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989화 (973/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89화 >

    "뭐야."

    "뭐긴 뭐야. 네 그 옷차림부터 어떻게 하자는 거지."

    암살자 복장. 그것도 진지한 복장이 아닌, 섹시함을 더 강조한 코스프레 같은 차림새의 레이를 보고, 나는 도저히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아무리 그래도 평소에도 이런 차림으로 다녔을 리는 없지만.

    "이, 이 옷이 왜?"

    ······ 야. 너 설마 진짜 계속 그런 차림으로 다닌 거 아니지? 지금까지 용케 안 잡혔네.

    바프라 직속이라는 그 쓰레기 놈들, 생각보다 훨씬 더 무능한 거 아니야?

    "아니. 뭐라고 해야 좋을까. 스스로 이상하다는 생각 안 해봤어?"

    "너, 넌 플리투스에서 왔으니까 잘 모르는 거야! 바프라에서 무술 훈련을 받는 여자는 대부분 암살술과, 나, 남자를 유혹하는 기술을 중점적으로 배워! 이런 차림이 기본이야! 당당히 있으면 문제없어! 애초에 네가 사람 옷차림을 지적할 처지야? 이 복면남!"

    야. 그렇게 당당하면 말도 좀 당당하게 해라. 목소리랑 눈동자가 무지막지하게 요동치고 있잖아.

    그리고 누가 복면남이야. 누가. 나도 마을 갈 때는 이 답답한 복면 벗을 거거든? 약자 태세도 쓸 거지만.

    하지만 확실히 레이의 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구미호 마을에서 로엘에게 간단히 들었던 바프라의 얘기 중에도 분명 그런 얘기가 있었으니까. 여자를 암살용으로 키우기라도 하는 바프라가 비스보다는 낫다고.

    그래도 왠지 석연치 않단 말이지.

    "그래?"

    그럴땐 내 얕은 지식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한테 물어보면 그만이다.

    "아니요."

    그리고 내 질문을 받은 유리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바프라에서 간부 암살용으로 키워지는 여자들은 남자를 유혹하는 법과 암살술을 배우지만, 남자를 유혹해서 암살해야 하는 사람이 저렇게 대놓고 암살자 같은 차림새를 하지는 않죠. 상식적으로."

    유리 얘도 은근히 가차 없네.

    그래도 사랑의 도피를 하기 전에는 바프라의 간부 집 딸내미였는데, 그 바프라의 보스 딸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디스하다니.

    그야 지금까지 존재도 몰랐고 이제는 바프라에 충성을 바치는 입장도 아니니, 바프라의 딸이라고 해서 어려워할 필요는 없겠지만.

    "으윽!"

    갑자기 상식 없는 애가 되어버린 레이는, 제대로 정곡을 찔렸는지 손으로 심장 부근을 움켜쥐고 한차례 비틀거렸다.

    야. 너 그렇게 딱 붙는 옷을 입고 심장 부근을 움켜쥐면 가슴이······ 뭐, 눈 호강은 된다만.

    "즉, 저 차림은 단순한 노출광의 차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거군."

    "누, 누가 노출광이라는 거야!"

    야. 그 대사 함부로 하지 마라. 우리 디아나가 더 보고 싶어지잖아. 젠장. 어제 목소리를 못 들어서 그런지 괜히 더 보고 싶네.

    안되지. 안 돼. 지금은 그리움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야.

    "그래서, 다른 옷은 있고?"

    "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야 그렇겠지. 배에서 헬레나를 구하자마자 어디 들를 새도 없이 바로 배 밑에 달라붙어서 이동해온 거니까.

    뭐, 어디 들를 시간이 있었어도 다른 옷이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여기서 더 괴롭히면 괜히 마을에 가기도 전에 애 멘탈부터 박살 낼 것 같으니까 그만하자.

    이제 와서 부끄러워졌는지 자신의 가슴 부분을 필사적으로 가리는 레이를 보면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선 이거라도 걸쳐라."

    나는 인벤토리 안에서, 내 옷 중에 크게 입어도 대충 어울릴만한 디자인의 옷을 골라 레이에게 건넸다.

    사실 우리 애들 옷도 없는 건 아니었고, 사라 옷 정도면 대충 사이즈도 맞을 것 같기는 했지만, 왠지 우리 애들 옷을 입히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지.

    레이도 딱히 사이즈에 대한 불만은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한시라도 빨리 자기 피부를 가리고 싶다는 듯 황급히 암살자 복장 위에 내 옷을 입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역시 옷걸이가 좋으면 무슨 옷이든 소화가 되는구나.

    생긴 게 되니까 대충 건넨 내 옷마저도 마치 원래 이렇게 입는 옷이라는 것처럼 루즈핏으로 소화해내네.

    "네 냄새가······."

    하지만 정작 그렇게 옷을 소화해낸 레이는, 옷에 파묻히는 느낌으로 가슴께를 들어서 코까지 덮고는 그런 불평을 했다.

    "거짓말하지 마! 제대로 빨아서 넣은 거니까!"

    네가 무슨 레이아냐?! 빨아 넣은 옷의 냄새도 맡게?!

    이왕 따라 할 거면 냄새 잘 맞는 점이 아니라 천사 같은 점을······ 크흑. 천사님. 보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무튼 됐으니까 가자!"

    레이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이상 대화하면 괜히 우리 애들만 더 보고 싶어질 것 같아서 나는 슬슬 잡담은 그만하고 마을로 향하기로 했다.

    다른 여자가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우리 애들이 생각나는 걸 보니, 나도 슬슬 중증인 모양이야.

    이거 진짜로 어떻게 해서든 우리 애들을 만날 방법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해서, 우리는 강가를 따라 조금 걸어서 엄청나게 거대한 항구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후드를 깊게 눌러쓴 상태였다.

    이 인원이 전부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니면 조금은 눈길을 끌겠지만, 그래도 지명수배자가 셋이나 있는 입장에서 얼굴을 드러내고 다닐 수는 없었으니까.

    나나 쓰레온 같이 얼굴이 드러나도 상관없는 사람은 후드를 쓰지 않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어차피 그래 봤자 후드를 쓴 다른 사람들 때문에 눈길을 끌건 변함이 없으니, 괜히 얼굴만 팔릴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전원이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집단이 되어버렸다는 얘기다.

    뭐, 그래도 너무 의심스러운 복장은 피하기 위해서, 나는 후드를 뒤집어쓰기 전에 복면을 벗었지만.

    내가 약자 태세를 쓰고 복면을 벗자 레이가 "······ 말했던 것만큼 잘생기지도 않았네."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무시하자. 무시.

    조금 더 덧붙이자면 헬레나는 그런 레이에게 "그래? 충분히 잘생기신 것 같은데······."라고 말해줬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헬레나 쟤가 참 사람이 됐단 말이야.

    이런 여자한테 안 좋은 세계에서 평범한 아가씨가 어찌 저리 마음씨 곱게 자랐는지. 레이야. 좀 본받아라.

    "경비인가. 통과할 방법은 있어?"

    그리고 넬슨강 최대의 항구 도시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는지, 프리움은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당연히 입구에는 검문까지 하고 있었다.

    "저희가 처음 이곳까지 도주 해왔을 때는 아직 저희가 도주 중인 몸이라는 소문이 여기까지 퍼지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가문의 인장을 보여주고 당당하게 통과했습니다만, 지금은······."

    지금쯤이면 소문이 다 퍼졌을 테니 같은 방법은 힘들 거라는 얘기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물 밖으로 나올 때 항구 쪽으로 나올 걸 그랬나? 이 인원이 물속에서 튀어나오는 걸 숨길 방법이 없을 것 같아서 일부러 조금 떨어진 곳으로 나왔는데.

    아예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서 밤까지 기다렸다가 어둠을 틈타 항구 쪽으로 잠입할까?

    하지만 모처럼 우리가 매달려온 저 배가 정박하지 않고 강 한복판에 떠 있는 거다. 웬만하면 그사이에 잠입해서 조금이라도 추적의 실마리를 없애고 싶은데.

    "신. 저기 봐."

    "응? 저건! 할 가문의!"

    내가 그렇게 고민하는 동안, 갑자기 유리가 뭔가를 발견했는지 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정문에서부터 길게 늘어서 있는 행렬의 끝부분을 가리켰다.

    "할 가문?"

    "네. 저희를 도와줬던 파란의 할 가문입니다."

    "그렇다는 건······."

    "네! 다녀오겠습니다!"

    신은 희망의 빛을 봤는지 급하게 발을 놀려 마차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신과 유리가 발견한 그 할 가문의 무리는 마침 대형 거래를 마치고 돌아온 상단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규모에 걸맞은 지위의 사람이 상단을 이끌고 있었고, 그 인물이 신과 유리와도 안면이 있는 인물이었다는 모양이다.

    그 인물의 도움으로 우리는 마차에 끼어 탈 수 있었고, 할 가문은 여기서 상당히 영향력이 큰 가문인지 검문도 프리 패스로 통과되어 무사히 도시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신! 유리! 자네들을 다시 볼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그리고 도시에 들어와서도 마차를 타고 그대로 할 가문의 집까지 찾아간 우리를, 살짝 느끼하게 생긴 남자가 두 팔을 벌리고 환영해줬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과 유리를 환영해준 거지만.

    "파란! 잘 지냈어?!"

    저 남자가 파란인가.

    친구라고 하기에 신과 유리와 비슷한 나이대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아마 서른 초중반쯤 됐을까?

    "그나저나 자네들이 여길 왜? 플리투스로 향하는 것 아니었나?"

    게다가 파란은 남한테 숨기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런 말까지 외쳐댔다.

    아까 상단의 도움을 받은 것도 그렇고, 혹시 저 파란이라는 인물뿐만이 아니라 할 가문 전체가 그 비밀 클럽과 뭔가 관계가 있는 걸까?

    그리고 그런 내 의혹은, 파란의 다음 행동을 보고 확신으로 변했다.

    "그것 말인데······ 파란에게만 긴히 할 말이 있어."

    "내게만? 자네들의 사랑에 관한 얘기가 아닌 건가?"

    마치 여기서 사랑 얘기를 숨기는 게 이상하다는 저 반응.

    확실히 할 가문 전체가 비밀 클럽과 연관이 있는 모양이군.

    "우리 얘기라면 우리 얘기지만······ 가장 믿을 수 있는 파란에게만 할 수 있는 얘기야."

    "알겠네. 따라오게."

    "그래. 형님.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응? 그러고 보니 저 사람들은?"

    신이 내게 손짓하자, 파란은 그제야 우리의 존재를 깨달았다는 듯 시선을 보냈다.

    대체 얼마나 시야가 좁은 거야? 아니면 하인 같은 걸로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것도 가서 말해줄게. 가자."

    그렇게 신과 파란의 뒤를 따라서, 우리는 넓은 집무실 같은 곳으로 이동했다.

    "자, 여기라면 아무도 듣지 못하네. 그래서, 무슨 얘기인가?"

    "거기부턴 내가 말하지."

    파란은 여전히 신에게만 시선을 맞추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신의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서며 끼어들었다.

    이놈한테 맡겨두면 쓸데없는 말까지 할 공산이 크니까 말이야.

    "우선 우리는, 플리투스의 인간이다."

    "그렇군. 그래서 플리투스에 간다던 신과 유리가······. 그래서, 플리투스의 인간이 여기엔 무슨 일이지? 침략인가?"

    딱히 놀라지도 않고 침착한 표정으로, 파란은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 두 손을 깍지껴서 자신의 입 주위를 가렸다.

    신과 유리처럼 어설프게 지위만 높고 세상 물정은 어두운 어수룩한 놈은 아니라는 건가.

    "침략보다 더 중요한 걸 하러 왔지."

    "더 중요한 것?"

    "그래. 꽉 막힌 네놈들의 눈을 뚫어 빛을 보여주러 왔다."

    "상당히 오만한 발언이군."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음에도, 파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야 그렇겠지. 저런 말을 듣고 자존심에 상처가 안 나면 그게 이상한 거지.

    "오만? 나로서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해줄 셈이었지만."

    "형님.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니까······."

    "아니. 할 말은 해야겠어. 이 제대로 된 사랑도 모르는 어리석은 놈한테."

    뒤에서 신이 날 말리려고 했지만, 나는 그런 신에게 손을 뻗어서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원래 이런 기 싸움은 한 번 밀리면 거기서 끝이야. 처음부터 세게 가야 앞으로도 우위를 잡지.

    "내가? 제대로 된 사랑을 몰라?"

    그리고 방금 내 말이 그 무엇보다도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는지, 파란은 눈썹을 심하게 꿈틀거렸다. 그 비밀 클럽의 관계자라는 것은, 이 녀석도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는 얘기니까 말이야. 그것도 무척이나.

    그런 놈한테 저런 말을 하면, 그야 화도 나겠지.

    "그래. 알려주지. 진짜 사랑이라는 것을."

    그런 파란에게 한쪽 입꼬리만 올리면서 미소를 지어준 후 내가 꺼낸 말은, 당연히 콘돔 섹스에 관한 얘기였다.

    그리고 얘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심기 불편했던 파란의 표정이 점점 벼락 맞은 표정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즉, 사랑이 담긴 섹스를 한 번도 못 해본 넌, 아직 진짜 사랑을 모른다는 거지."

    "시, 신. 이 자의 말은 사실인가?"

    "그래."

    "기, 기분 좋았나?"

    "도저히 말로 표현이 안 되는 기분이었어. 그런 건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평생 모를 거야. 몸으로 느끼는 쾌락만이 전부가 아니었어."

    "그, 그 행위로 정말로 여성도 기분이 좋을 수 있다고?"

    신의 강한 긍정에도 믿기 어렵다는 듯, 파란은 유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게······."

    그러자 유리는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해버렸고, 파란은 그 행동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 그, 코, 콘돔이라는 물건은······ ?"

    이제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지 입술을 덜덜 떨면서, 파란은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여기 있······."

    "하나 빌리겠네! 잠깐 실례!"

    그리고는 신이 콘돔을 꺼내기가 무섭게 낚아채서는, 파란은 그대로 방 밖으로 달려나가 버렸다.

    "······ 저거 설마 바로 하러 간 거야? 우리한테 섹스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 거고?"

    "그, 그렇지 않을까요?"

    저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오늘 처음 본 사람을 보통 그런 이유로 기다리게 해?!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89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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