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08화 >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생으로 해버렸지만, 나는 안 쌌으니까 안심······그래도 안심은 안 되겠지만. 적어도 임신할 걱정은 안 해도 돼."

어쩌면 레이는 그냥 내 물건이 가라앉을 생각을 안 해서 쳐다보는 게 아니라, 다른 이유로 쳐다보고 있는 건지도 몰라.

너무 내 물건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레이의 모습을 그렇게 판단하고, 나는 일단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물건 쪽을 수건으로 대충 훔친 다음 황급히 바지를 올렸다.

"응······."

하지만 딱히 그런 걱정을 한 건 아니었는지, 레이는 어딘가 멍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꾸할 뿐이었다.

"레이?"

슬슬 뭔가 제대로 된 반응을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감히 내 처녀를 마음대로 가져간 거냐고 윽박질러도 되고, 아예 전처럼 단검을 들고 죽이려고 덤벼들어도 된다.

뭔가 반응을 보여야지 나도 그에 맞춰서 대응을 할 거 아니야.

그런 바람을 담아 레이의 이름을 불러보자, 레이가 겨우 시선을 들어 올리고 나와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던 거야?"

하지만 레이가 보인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것 중 무엇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뭐? 아니. 그야 그것 때문에 적진 한가운데에 돌격했던 거니까 충분히 궁금할 일이지만,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 그런 질문이 제일 먼저 나온다고?

남자한테 그렇게나······아니. 내가 너무 옛날 사라랑 겹쳐봐서 그렇게 생각했을 뿐, 사실 생각해 보면 얘는 남자라는 생물 전체에 혐오감을 나타낸 적은 없었다.

트라우마 반응을 보이는 건 언제나 바프라의 얘기가 나왔을 때뿐이고, 헬레나와 쓰레온의 성행위도 의외로 덤덤하게 봤으니까. 그뿐만이 아니라 그날 밤에는 아예 내 방으로 몰래 들어오기까지 해서······.

혹시 얘, 성행위 자체에는 별로 거부감이 없는 건가?

처녀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여기는 이런 세계인 만큼 여자의 처녀를 중요시하는 개념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날 밤에 몰래 들어와서 했던 일을 생각해보면 오히려······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내 입맛 좋을 대로 해석하는 건가.

"아, 사실 계속 그 배에 갇혀있었어. 몰래 잠입해서 이것저것 알아본 건 좋은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기저기 들쑤시다가 그만 빠져나갈 타이밍을 놓쳐서 말이야. 다시 밤이 될 때까지 배 안에서 죽은 듯이 숨어있었지."

아무튼 레이가 지금 이 상황을 따지려고 하지 않는데, 굳이 계속 변명하면서 신경 쓰이게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변명이라고 해도 미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했다는 거짓말밖에 할 말이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레이가 물어본 말에나 대답해주기로 했다.

물론, 이것 역시도 거짓말로 대답했지만.

"그럼 내가 배에 갔을 때도?"

"응? 뭐······그렇게 되나? 나는 숨어있느라 네가 온 지는 몰랐지만. 밤이 돼서 빠져나온 다음 저택에 돌아오니까 네가 없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내가 그렇게 걱정됐어?"

두 번째 질문에는 살짝 움찔할 뻔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사실 아까 마차에서 기절해있는 걸 봤을 때만 하더라도 이 녀석이 일어나기만 하면 자기 멋대로 행동한 걸 꾸중할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아무래도 꾸중은 못 하겠네.

뭐, 애초에 날 구하기 위해 돌격한 놈이니까, 꾸중이라고 해도 그렇게 심하게 꾸짖을 생각은 없었지만.

"너······."

레이는 내 농담에 반응하지 않고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자신의 바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마 끌어 올릴 생각이었겠지만, 미안하게도 그 바지 아래로 내린 게 아니었다.

"미안. 이거라도 입어. 아, 그 전에 우선 이걸로 닦고."

"응······."

인벤토리에서 황급히 바지와 수건을 꺼내서 건넸지만, 레이는 제대로 자기 하반신을 닦지 못했다.

아까 복상사하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극심한 절정을 느껴버렸으니까 말이야. 아무래도 하반신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닦아줄까?"

"응······."

보다 못한 내가 그렇게 말하자, 레이는 고분고분하게 수건을 내게 건넸다.

얘 아까부터 뭔가 반응이······그렇게 제멋대로던 애가 이러니까 진짜 괜히 더 불편하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섹스에 대해 다시 언급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수건을 받아들고 한 손으로 레이의 허리를 잡아 들어 올린 후 나머지 손으로 그 하반신을 닦아줬다.

"응······흣······으읏······."

참자. 참자. 이건 어쩔 수 없이 내는 소리야. 내 매력이 너무 높으니까. 애무할 생각이 아니어도 이런 데에 손을 가져다 대면 자연스럽게 소리가 흘러나오는 거야. 참자. 참······.

"······야."

"왜······?"

아니. 아무리 내 매력이 높아도 그렇지, 닦아도 닦아도 계속 흘러나오면 소용이 없잖아.

안 그래도 넌 속옷도 안 입고 다니니까 이대로 바지를 입으면······아니. 그러니까 애초에 속옷은 왜 안 입고 다니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나는 꾹 참고 묵묵히 수건으로 그 음부 쪽을 닦아주기만 했다.

그런데 농담이 아니라 정말 너무 민감한데?

아무리 내 매력이 높아도 그렇지, 얘도 생긴 걸 보면 절대 매력이 낮을 수가 없는 애였다.

심지어 종족도 순혈 다크 엘프라고 하잖아. 그게 어느 정도로 대단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바프라라는 놈이 그렇게 집착하는 걸 봐서는 거의 순혈 엘프인 디아나랑 동급인 거 아니야? 가만히 있어도 매력은 레벨 한계치까지 올라가는 게 당연한 종족 아니냐고.

그런 애가 어떻게 이렇게 닦아주는 것만으로······젠장. 괜히 나까지 흥분되잖아.

"자! 됐어!"

마나를 돌려서 겨우 죽여놓은 물건이 다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해서, 나는 대충 마무리하고 레이에게 바지를 입혀줬다.

인벤토리에서 새로 꺼낸 그 바지는 물론 내 바지였기 때문에 엄청 컸지만, 어쩔 수 없잖아. 저택으로 돌아가는 동안은 이거라도 입고 있어야지.

"일어설 수는 있어?"

"응······하지만 걷는 건······."

"어쩔 수 없지. 자."

하반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만큼 서 있는 것도 고작인 모양이어서, 나는 레이를 업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대로 텐트를······나가기 전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얘기를 꺼내고 말았다.

"야. 방금 전 섹스는 말이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처녀까지 가져가 놓고 이대로 아무 변명도 없이 넘어가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는다고 할까, 찝찝하잖아?

계속 이렇게 찝찝한 기분으로 지내느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일일지라도 일단 제대로 말을 해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응. 알아.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

"뭐? 너······."

"응. 그놈들······날 붙잡자마자 이상한 약부터 먹였어. 그걸 먹고 나니까 몸이 뜨거워져서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았어. 하지만 그놈들이 날 보고 웃으며 조롱하는 소리만큼은 확실히 들렸어. 다음에 눈을 떴을 때는 나 스스로 바프라한테 애원할 거라고. 그러니까 너도 내가······."

"그만. 됐어. 미안. 괜히 얘기했네. 괜찮아. 더 말 안 해도 돼."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더듬더듬 말하는 레이의 얘기를 듣고, 나는 황급히 대화를 중단했다.

그런가. 그 성격 더러운 새끼들. 잠드는 약을 먹이기 전에 먼저 미약부터 먹이고 조롱했던 건가.

어쩐지 얘가 아무 말 없이 그냥 넘어가려고 하더라니.

내가 굳이 변명하기도 전에 이미 레이는 자신이 미약에 절어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사정을 아는 만큼 더 얘기하고 싶지도 않아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던 거다.

젠장. 조금 더 빨리 눈치챘어야 했는데.

나도 내심 너무 당황하고 있어서 레이의 마음을 전부 헤아려줄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다 끝난 일이니까. 돌아가자."

그렇게 말하고, 나는 텐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원 님!"

"그렉? 네가 왜 여기에? 그 마차는?"

텐트 밖으로 나오자, 날 맞이해준 건 실비아도 쓰레온도 아닌 그렉이었다.

마차에 기대고 서 있던 그렉은, 내 모습을 보자마자 황급히 달려와서는 그 호랑이 얼굴을 부담스럽게 들이밀었다.

참고로 마차라는 건 아까 쓰레온이 말의 다리와 마차 바퀴를 잘라버린 그 마차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것 말고도, 멀쩡한 마차 한 대가 우리 텐트 근처에 가만히 멈춰서 있었다.

"하핫. 구원 님의 계획을 얘기하니 파란 씨께서 마차를 한 대 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파란 씨의 명을 받아서 성문에서 난동을 부린 놈들이 근처에 있는지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이렇게 도시 밖으로 나올 수 있었죠."

과연. 어차피 지금쯤이면 항구 쪽에도 다시 경비대가 자리 잡고 있을 테니, 이걸 타고 편하게 저택까지 오라는 건가.

"실비아는?"

내가 그렇게 묻는 순간, 뒤에 업혀있는 레이의 몸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얘 실비아한테 엄청 뭐라고 하고 뛰쳐나갔다고 했지. 둘이 얼굴 봐도 괜찮으려나?

"마차 안쪽에서 주무시고 계실 겁니다. 구원 님이 나오실 때까지 기다린다고 버티셨습니다만, 그런 일을 벌이신 다음이니까요. 그러고 계시면 구원 님도 걱정하실 거라고 잘 설득했습니다."

"그러냐. 잘했어."

"네. 그럼 가시죠."

내 칭찬에 영광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렉은 마부석으로 올라탔다.

"구원 님······."

그러고 나서 나도 마차 안으로 올라탔지만, 그렉의 말과 달리 실비아는 자고 있지 않았다.

쓰레온은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었지만, 실비아는 내가 들어오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돌려서 날 쳐다봤다.

"미안. 조금 오래 걸렸지."

아까 레이랑 실비아가 만나도 될까 걱정했던 나였지만, 실은 나 자신도 실비아의 얼굴을 보기 무안했다.

사정이야 어찌 됐든 결국 또 다른 여자랑 섹스를 하고 온 거니까.

"아, 아니, 아닙니다······."

물론 우리 실비아는 저렇게 말해 줬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레이 씨도, 무사한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하지만 우리 실비아는 그런 날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는 것은 물론, 레이한테까지 먼저 말을 걸어줬다.

분명 레이가 일방적으로 실비아를 쏘아붙이고 뛰쳐나갔다고 했는데도.

실비아야. 넌 대체 얼마나 착한 거야.

"······난 틀린 말한거 없어."

하지만 그런 실비아와 대조적으로, 레이는 조금 무안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이 녀석, 철이 좀 덜 든 것 같다는 생각은 계속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너 지금 저 사람 편을 들겠다는 거야?!"

내가 레이를 조금 꾸짖는 말투로 말하자, 레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날 쳐다봤다.

아니. 그럼 내가 실비아 편을 들지 네 편을 들겠냐?

실비아가 잘못한 게 있어도 실비아 편을 들었을 텐데, 지금은 누가 봐도 네 태도가 더 나쁘잖아.

그야 네 딴에는 날 구하기 위해 그런 위험을 무릅쓴 거니까, 내가 자기편을 안 들어주면 서운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누구 편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실비아도 걱정해서 저렇게 말해주는데······."

"······."

내가 그렇게 말해줘도, 레이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날 노려보더니 그대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마치 나랑 더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저건 또 무슨······.

마음 같아서는 뭐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쟤가 날 위해 위험을 무릅쓴 것도 사실이고, 게다가 본의 아니게 처녀를 빼앗아 버렸다는 죄책감도 느끼고 있어서 나는 그 이상 레이에게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뭐, 일단 지금은 저대로 놔두자. 안 그래도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밤이라, 나도 머릿속으로 정리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구원 님."

"응."

실비아에게 자세한 얘기는 돌아가서 하자는 뜻으로 아이 컨택을 하고, 나는 팔짱을 끼고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레이!"

그리고 저택에 도착하자, 헬레나가 제일 먼저 뛰어나와서 우리를 반겨줬다.

참고로 말하자면, 레이는 지금 내 등에 업혀있었다. 삐쳐서 나랑 말도 한마디 안 하려고 한 주제에, 등에 업히는 건 또 내가 아니면 싫다는 모양이어서 말이야.

뭐, 선택지가 나랑 실비아, 쓰리온 밖에 없었으니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헬레나!"

"아아!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여기까지 그 사람들이 와서, 레이가 어떻게 된 줄 알고 나······레온 님! 절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헬레나는 레이의 무사를 기뻐하면서, 동시에 쓰레온을 향해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으? 어, 어어! 물론이지! 널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

야. 멋있는 척하는 건 좋은데 눈곱이라도 좀 떼고 얘기해라.

그리고 왜 이쪽을 힐끔 보는 거냐. 뭐? 나한테 잘하고 있는지 확인이라도 구하는 거야? 네 연애사에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고 싶은 마음 없거든?

"기쁜 건 알겠지만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다들 많이 지쳤을 테니까."

"어머, 내 정신 좀 봐. 그렇죠. 어서 들어가요."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08화 > 끝

ⓒ CurtainCall#o87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