸까? 단순히 지하에서 섹스 파티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 정도라면 우리 목적을 아는 바프라도 웃어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소문에는 지난번 몬스터의 대공습도 바프라의 탓이 되어 있잖아? 바프라가 그 소문의 의도를 어떻게 생각할까?"

    정말, 라파엘이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줘서 다행이야.

    만약 라파엘이 성내의 소문을 통제하지만 않았다면, 놈들에게도 도망갈 구멍은 있었을 거다. 소문은 내가 혼자서 멋대로 퍼트린 거라고 뒤집어씌우면 그만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라파엘은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인지 스스로 발을 깊게 담는 행동을 해버렸고, 더는 도망갈 구석이 없었다.

    물론 라파엘 하나의 발만 묶어놨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으니, 다른 놈들도 가볍게 겁을 줘야겠지.

    "그리고 바프라는 수도에 있는 은사모 회원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눈치였어. 하지만 우리의 규모는 어제와 오늘이 다를 정도로 급성장했으니, 분명 여기에 있는 이들 중에는 바프라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놈들도 있을 거야. 그러면 바프라는 생각하겠지. 왜 갑자기 이렇게 은사모 회원의 규모가 커졌을까? 그것도 딱 소문이 퍼진 것과 동일한 시점에 말이야. 혹시 여기 모인 놈들은 전원 그 소문을 믿고 내 목을…같은 생각을 해도 이상하지 않겠지. 아니 그 의심 많은 놈이라면 분명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리고 물론, 그렇게 결론을 내린 바프라의 귀에는 그 어떤 말도 변명으로만 들리겠지. 여기에 있는 모두는, 이제 도망갈 구석이 없어."

    그렇게 라파엘 뿐만 아니라 은사모에 가담한 모두에게서 도망갈 구멍을 막아 버린 다음 장내를 둘러보니, 역시나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다들 죽을상이 되어 있었다.

    음. 역시 나야. 유치원 시절 선생님한테 "구원이 넌 커서 사이비 교주 같은 거 하면 딱 맞겠다."라는 소리를 들은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지? 바프라가 진심으로 우리와 협력하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함정을 파려고 하는 건지는 중요하지 않아. 어느 쪽이든 결국 바프라가 은사모를 숙청하려고 하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

    완전히 넘어온 분위기에 그렇게 쐐기까지 박아 버리자,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내 말을 부정하지 못하고 조용히 침묵만 유지했다.

    이런 너무 겁줬나. 바프라와 협력하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겁먹은 나머지 중요할 때 행동을 못 하게 되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다.

    아무래도 조금은 풀어줄 필요가 있을 것 같군.

    "뭐, 그렇게까지 겁먹을 필요는 없어. 지금 여기에는 바프라 귀족의 7할이 모여 있잖아? 아무리 바프라라고 할지라도, 이 정도 인원을 한 번에 숙청할 엄두는 안 나겠지."

    "그, 그렇…겠지요?"

    아니. 너 아까는 오랫동안 함께한 자신이 바프라를 더 잘 아느니 어쩌니 지껄였잖아. 이제 와서 나한테 그런 걸 물어보면 어쩌자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우선 며칠은 놈의 말에 따르는 척하면서 상황을 지켜보자고. 혹시 알아? 바프라도 우리 규모를 보고 겁먹어서 그대로 자리 보존만 하기로 마음을 굳힐지."

    지금까지 내가 한 말과는 상반되는 말이지만, 나는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다른 이들을 안심시킬 목적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조금 전에 만나본 바프라 그 새끼는 절대 이런 일을 그냥 넘어갈 성격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지금의 이 인원이라면, 아무리 바프라라도!"

    "그래. 그리고 애초에 가진 패도 우리가 훨씬 더 많아. 바프라가 겁먹고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면 그건 그것대로 편해서 좋고, 그게 아니더라도…."

    여기저기서 그런 희망찬 목소리가 들려오는 걸 적당히 대답해주면서, 나는 앞으로의 행동 지침을 모두에게 말해 줬다.

    바프라 놈. 지금 실컷 좋아하고 있으라지.

    "구원!"

    길고 긴 회의를 마치고 다시 디에른 가문으로 돌아오자, 우리 애들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마중 나와줬다.

    "다 들었어."

    "응? 다? 아, 요리스가 미리 사람이라도 보냈어?"

    요리스 자신은 나와 함께 케이로스의 저택에서 회의한 후 같이 돌아왔지만, 전령을 먼저 보내서 대략적인 분위기 정도는 전해 줬을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라는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아니. 디아나한테."

    "디아나?"

    여기서 우리 대마법사님 이름이 갑자기 왜 나와?

    "디아나한테는 반지로 들려줬다면서? 그래서 와서 얘기해 줬어. 구원한테 전할 말도 있다면서."

    그러고 보니, 그때 반지를 발동시킨 다음 안 꺼놓고 있었지. 디아나는 전부 듣고 있었다는 얘기인가.

    아니. 그보다 왔다니…설마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아니. 우리 대마법사님이라면 그냥 자기 힘으로 텔레포트 해서 올 수도 있었으려나? 며칠 전에 하렘 플레이로 레벨도 엄청 올랐고.

    뭐,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미안해…나 때문에…."

    아까부터 레이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

    아마 내가 마지막에 울분을 곱씹으면서도 바프라를 죽이지 못한 이유를 들은 거겠지.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

    "하지만 나만 없었으면…!"

    "바프라가 섹스에 미친놈이라는 것도 몰랐을 테니,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겠지. 내 곁에 예쁜 여자도 하나 줄었을 테고."

    "너어…."

    진지하게 두둔해 준 뒤에 농담 반 진담 반인 말까지 덧붙이자, 레이가 울먹이는 눈동자로 날 쳐다봤다.

    아니. 평소처럼 부끄러워하라고 덧붙인 말이었는데, 울려고 하면 어떡하냐.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결과적으로 그러는 편이 더 나았어."

    정말이다. 그냥 레이를 감싸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때는 머리에 피가 몰려서 생각하지 못했지만, 돌아오면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그때는 놈을 죽이지 않는 게 정답이었다.

    만약 내가 놈을 죽이고 나서 이교도라서 죽였다는 명분을 내세웠다면, 그래. 바프라를 처리하는 것까지는 깔끔했겠지. 하지만 그다음에는?

    내 최종 목표는 바프라를 장악하는 게 아니다. 여기를 서서히 섹스로 타락시켜서, 결국에는 전원 여신을 따르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수장이 이교도라는 이유로 처형당한 미래에서, 과연 사람들이 타락하려고 할까? 아무리 섹스가 기분 좋아도, 결국 사람은 제일 먼저 자기 목숨부터 챙기는 법이다. 내 계획은 끝내 실패로 끝나고 말았겠지.

    "그러니까 이교도 얘기는 웬만하면 안 나오게 하는 게 맞는 거였어."

    그 이후에 은사모의 여론도 다시 바프라를 불신하는 쪽으로 바꿔놨으니, 결과적으로는 전부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고 말이야.

    즉, 바프라는 의도치 않게 내 계획을 도와준 셈이 된 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감사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말이야. 나중에 지옥에서 땅을 치고 후회하라지.

    "그러니까 괜히 네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알겠지?"

    레이의 등을 토닥이면서 그렇게 말해주자, 레이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좋아. 그래서, 디아나가 해준 내게 전할 말이라는 건 대체 뭐야?"

    그 머리 좋은 디아나가 나와 바프라의 얘기를 전부 듣고서 찾아온 거다. 분명 뭔가 획기적인 계획이라도 말해주러 온 거겠지?

    디아나가 해준 말을 듣고, 또 그 이후에도 이것저것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깊은 밤이 되어 있었다.

    최근 생각하는 건데, 나 7계층에 들어선 이후로 너무 바쁘게 사는 거 아니야?

    아니. 물론 이 세계로 건너온 이후로는 하루하루가 사건의 연속이었지만 말이야. 그래도 7계층에 오기 전까지는 우리 애들이랑 꽁냥꽁냥할 시간도 충분히 있었잖아? 최근에는 그럴 시간 자체가 거의 없다 보니, 사람이 말라가는 기분이야.

    바로 며칠 전에 하렘 플레이를 즐긴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거랑 이거랑은 다른 문제란 말이지.

    물론 하렘 플레이 기분 좋았지. 엄청 좋았어. 하지만 섹스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있다고 할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부터 잠시 꽁냥꽁냥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내일도 아마 바쁘게 움직여야 하겠지만, 상관없다. 그냥 잠을 좀 덜 자면 되지. 때로는 잠보다 중요한 게 있는 법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바보 아니야?’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날 보는 사라였지만, 난 안다. 얘도 실은 이런 걸 엄청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럼 제일 먼저, 내가 실비아를 품에 안고 실비아테라피를 즐길 때마다 언제나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사라부터."

    "내, 내가 언제 그런 눈으로…!"

    사라야.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너 찔렸구나?

    부정하는 사라의 몸을 끌어안아서 내 다리 사이에 앉히자, 사라 특유의 향기가 코를 간질거렸다.

    사라도 나와 마찬가지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힘쓰느라 땀깨나 흘렸을 텐데, 전혀 그런 냄새 같은 게 안 난단 말이지. 이것도 매력 스탯 보정 같은 건가?

    "잠깐! 나 아직 안 씻었어!"

    그래도 사라는 땀 흘린 몸으로 내 품에 안기는 게 싫은지 바둥바둥 댔지만, 나는 그 가는 허리를 꽉 끌어안고 놔주지 않았다.

    "뭐 어때. 지금 당장 하자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하면서 사라의 목덜미에 살짝 키스하고, 조금 올라가서 뺨에, 마지막으로 손으로 그 턱을 잡고 고개를 돌려서 입술에 키스하자, 사라의 몸에서 힘이 축 빠지며 완전히 내게 그 몸을 기대게 됐다.

    닫힌 입술 사이로 살짝 혀를 집어넣어 보자, 자연스럽게 입술이 벌어지며 내 혀를 받아주는 게 무척이나 귀여웠다.

    "으음…아음…쪽…잠까안…으응…!"

    하지만 자기도 혀를 쓸 생각은 못 하고, 대신 힐끔힐끔 옆쪽을 곁눈질하는 사라였다.

    실비아와 레이의, 특히 레이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건가. 그러고 보니 사라 얘 유독 레이 앞에서는 더 쿨하게 행동했지. 레이도 사라의 쿨한 모습을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봤었고.

    생각해 보니 하렘 플레이에서도 제일 클한 척하려고 했던 게 사라였다. 그때는 나도 여러모로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레이의 눈을 신경 써서 그런다는 생각은 못 했지만.

    아무튼 그렇게까지 레이의 눈을 신경 쓰다니. 혹시 사라 얘…레이랑 둘이 다니면서 뭔가 허세라도 부린 거 아니야?

    ‘구원의 장난? 쿨하게 대응하세요. 당신이 일일이 과민반응하니까 구원도 재미 들려서 더 그러는 거예요.’ 라든가. 사라라면 충분히 할 만한 말이다.

    하지만.

    "으으음!?"

    그래봤자 어차피 하렘 플레이로 그 허세는 산산조각이 났을 텐데, 뭘 아직도 이렇게 신경 쓰고 있는지.

    레이 눈동자에 있는 사도 인장 봤잖아? 쟤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있었다니까. 사라 네가 나한테 어떻게 무너져내리는지 말이야.

    레이아와 마틸다랑 할 때 내 손만으로 몇 번이나 느껴 버린 모습은 물론, 그 이후에도….

    ***

    "으으응…하읏…하아…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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