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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88화 (972/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88화 >

    그렇게 사라와 몇 마디 대화를 더 주고받고 나서, 나는 그러고 보니 어제 하다만 얘기가 있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나저나 다른 애들은 자?"

    "응. 다 같이 잠도 안 자고 청승맞게 반지만 보고 있는 것도 바보 같으니까. 내가 대표로 보고 있을 테니까 가서 자라고 쫓아냈어."

    얘가 또 사람 미안해지게 하네.

    "진짜 미안. 다음부턴 제때 연락할게."

    "됐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까. 괜히 무리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게 더 싫고."

    나는 미안해져서 또다시 사과했지만, 사라는 됐다는 듯이 그렇게 말해줬다.

    진짜 눈앞에 있었으면 끌어안아 줬을 텐데.

    내가 전생에 무슨 업보를 쌓았기에 저런 더러운 사내놈들이랑 이런 곳에서 이러고 있는 건지.

    "그보다 다른 사람은 왜? 불러올까?"

    "아니. 괜찮아. 괜히 깨우면 미안하잖아."

    "흐응. 그렇게 생각 안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라는 그 이상 다른 사람을 불러오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랑 둘이서만 얘기할 기회를 이 이상 스스로 거부할 생각은 없다는 것처럼.

    "괜찮아. 그냥 어제 구미호 마을에 마법진을 깔았다는 얘기를 하던 도중에 끊겼으니까 뒷얘기가 조금 궁금했을 뿐이야. 뭐, 급한 것도 아니니까 내일 들으면 되지."

    "아, 그러고 보니."

    "응?"

    디아나가 없으니 당연히 그 뒷얘기는 내일 들을 생각으로 있었는데, 사라가 내 말을 듣고 뭔가 할 말이 기억났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자세한 건 내일 디아나가 말해주겠지만, 아무래도 여기 사람들은 우리 마나에 그렇게까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아."

    "아, 그래?"

    그건 조금 의외였다.

    여신님 쪽의 인간, 특히나 성직자 같은 경우 전쟁 신의 영역에 발을 디디기도 힘들 정도로 거부감을 느끼게 되고, 반대로 몬스터들도 여신님 영역에 들어오면 흉포해지니까.

    분명 이쪽 사람들도 여신님의 마나에 닿으면 뭔가 반응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 생각해보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직접적으로 여신님의 힘을 빌려 쓰는 사제를 제외하면, 다른 모험가들은 아무렇지 않게 던전에 다니고 있으니까.

    여기 사람들도 그런 느낌으로 여신님의 마나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응. 다만 조금······."

    "응?"

    그렇게 스스로 납득하고 있었지만, 사라의 얘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조금 흥분되는 모양이야. 아, 그렇다고 해서 성자의 스킬에 맞은 것 같은 그런 건 아니지만. 로엘의 말을 빌리자면, 스트레칭을 하고 난 것처럼 몸이 아주 살짝 예열된 기분이래. 두둥실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도 했고. 그러니까 조심해. 괜히 거기 사람들

    한테 우리 쪽 마나가 닿게 하지 말고. 디아나도 아직 표본이 구미호밖에 없으니까 더 알아봐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으니까."

    "알았어. 뭐, 어차피 여신님의 마나를 닿게 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내가 갑자기 여기에다가 마나 변환 장치 같은 걸 깔 것도 아니니까.

    "또 그렇게 방심이나 하고. 그러다가 또 실수하는 거 아닌지 몰라."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는 실수할 여지가 없잖아. 어떻게 여신님의 마나에 접하게 한다는 거야?"

    "왜 없어? 치유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까, 포션을 쓸 일도 생길 거 아니야. 그러다가 잘못해서 여기 포션을 거기 사람한테 쓰기라도 하면······."

    "어? 포션도 안 돼?"

    "당연하잖아. 포션을 어디서 누가 어떻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거야? 신전에서 사제들이 마나초에 자신의 신성력을 담아서 만드는 거잖아. 포션 보다 여신님의 마나가 잔뜩 담긴 물건이 또 어디에 있겠어? 게다가 포션은 몸에 바르든 마시든 몸에 스며들어 영향

    을 주는 거니까."

    "새,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잠깐만. 뭐야 그 반응은? 야 구원. 너 설마 벌써······ !"

    사라가 다급한 목소리로 날 다그치려고 한 순간, 갑자기 뚝 하고 그 목소리가 끊어져서는 더 들리지 않게 됐다.

    이걸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안 좋다고 해야 할지.

    빛을 잃을 반지를 복면에서 꺼내 다시 손가락에 끼워 넣으면서, 나는 다들 모여있는 곳으로 힐끔 시선을 돌렸다.

    네. 사라 씨. 실은 그 설마 벌써 입니다.

    내 시선의 끝에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다른 놈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헬레나의 모습이 있었다.

    "설명은 잘하고 있냐?"

    "아, 네. 구원 님. 지금 구원 님과 레온 님이 용사라는 부분까지 설명을 마쳤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다들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역시나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건 그렉이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왜 맨날 실비아보다 네가 더 먼저 반응을 보이는 건데.

    아니. 실비아는 원래 말수가 적고, 지금은 남장까지 하고 있어서 더더욱 말수가 줄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슬슬 무섭다고.

    "아, 그······ 구원 님······ 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아까는 경황 중에 제대로 감사 인사도 하지 못해서 죄송했어요. 구해주셔서 정말로, 정말로 감사드려요."

    겉보기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이는데.

    그냥 조금 달아오르는 정도라고 했으니, 물속에 있는 만큼 몸이 식은 걸까?

    아니면 헬레나는 레벨이 낮아서? 사제 같은 경우도 레벨이 낮을수록 던전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더 길어지니까 말이야.

    그것도 아니면 진짜 일반인들은 별다른 영향이 없는 걸까?

    "잠깐. 헬레나가 무서워하잖아."

    잠깐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우리 사이에 레이가 끼어들어 왔다.

    아까 힐끔 봤을 때는 혼자 조금 떨어져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던 주제에, 나하고는 제대로 말을 하는 모양이다.

    이거 기뻐해야 하나?

    "아, 미안.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애초에 혼자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설명도 저런 사람들한테 맡기고."

    저런 사람들이라니······. 너희 혹시 얘한테 뭐 이상한 말이라도 했냐?

    그런 의미를 담아서 눈짓하자, 그렉과 듀크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저놈들이 아니라고 해봤자 그다지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냥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을 정리하고 온 거야. 방금도 봤잖아? 난 생각할 때 혼자 말없이 가만히 있는 타입이거든."

    "그래."

    아무튼 내가 그렇게 얼버무리자, 레이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별로 관심 없으면 처음부터 물어보질 마라.

    "그런데 그 답답한 복면은 언제까지 쓰고 있을 거야? 슬슬 벗는 게 어때?"

    게다가 얼굴을 돌린 주제에 아직 나와 할 말은 남아있다는 듯, 레이는 계속해서 내게 말을 던졌다.

    그다지 영양가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건 안 돼."

    "어째서?"

    "너무 잘생겨서."

    "······ ···."

    내가 그렇게 대답한 순간, 레이가 노골적으로 ‘얘 뭐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농담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래봬도 일단 진심이니까!

    레이 너만 있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헬레나도 같이 있으니까 말이지. 저 레벨에 나 정도 매력 수치를 가진 이성의 얼굴을 직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직접 몸으로 겪어본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내 매력이 아직 전성기 디아나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매혹 효과를 보기에는 충분한 차이였다.

    "크, 크흠! 아무튼 그래서, 우리가 용사라는 말을 했다는 건, 우리 목적이 뭔지도 얘기했다는 거지?"

    그렇다고 해도 직접 복면을 벗어서 헬레나가 내게 매달리는 꼴을 보여줄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고이 마음속에 담아두고는 말을 돌렸다.

    "네."

    "레이 너도 우리 목적에 동의하는 거고?"

    "······ 그래. 난 그 남자한테 복수할 수 있다면 방법은 어찌 되든 좋아. 그리고 너희 말대로 되면, 결국 여자에 대한 차별도 없어지는 거니까."

    자기보다는 헬레나를 위해서라도 차별을 없애고 싶다는 듯, 레이는 헬레나 쪽을 힐끔 바라보며 굳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레이도 헬레나도, 용사라는 말을 듣고도 그다지 태도에 변화가 없네.

    신이나 유리는 처음에 들었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던데.

    뭐, 레이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온 만큼, 미묘하게 상식이 어긋나 있는 건지도 모른다.

    헬레나는 헬레나대로, 용사나 바프라나 그냥 똑같이 높으신 분 정도라는 인식밖에 없을지도 모르고.

    뭐, 아무튼 지금은 그런 것보다.

    "좋아. 그럼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이 뭔지도 명확하지? 굳이 커플을 플리투스까지 데려갈 필요도 없어. 아예 바프라 자체를 여자도 차별이 없는, 그리고 대놓고 연애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바꿔주겠어."

    여신님의 이름을 걸고!

    항상 자기 이름은 안 걸고 애꿎은 할아버지 이름만 걸어대는 모 소년 탐정이 된 기분으로,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렇게 다짐했다.

    아무튼 그렇게 얘기를 마치고, 우리는 드디어 잠을 잘 수 있게 됐다.

    벌써 날이 밝아올 시간이기는 했지만, 어차피 배가 도착할 때까지는 이대로 가만히 매달려 있어야 하니까.

    줄줄이 소시지처럼 밧줄에 묶여서 배에 이끌려가며 물속에서 잠든다는 게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미 4계층에서 수중 수면이 익숙해진 모험가 파티는 금방 잠이 들 수 있었다.

    "슬슬 일어나. 이런 상황에서 잘도 잠이 오네······."

    몸이 흔들리는 느낌에 눈을 뜨니, 바로 코앞에서 검은 피부의 미인이 날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으악! 사람이 자는 사이에 무슨 짓이야! 난 이미 임자가 있는······ !"

    키스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뺀 다음에야, 나는 자신이 물속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랬지.

    정신을 차리고 눈앞에 있는 검은 피부의 미인, 레이를 바라보자, 다행히도 마스크가 떨어지면서 내가 뭐라고 하는지 듣지는 못한 듯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크흠. 큼. 무슨 일 있어?"

    "배가 멈췄어. 도착한 것 같아."

    내가 생각해도 어색하기 그지없는 대응이었지만, 다행히도 레이는 태클을 걸려고 하지는 않았다.

    듣고 보니 끌려가며 느껴지던 물살이 더는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다른 놈들도 깨우기 위해 시선을 돌리자, 이미 신과 유리, 헬레나가 대신 깨워주고 있었다.

    결국 쟤들은 다 못 잔 건가. 그러고 보니 날 깨운 레이도 눈가가 살짝 퀭해 보이기는 했다.

    이거 일단 나가자마자 쉴 곳부터 찾아야겠군.

    "다들 여기서 잠깐 기다려."

    "설마 혼자 배에 잠입할 생각이야?"

    "설마."

    깨어난 두 놈이 배 안에서 뭘 하고 있을지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나라도 아직 밤도 아닌 시간대에 배 안에 잠입해서 그 안을 엿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조금 먼저 얼굴을 내밀어서 밖의 상황을 보고 오려는 것뿐이야.

    내 앞을 가로막은 레이와 은근슬쩍 내 팔을 잡은 실비아를 안심시켜준 다음, 나는 혼자 헤엄쳐 나와서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배는 아직 항구에 도착하지 않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저 멀리 항구처럼 보이는 곳이 보이기는 했다.

    다만 배가 거기에 정박하지 않았을 뿐.

    설마 이 녀석들, 배가 정박하기 전에 배 안에 있는 우리를 찾아내려는 속셈인가.

    하긴. 우리가 배에 매달려서 이동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테니까, 아직 우리가 배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지.

    결과적으로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 되어버렸지만.

    이렇게 항구에 정박하지 않고 잠시 멈춰 있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호기였다.

    나는 재빨리 다시 배 아래로 들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전하고, 다 같이 헤엄쳐서 물 밖으로 나왔다.

    "신, 유리.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어?"

    "네. 형님. 넬슨강 최대의 항구 도시, 프리움입니다. 저희도 이곳에서 배를 숨어 탔었죠."

    "그렇다는 말은 즉."

    "네. 파란이라면 저희를 숨겨줄 수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짐 덩이밖에 되지 않았던 이 두 커플이 쓸모 있을 때가 드디어 왔다는 건가.

    "왠지 들어본 이름 같은데. 파란이라면, 혹시 배에 너희를 끼워 타게 해줬다던?"

    "네. 역시 한 번 도움을 받은 곳은 위험할까요?"

    "그렇군······."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말이 있는 만큼, 같은 사람한테서 계속 도움을 받는 건 언젠가 꼬리를 밟힐 우려가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한 번 도움을 준 사람만큼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도 또한 사실이란 말이지.

    만약 지금까지 멀쩡하다면 이 녀석들을 도와줬단 것도 들키지 않았다는 얘기니, 한 번 더 도움을 받으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선 가보자. 아, 하지만 그 전에······."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88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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