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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897화 (881/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897화 >

    대장간에 맡겨놨던 장비들을 되찾고, 길드에서 레이첼 누님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아래로.

    그렇게 4계층의 마을에 도착하고 나서, 나는 앞으로 한 발자국만 더 내딛으면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위치에서 걸음을 멈춰 세웠다.

    나가기 전에 해야 할 준비가 있으니까 말이야.

    "나, 나가서 하는 건 안 되나요?"

    내가 레이아의 얼굴을 말없이 빤히 쳐다보자, 레이아도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는 듯 얼굴을 살포시 붉혔다.

    그리고는 귀엽게 저항하는 레이아였지만, 아무리 귀여운 짓을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밖에 나가버리면 여차할 때에 내가 대응하기 힘들기도 하고.

    "정마알······."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레이아는 곱게 눈을 한 번 흘겨주고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천사님. 천사님은 그렇게 크게 심호흡하시면 가슴도 덩달아 출렁거리셔서······감사합니다.

    "그럼······할게요?"

    그렇게 말하고도 손을 머리 쪽으로 올렸다가 내렸다가 하면서 몇 번을 주저한 끝에, 레이아는 긴장한 표정으로 겨우 자신의 머리를 한데 모아 묶었다. 이번에는 머리끈까지 제대로 써서.

    하지만 그렇게 뜸을 들인 보람도 없이, 레이아는 구미호로 변하지 않았다.

    역시 하룻밤만으로 완벽하게 자기암시를 한다는 건 불가능했나.

    머리를 묶는 순간 눈동자에서 살짝 보랏빛 안광이 흘러나오기는 했으니, 가능성은 봤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아, 아직 안 되는 모양이네요."

    레이아도 변신을 실패한 것이 상당히 실망스러웠는지, 축 처진 목소리에 실망감을 가득 담아 중얼거리셨다.

    남들 앞에서 대놓고 섹스 신호를 보낸다는 부끄러운 짓까지 했는데도 보람이 없었던 거니까 말이야.

    "······."

    그리고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사정을 전혀 모르는 나머지 애들은, 뭔가 미묘한 표정으로 우리가 하는 짓을 바라보고 있었다.

    "얘들아. 할 말 있으면 그런 눈으로 보고 있지 말고 하지 그러냐? 말해두지만······."

    지난밤의 여운을 잊지 못하고 아침에 이어 던전에 내려와서까지도 천사님하고만 알콩달콩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으면 곤란해.

    너희를 따돌릴 생각으로 이러는 게 아니라, 밝히기 부끄러운 사정이 있어서 이러는 거에요.

    그렇게 변명할 생각으로 운을 뗐던 나였지만, 그건 우리 애들의 눈치를 너무 얕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정말로 해도 돼? 그럼 하겠는데. 레이아, 아침에도 머리를 묶으려다가 주저했죠? 혹시······으읍."

    "그, 그 이상 말하지 말아주세요오!"

    우리 눈치 빠른 용사님은 안 그래도 한마디 해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는데 잘 됐다는 듯 정확하게 핵심을 찔러왔고, 레이아는 그런 사라의 입을 두 손으로 황급히 틀어막았다.

    천사님. 그렇게 반응하시면 자신이 방금 섹스 신호를 보낸 거라고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뭐, 오히려 그렇게 인정하는 게 구미호로 변신하는 데 도움은 되겠지만요.

    "흠. 사라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구, 구원씨이!"

    그런 의미에서 내가 사라의 말을 받아주려고 하자, 레이아는 꼬리를 파닥파닥 거리면서 사라의 입에서 손을 떼고 이번엔 내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애초에 내가 노린 건 이거였기 때문에, 나는 천사님의 손이 내 입에 닿기 전에 그 손목을 낚아챌 수 있었다.

    "미안한데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줄래? 레이아랑 둘이서만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그리고는 그대로 천사님의 손목을 잡아끌어서 다시 마을의 중앙 쪽으로 향하려고 했다.

    대놓고 뭘 하러 가는 거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눈치 빠른 우리 애들이라면 다들 눈치채고 있겠지. 내 발걸음이 여관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네, 네엣?! 잠! 구원씨이?!"

    그건 레이아 역시도 마찬가지여서, 레이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당황하셔서는 날 뜯어말리려고 했다.

    내가 장난을 쳐도 보통 포근하게 웃으면서 받아주시는 천사님이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니, 상당히 당황스럽기는 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나는 발걸음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레이아의 허리에 팔을 감고 그 귀에 입을 가져가서는,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여줬다.

    "왜 그렇게 놀라? 레이아가 먼저 하자고 했잖아?"

    "아읏! 그, 그런 게······! 아, 아니요······그런 게 맞지만, 그런 게 아니고요!"

    내 속삭임에 덩달아 목소리가 작아지신 천사님은, 부정도 긍정도 못하고 당황하기만 하셨다.

    확실히 머리를 묶는 걸 섹스하자는 신호로 하기로 서로 합의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걸 인정해버리면 지금 당장 호텔에 끌려가서 섹스하게 될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거겠지.

    나랑 섹스하는 게 싫은 건 아니겠지만, 우리 천사님 성격이 다른 애들을 여기에 멀뚱히 기다리게 하고 혼자 즐기고 오는 걸 좋아할 성격은 아니니까.

    "맞잖아? 섹스하자고 한 거잖아?"

    "세, 섹! 하, 하지만요오······."

    하지만 내가 계속 밀어붙이자, 천사님의 눈동자가 다른 애들 쪽과 내 얼굴 사이를 쉴 새 없이 왕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눈에서 점점 보랏빛 안광이 진해지고 있음을 느낀 다음에야, 나는 겨우 천사님의 허리를 놔줬다.

    "뭐, 지금은 상황이 이러니 할 수 없나. 구미호도 됐고."

    "넷?! 아······정말로······. 정마알. 이번에는 조금 억지셨어요······."

    레이아는 내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는 듯, 자신의 엉덩이 뒤쪽으로 손을 뻗어서 아홉 개의 꼬리가 만져짐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내게 곱게 눈을 흘기면서,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사실 자기암시를 확실히 하려면, 여기서 멈추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그, 그래도 정말로 하는 건 안 되니까요?"

    하지만 그런 투정에도 내가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레이아는 다급한 표정으로 내 팔에 매달려서는 다시 날 다른 애들 쪽으로 잡아끌었다.

    걱정 마세요. 설마 제가 진짜로 여관으로 갔겠어요?

    아무리 구미호 변신이라는 명분이 있다고는 하지만, 다른 애들이 화나는 걸 어떻게 수습하려고.

    "알고 있어. 대신 한 번 킵 해두는 거다?"

    하지만 모처럼 천사님과의 오붓한 시간을 즐길 명분이 생겼는데 그냥 포기하는 것도 뭔가 아까워져서, 나는 천사님에게 끌려가면서 그렇게 속삭여줬다.

    "키, 킵······."

    "괜찮지?"

    "네, 네에······."

    당연한 얘기지만 천사님 역시도 나랑 둘만 있을 약속을 하는 게 싫은 건 아닌 듯, 부끄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헤헷. 이러니저러니 해도, 천사님은 날 너무 좋아하신다니까.

    "코홈! 얘기 끝났으면 조금 떨어지는 것이 어떤가?"

    그리고 그렇게 우리 얘기가 마무리 지어진 타이밍을 노리기라도 한 듯, 디아나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며 태클을 걸었다.

    "아, 죄, 죄송해요."

    "미안. 미안. 가슴에서 팔 빼면 되는 거지?"

    "가, 갑자기 가슴 얘기는 왜 나오는 겐가?!"

    에이. 우리 천사님 가슴에서 눈을 못 떼던데 아닌 척은.

    "능글능글 웃지 말게!"

    결국 디아나한테 토닥토닥 공격까지 받고 나서야, 우리는 겨우 던전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그러면 우선은 곧장 거북이굴에 가서, 거대 거북이를 잡고 5계층으로 가는 걸 목표로 할까.

    지금까지 우리가 던전을 내려온 과정을 따르자면 이번에도 4계층의 주인을 잡고 5계층의 초입부터 천천히 진행해나가는 게 맞겠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적으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이유는 여러 개가 있는데, 우선 나나 실비아가 5계층의 몬스터를 경험해봤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지금까지는 새로운 계층에 진입할 때 그곳의 경험이 있는 게 디아나밖에 없었지만, 5계층은 전에 아라크네 클랜을 따라간 적이 있으니까 말이야.

    난 뒤에서 구경만 하다가 성자 스킬이나 쓰는 게 전부기는 했지만.

    하지만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라크네 클랜이 어떤 식으로 몬스터를 상대하고, 몬스터의 공격 패턴이 어떤 식인지 더 잘 관찰할 수도 있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직업의 특성을 살리면서 전투법을 바꾸면서 재정립된 우리 파티의 전투 방식은 기본적으로 실비아가 앞에서 탱커 역할을 하고, 실비아가 미처 어그로를 다 끌지 못하게 되면 내가 성자 스킬로 그 몬스터의 어그로를 감당하는 방식이었다.

    즉, 후위진에는 일절 어그로가 끌리지 않게 한다는 얘기다.

    그런만큼 전위인 나랑 실비아가 몬스터의 상대법을 알고 있는 게 제일 중요했고, 그 조건이 이미 충족된 5계층은 중간부터 시작해도 감당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우리 파티가 뭐 화력이 부족한 파티는 절대 아니니까 말이야.

    그 외에도 내 사명을 마무리 지을 고지가 눈앞이니 서두르고 싶다든가, 아라크네 클랜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기 전에 마지막 계층에 도달하고 싶다든가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런 건 덤이었고.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전에 아라크네 클랜 사람들과 같이 갔던 것처럼 4계층에서 거북이굴로 직통으로 이어진 곳으로 향했고, 전과 마찬가지로 대략 하루 정도 걸려서 거북이굴에 들어올 수 있었다.

    물론 이제 와서 4계층 몬스터가 우리 상대가 될 리가 없었으니, 그 사이에 따로 얘기할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역시 아무리 그래도 하루면 변신이 풀리는구나."

    레이아의 변신이 도중에 풀려버린 거랄까?

    아니. ‘섹스가 정말 좋아요!’라고 외쳤을 때는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풀려버렸으니, 저 정도면 상당히 효과를 봤다고 할 수 있었지만.

    "네에······."

    "다시 묶어도 안 돼?"

    "으응······그런 모양이에요."

    레이아는 내 말에 머리끈을 풀었다가 다시 묶어봤지만, 여전히 구미호로 변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까처럼 머리를 묶을 때 부끄러워하지 않는 걸 보니, 변신도 풀릴만하네.

    "역시 묶을 때마다 섹스해야······."

    "이, 이런 곳에서는 안 되니까요!"

    나는 머리를 묶는다는 것이 어떤 행위인지 레이아에게 다시 자각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말해봤지만, 레이아는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면서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외쳤다.

    아, 참고로 말하자면, 나와 레이아는 지금 불침번을 교대하는 타이밍에 잠깐 서로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아서는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나는 오늘 안에 거대 거북이까지 잡을 생각이었지만, 우리 애들이 거대 거북이는 하루 쉬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잡자고 하는 바람에 거북이굴에서 하루 쉬게 됐거든.

    던전에 오기 전부터 호들갑을 떨었던 사라나 실비아뿐만이 아니라, 디아나나 레이아 역시도.

    다들 내가 일부러 다쳤다는 걸 알면서도 너무 호들갑이라니까.

    진짜 사랑한다 얘들아.

    아무튼 거북이굴이 그 특징상 몬스터의 습격을 받을 염려가 없다고 봐도 좋을 곳이기도 해서, 나와 레이아는 불침번 시간인데도 조금 긴장을 풀고 이렇게 둘이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거다.

    "정말로? 방금 그걸로 두 번이나 킵 되어있는데?"

    "지, 지금 것도 세는 건가요?"

    "당연하잖아. 묶은 건 묶은 거니까. 그래서, 진짜로 안 돼? 아무도 안 보고 있잖아. 레이아만 조용히 하면······."

    "어, 어떻게 그래요······."

    얼핏 들으면 ‘아무리 그래도 이 상황에서 어떻게 섹스를 해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확신을 가지고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지금 천사님은 분명, 이렇게 말한 거야. ‘구원씨랑 하는데 어떻게 소리를 안 내요······.’ 라고.

    사실 반쯤 장난식으로 시작한 얘기였지만, 천사님의 그런 요망한 반응을 보고나니 나도 조금 진심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손으로 해주는 건?"

    "그, 그래도 안 돼요."

    내 제안에 레이아는 잠깐 주저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그래도 이내 다른 애들이 자고 있는 쪽을 눈짓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저기 다른 분들이 바로 보이잖아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확실히. 거북이굴이 좁다 보니 텐트 같은 것도 못 치고 그냥 모포만 바닥에 깔고 자고 있어서, 눈만 뜨면 바로 들킬 상황이기는 했다.

    쳇. 포기할 수밖에 없나.

    나도 기분 좋아지고, 레이아도 다시 구미호로 변할 수 있어서 일석이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포기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엄청난 아이디어가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라면, 이거라면 진짜로 가능한 거 아닐까?

    물론 우리 애들이 깨버릴 수도 있지만, 깨면 깨는 대로 얼마든지 변명이 가능한 행동이니까.

    "······그러면 이렇게 하면?"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897화 > 끝

    ⓒ CurtainCall#o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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