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55화 (1,039/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55화 >

    "후하하핫! 능력 있는 남자를 좋아하게 된 자신을 원망해라!"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표정으로 날 노려보는 레이에게 상큼한 미소를 한 번 날려줬다.

    아니. 이렇게 되고 나니, 도중부터 콘돔을 안 하고 섹스한 것도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얘가 지금은 내 여자가 생각보다 훨씬 더 많다는 사실에 어그로가 끌려서 이렇지, 깊게 생각하다 보면 그런 점도 분명 눈치챌 거다.

    그러니 이렇게 어그로라도 끌면서 더 의심을 못 하게 해야지.

    젠장. 조금 전에 얘가 말대로 진짜 너무 만만하게 봤나? 아무리 상식이 없는 애라도 조심은 해야 했는데.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이와 같은 의심은 레이 얘밖에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실비아가 날 좋아한다는 것도 얘밖에 모르고, 내 섹스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기분 좋다는 것도 얘밖에 모르니까.

    다른 사람이 우릴 의심하는 일은 아마 없을 거다.

    "아무튼 그럼 같이 몸이라도 씻으러 갈까?"

    "같이? 뭐하러? 너 혼자서는 씻지도 못해?"

    이 말이 야릇한 뜻으로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한 저 순수한 표정을 봐. 저러니까 얘랑 있으면 긴장이 느슨해져서 실수가 나오는 거 아니야.

    보통 남녀가 같이 씻자고 하면야 한 생각부터 하게 되는 게 정상 아니냐?

    "무슨 그런 섭한 소리를. 이것도 애인끼리만 할 수 있는 스킨십의 일종이야."

    "애······!"

    "그럼 가실까요."

    굳이 레이가 면역 없는 말을 써서 스턴까지 걸리게 한 다음에, 나는 그 몸을 안아 들고 그대로 욕실로 직행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어젯밤에 못다 한 일을 계속한 건 아니다.

    그냥 섹스까지 가지 않을 수준으로 애인끼리 흔히 할 수 있는 알콩달콩하고 건전한 스킨십만 즐기고 나왔다.

    솔직히 말해서 그 몸을 보고 만지다 보니 또 성욕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지만, 안 그래도 여신님의 사자라는 의심을 사고 있는데 여기서 또 의심받을 행동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갈까? 배고프지?"

    "······응."

    이 모습만 보면 어차피 의심할 정신머리 같은 건 없어 보이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긴장을 풀고 있다가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거니까. 조심해야지.

    안 그래도 어제 바프라가 여신님의 힘에 손을 댔다는 이유만으로 그 아저씨들이 그렇게까지 분노하는 모습을 보고 왔는데, 지금 이 타이밍에 내가 여신님의 사자라는 걸 들켰다가는······생각하기도 싫다.

    뭐, 그래도 제일 먼저 들킬 뻔한 상대가 레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일이 너무 잘 풀리다 보니 긴장도 같이 풀리려고 한 타이밍이었는데, 마침 알맞게 긴장의 끈을 조일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자.

    "형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레이의 허리를 감싸 안고 방문을 여니, 그곳에는 날 기다리는 한 사람이 있었다.

    "으악 씨······깜짝이야! 신. 너 아침부터 여기서 뭐하냐?"

    "네. 형님.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어제 당장 하고 싶었지만, 어제는 그······방해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아우씨. 한창 경계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놈 얼굴이 튀어나와서 깜짝 놀랐네.

    그것도 하필 제일 경계해야 할 놈이라 나도 모르게 쫄았잖아.

    "감사?"

    "예. 제 말을 전적으로 믿어주시고, 기회를 주신 것 말입니다."

    믿어줬다는 건 아마 자기 가문 얘기겠지. 여신님의 힘으로 미약을 만든 건 어디까지나 전쟁을 위함이었고, 바프라가 자기 성욕을 위해 쓰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는 얘기.

    하지만 기회를 줬다는 건 무슨······아, 그런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건가.

    "아니. 나도 그년의 힘에 대적하는 방법을 고안해낸 주술사 가문의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어. 그게 설마 너희 집 얘기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말이야."

    이 녀석은 지금, 내가 자기 가문을 살릴 기회를 줬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다. 자칫하면 바프라와 같이 여신의 힘을 악용한 혐의를 뒤집어쓸 수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바프라를 저 버리겠다. 우리 플리투스를 위해 싸우는 것도 각오하겠다. 같은 말을 했던 신이지만, 그래도 역시 자기 가문이 무너지는 꼴을 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얘네 가문이 무너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어제 그런 식으로 몰아갔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마틸다의 저주를 만들어낸 가문이니까 말이야. 그런 더러운 주술은 세상에서 사라져야 마땅하지 않겠어?

    뭐, 만약 그랬다가는 신 이 녀석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모를 일이니, 결국 어제 한 행동이 최선이었으려나.

    은사모의 아저씨들이 나 같이 수상한 놈을 믿어주는 것도, 결국에는 이 녀석과 파란의 힘이 있기 때문이고. 은사모를 철저하게 이용하기 위해서, 지금 이 녀석과 척을 질 수는 없는 일이야. 좋게좋게 생각하자.

    "그년을 상대하기 위해 전쟁신님의 힘을 받은 용사로서, 그런 훌륭한 가문이 이대로 사라지게 둘 수는 없지. 어때, 신. 설득할 수 있겠어?"

    하지만 마침 레이도 옆에서 듣고 있기도 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철저하게 이 대화를 이용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 디에른 가문은 그 특성상, 바프라의 완강한 정책을 특히나 적극 지지하는 가문 중 하나입니다."

    "여자를 천대하거나 섹스는 애 낳을 때 아니면 금지하는 것 같은?"

    "네. 절 보면 믿기 힘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잘 아네. 그런 가문에서 자란 놈이 어쩌다 사랑에 눈을 떠서 유리랑 손잡고 도망갈 생각까지 했냐.

    아니. 그렇게까지 궁금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어차피 결국 남의 연애사니까.

    "그러면 잘됐잖아. 적어도 진실이 공개되고 나서 바프라의 편을 들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 바프라를 치고 나서가 문제인가. 은사모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바뀐 정책에 들고일어날 가능성이 있겠군."

    "네······. 그러니 할 수 있다면 아예 처음부터 저희 은사모의 뜻에 동참하도록 설득하고 싶습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거 아니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결코 그년의 힘에 현혹된 것은 아니지만, 저희 가문 사람들은 그게······."

    야. 뜸 들이지 말고 확실히 말해.

    난 사내새끼가 그러고 있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

    "섹스에······다들 아닌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모두 섹스에 흥미가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걸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냐. 아무도 그 걸레년의 힘에 현혹됐다고 생각 안 해. 어제 은사모 아저씨들 하는 짓 못 봤어? 당장 나도 섹스는 좋아하는데 뭘."

    "네! 그렇습니다!"

    야. 내가 섹스 좋아한다는 얘기 듣고 그렇게 함박웃음 지으면서 기뻐하지 마라. 기분 나쁘다.

    "응? 하지만 너희 가문은 바프라의 정책을 적극 지지한다면서? 그런데 섹스에 흥미가 있어? 모순되지 않아?"

    "네. 바로 그겁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섹스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더욱 바프라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응? 그게 무슨 헛소리······아, 잠깐 기다려. 과연. 그런 건가.

    즉, 이런 말이다. 이 녀석네 가문은 옛날에는 여신님의 힘에 대적하는 가문이었지만, 여신님의 세력과 전쟁할 일이 없어진 지금, 그 위치는 묘해졌다.

    여신님에게 대적할 힘을 실전시킬 수는 없으니 끊임없이 여신님의 마나를 만지며 연구는 하고 있지만, 의미도 없이 여신님의 힘을 만지작거리며 노는 놈들이라고 생각하는 놈들이 생겨도 이상할 것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누구보다도 여신님의 힘에 타락······아니. 교화되기 쉬운 위치. 그리고 실제로도 그 힘을 만지면서 섹스에 관심이 생겨 버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자신들은 절대 그 힘에 물들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남들에게 더 당당해지기 위해, 진심을 숨기고 겉으로는 섹스 제한을 적극 지지하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얘기인가.

    "즉, 가문 사람들이 숨기고 있는 속내를 드러내게만 하면 이쪽으로 끌어들일 가능성은 있다는 얘기인가."

    뭔가 점점 얘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섹스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고 이 녀석이 아까 그렇게까지 함박웃음을 지은 이유.

    그리고 나와 쓰레온이 용사라는 얘기를 듣고 형님 형님 하면서 껌뻑 죽은 이유도.

    "역시 형님! 알아주시는 겁니까!"

    "뭐, 그렇지. 즉,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얘기잖아?"

    디에른 가문의 아킬레스건은 언제 여신님의 힘에 현혹될지 모른다는 세간의 시선이다.

    하지만 그걸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전쟁신님의 축복을 받은 용사다. 절대 여신의 유혹에 빠질 리 없는 용사.

    사실 용사라고 해서 여신님 쪽에 붙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는데 말이야. 그 옛날 쓰레온네 가문이 그랬고, 비교적 최근에는 사라네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여기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면, 아무 문제 없지.

    분위기를 보아하니 사라네 할머니도 여신님의 유혹에 빠졌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단순히 여자라서 전쟁보다 사랑을 택했다고 믿는 분위기니까 말이야.

    아무튼 그런 분위기다 보니, 용사가 직접 가서 말해주면 그 파급력은 엄청날 거다.

    섹스에 흥미가 있는 것이 여신을 따르는 일이 되지는 않는다. 그건 인간의 본능이다. 나 역시도 섹스는 좋아한다. 라고 말이야.

    그렇게 하면 분명 자기 가문 사람들도 숨겨왔던 본심을 밝히고 은사모의 뜻에 동참할 거다.

    신은 지금 그걸 기대하고 있는 거다.

    "도, 도와주시겠습니까?!"

    "아까도 말했잖아? 나도 용사로서 걸레년을 상대할 주술이 실전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다고."

    "혀, 형니임!"

    더러운 사내놈이랑 끌어안는 취미 없으니까 달라붙으려고 하지 마라.

    이놈 이거 갈수록 행동이 그렉이랑 비슷해져 가네. 이러다가 호칭만 성자님에서 형님으로 바뀐 그렉 2호가 되는 건 아니겠지?

    진짜 봐줘라. 남자 빠돌이는 그 호랑이 한 마리로 족해.

    "하지만 그전에 한가지 확실히 해둬야 할 게 있어."

    "무, 무엇을 말입니까?"

    "네 기대대로 일이 풀리려면, 정말로 너희 가문 사람들이 섹스에 관심이 있어야만 해. 그게 아니면 불에 뛰어드는 나방 꼴이 되어 버릴 뿐이야. 자신 있어?"

    "자, 자신 있습니다!"

    "도착하면 확인을 위해서 우선 너부터 네가 먼저 가서 설득하게 시킨다고 해도?"

    "······네, 넵! 그렇습니다!"

    야. 목소리가 떨리는데 진짜 괜찮겠냐?

    뭐, 좋아. 내 예상대로 일이 풀리게 된다면, 어느 쪽으로 굴러가도 내가 손해 볼 일은 없다는 계산이 나온다.

    "좋아. 그럼 은사모 아저씨들이랑 일이 끝나는 대로 우리도 준비해서 출발하도록 하자."

    "가, 감사합니다. 형님!"

    야. 우리가 무슨 조폭이냐? 형님 형님 하면서 90도로 인사하지 마라.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서, 신은 황급히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아마 유리한테 소식을 전하려는 거겠지.

    난 그럼 일단 식당에 가서, 아니. 그전에 우선 실비아부터 부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몸을 돌리니, 거기에는 날 빤히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가 있었다.

    "뭘 그렇게 보냐?"

    "너 진짜로 여시으읍!"

    레이가 하려는 말을 눈치챈 순간, 나는 황급히 그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말 남이 들을지도 모르는 곳에서 함부로 하지 마!"

    이러니까 실비아의 정체도 끝까지 안 밝히려고 했던 거라고! 얘는 애가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암살자 코스프레까지 하고 다녔던 주제에!

    "코, 코스프레라고 하지 마! 그건 진짜······!"

    "시끄러워! 그게 어딜 봐서 진짜 암살자 옷이야! 이 코스프레녀!"

    "······!"

    반박도 못 하고 입만 뻐금거리는 레이의 손목을 잡고, 나는 곧장 내 방으로 향했다.

    우선은 방음이 철저한 방 안으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한마디 하든가 해야지 안 되겠어.

    "실비아. 들어갈게."

    "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혹시 자고 있으면 깨워주려고 했지만, 우리 기사님은 이미 일어나서는 옷도 다 챙겨입고 침대에 정자세로 앉아 대기 중이었다.

    표정은······여전히 조금 미묘하네. 그러면 우선 기쁜 소식부터 전해 줄까.

    "응. 실비아도 잘 잤지? 아, 그리고 그 오해 말인데. 어제 다 풀었어. 네 비밀까지 전부."

    혹시 여신님의 사자라는 것까지 다 밝혔다는 오해를 하지 않도록, 나는 네 비밀이라는 말에 살짝 힘을 줘서 말했다.

    실비아라면 이렇게만 말해 줘도 무슨 뜻인지 충분히 이해하겠지?

    "네? 그, 그렇습니까아?"

    "응. 뭐, 그래 봤자 다른 놈들 앞에서는 여전히 남자인 척해야 하니까 딱히 달리지는 건 없겠지만. 마음은 조금 편해졌지?"

    "네, 네에······."

    실비아? 왜 아직도 표정이 그래?

    물론 실비아 성격에 드디어 해방됐다면서 방방 뛰며 기뻐할 거라는 기대는 안 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반응이 이상한데?

    "아아아아!"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옆에서 갑자기 레이가 소리를 질렀다.

    깜짝이야. 얘는 또 왜 이래!

    "그러고 보니! 이 호······이 여자가 여자면! 나랑 섹스 안 한 거잖아?!"

    ······야. 너 설마 그걸 이제 눈치챘냐? 아무리 내 섹스에 정신이 없었어도 그렇지. 진짜 얘는······.

    레이의 한참 늦은 뒷북에 어이가 없어질 뻔했던 나였지만, 레이는 그런 내 어이를 꽉 붙잡아두려는 듯 폭탄 발언을 던졌다.

    "너 어제 나랑 섹스했다면서!"

    뭐?! 실비아가 그런 말을 했다고?!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55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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