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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567화 (55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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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사의 본심

    어째서지? 얘가 나랑 단 둘이 있다고 해서 새삼 긴장할만한 애도 아니고.

    응? 아, 여기는 설마….

    그제야 나는 내가 바넷사를 어디로 데려왔는지 깨달았다.

    욕조에서 바넷사와 많은 일이 있었던, 바로 그 빈 방이었다.

    아니. 미리 말해두자면, 절대 의도한 건 아니야.

    다만 내 방에서 가까운 빈 방하면 역시 여기가 제일 먼저 떠오르니까 말이야.

    그냥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이 여길 향한 것뿐이야. 정말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해봤자 바넷사 입장에선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겠지.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취해야할 행동은 바로…그냥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 버리는 거다.

    바로 할 말부터 해버리면 바넷사도 괜한 오해는 안 하고 끝나겠지.

    물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은 있지만.

    "먼저 부탁할 게 있는데, 지금부터 할 말은 다른 사람한텐 비밀이야. 너랑 나만의. 그러니까 비밀로 하겠다고 약속해줘."

    "……! 그건…무슨 뜻입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바넷사가 가볍게 동공을 지진 시키며 되물었다.

    "무슨 뜻이고 자시고. 말 그대로의 뜻이야. 부탁해. 디아나한테도 비밀로 하겠다고 약속해줘."

    "……."

    아무 말도 안 하는 거냐.

    역시 무슨 얘기인지 말도 안 꺼내고 무작정 비밀로 하라고 하는 건 조금 무리수가 심했나?

    하지만 바넷사가 비밀로 하겠다고 약속하지 않는 한, 절대 말할 수 없는 용무였다.

    이 얘기가 다른 애들 귀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하니까.

    때문에 나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넷사가 대답을 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조금 불편한 침묵이 한동안 계속됐다.

    그 사이에 바넷사는 동공을 지진 시키고,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기도 하는 등 평소답지 않게 속마음을 완전히 숨기지 못한 채로 고민하고 있었다.

    아니. 그야 뜬금없는 말이란 자각은 있지만, 어째 생각보다 더 당황하는데?

    얘가 왜 이렇게까지…음? 잠깐만. 아, 으아아! 지금 이 방에서 이런 얘기를 하면 그런 식으로 오해해버리잖아!

    야! 아니야! 그런 얘기 하려는 거 아니야!

    "야. 그게…."

    "…좋습니다."

    "으, 응?"

    나는 당황해서 황급히 변명을 하려 했지만, 하필이면 타이밍 좋게 바넷사가 입을 여는 순간과 정확히 겹치고 말았다.

    "…좋다고…했습니다. 비밀로 해드릴 테니 말해보십시오…."

    당황하는 내게, 바넷사는 아랫입술을 피가 날 듯 꽉 깨물며 결단을 내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잠깐만. 얘는 내가 그렇고 그런 얘기를 할 거라고 생각 하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비밀을 지키겠다고 말했다는 건…아니야. 잠깐 기다려. 이 이상은 위험해. 이 이상 생각해서는 안 돼.

    이 이상 생각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가 없어.

    조,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얼른 용건을 말해버리자.

    굳이 변명할 것도 없이, 용건을 말해버리면 자연히 오해도 풀릴 테니까.

    "펄스…아니. 그러니까 혹시 디아나가 몬스터 허파를 하나 맡기지 않았어?"

    그래. 내 용건이란 건 다름 아닌 펄슨이었다.

    디아나의 손으로 넘어간 펄슨이지만, 그게 뭐 대단한 아이템도 아니니 계속 디아나가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디아나는 팔아버리겠다고 했지만, 어제 오늘 사이에 디아나가 밖에 나가는 걸 본적도 없다.

    그렇다면 결국 결론은 당연히 누군가에게 시켜서 팔아버렸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즉, 바넷사에게 팔라고 넘겼다는 말이다.

    "……네?"

    내 질문을 듣고 나자, 바넷사가 답지 않게 입을 살짝 멍하니 벌리고 날 쳐다봤다.

    하지만 그러고 있었던 건 아주 잠시뿐.

    이내 바넷사는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입을 꽉 다물었다.

    으드득.

    야. 그렇게까지 꽉 다물 필요는 없지 않냐?

    게다가 두 손도 주먹을 불끈 쥐고는 바르르 떨고 있다. 내가 주인님의 낭군님만 아니었으면 당장이라도 쥐어 패버리고 싶다는 듯이.

    게다가 얼굴 표정 역시도, 무표정을 최대한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쪽 눈이 찌푸려지더니, 눈 밑에 애교살까지 생겨나서는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전혀 애교있게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무서웠지만. 대체 누구야. 저 부위에 애교살이라는 명칭을 붙인 놈은.

    "그러니까. 이렇게 따로 불러내서. 비밀이야기라고 그렇게 다짐까지 시켜놓고. 한다는 얘기가. 몬스터 허파 얘기다. 이겁니까?"

    바넷사는 속에서 폭발하는 울분을 꾹꾹 눌러 담듯이,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며 되물었다.

    "으, 응…."

    으드득.

    야, 야. 기분은 잘 알겠는데. 조금 진정하는 게 어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오히려 그런 얘기가 아니라서 다행인 거 아니냐?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말했다가는 진짜로 한 대 맞을 것 같아서 그만뒀다.

    "…아직. 제 방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마치 지옥에서 살고 있는 악마가 이럴까?

    바넷사는 마치 낮게 그르릉 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해줬다.

    "그, 그래. 그거 나 주면 안 될까? 아니. 그게 말이지. 오래 가지고 다니다 보니까 애착이 생겨서. 뭔가 다른 아이템으로 만들어서 써먹으려고."

    "디아나님이…."

    "여기에 있었구먼!"

    바넷사가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디아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내게 건네받았던 목걸이를 쥐고, 어째선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이런 곳에 숨어서…바넷사와 같이 무슨 얘길 한 것인가?"

    그리고 이 방에 나뿐만 아니라 바넷사까지 있다는 걸 확인하더니, 수상하단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게, 바넷사한테 비밀을 지키라고 다짐시키는 동안 내가 좀 바넷사의 얼굴 가까이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오해하는 게 당연한 거다.

    "아니! 디아나! 잠깐! 오해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라니 뭘 말인가? 설마 이 몸이 생각하는 그런 것 말이야."

    "아니! 그러니까 그런 짓 안 했어!"

    "알고 있네."

    "정말이야! 믿어…응?"

    "알고 있다고 했네."

    아예 펄슨 얘기도 꺼낼 생각으로 변명하려 했던 나였지만, 의외로 디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말을 긍정해줬다.

    "이 몸이 그렇게나 다짐시켰는데 자네가 바넷사를 꼬드기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 몸은 자네를 믿네."

    디아나는 내게 전면적인 믿음을 보이면서 그렇게 말했다.

    디, 디아나…. 천사야. 정말로 천사야.

    "게다가 만약 자네가 꼬드긴 거라고 하더라도, 바넷사가 자네한테 넘어갈 리가 없고 말일세. 그렇지 않나. 바넷사?"

    "……네."

    그리고 디아나가 농담조로 그렇게 말하자, 바넷사가 살짝 표정을 흐리며 대답했다.

    역시 이 반응…아까 비밀을 지키겠다고 말했을 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얘 역시…아니야.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면 안 된단 말이야. 저기 천사같이 날 믿어주고 있는 디아나를 보라고. 난 절대 그런 생각을 해선 안 돼.

    "흠. 아무튼 그럼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한 겐가? 굳이 이런 빈 방으로 와서 말일세."

    "아, 그러니까 그건…."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한 거다.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펄슨을 되찾으려 했단 것을 밝히는 한이 있더라도 디아나의 오해를 풀려했던 나였지만, 또 이렇게 오해가 풀리고 나니 펄슨 얘기를 꺼내기 싫어졌다.

    아니. 그도 그럴 게, 디아나가 또 내가 심각한 트라우마라도 앓고 있다고 오해할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니까. 진짜 난 완벽히 정상이니까.

    다만 그냥 말 그대로 펄슨한테 애착이 좀 생긴 거뿐이야.

    자주 쓰던 물건에 애착이 생기는 건 흔한 일이잖아?

    "…레이첼님의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을 때, 먼저 바넷사가 입을 열었다.

    그것도 거짓말을.

    "음? 레이첼양?"

    "네. 오늘 낮에 병문안을 오신 건지 과일바구니를 들고 찾아오셨습니다만, 제가 바구니만 넘기시고 바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의 경과를 구원님께 자세히 전해드리고 있었습니다. 방을 나온 건, 저희의 말소리로 다른 분들이 깨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차례차례 거짓말을 늘어놓는 바넷사.

    내 쪽에는 시선도 주고 있지 않지만, 나는 바넷사가 무슨 의도로 이런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비밀로 하기로 약속했던 걸 지키려고 하고 있는 거다.

    자기가 그렇게 따르지 마지않는 디아나에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분명 디아나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텐데도.

    한 번 내뱉은 말은 무조건 지키겠다는 건가?

    …진짜 집사 주제에 너무 멋있잖아.

    "미안. 디아나. 거짓말이야. 내가 펄슨을 돌려달라고 했어. 얜 내가 비밀로 하라고 다짐해놔서 거짓말하고 있는 거야."

    결국 나는 스스로 디아나에게 그렇게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바넷사 쟤가 저렇게 멋있게 나오는데, 나만 언제까지 멋없게 행동할 수는 없잖아?

    "흠. 펄슨 말인가."

    "그래. 디아나. 그래도 들어봐. 난…."

    "그 얘기는 이 몸과 단둘이서 하는 게 어떻겠나. 조금 진지하게 얘기를 나눠 볼 필요가 있을 것 같구먼."

    자기변호를 하려는 내 말을 끊으면서, 디아나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바넷사."

    "…네."

    "자네도 나중에 이 몸과 조금 얘기를 하도록 하지. 이 몸의 방에서 기다리게."

    "……네."

    디아나의 말을 들은 바넷사는, 얼굴 표정을 흐리면서 짧게 대답하고는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방문을 나섰다.

    "디아나. 잠깐만. 아까 말했다시피 다 내가 억지로 시켜서 그런 거지, 바넷사는 딱히 잘못이…."

    "그 얘기는 이 몸이 알아서 하겠네. 그보다 우선은 자네 얘기일세. 그래. 펄슨이라고?"

    어떻게든 바넷사를 커버해주고 싶었지만, 디아나는 내 말을 가볍게 끊고는 날 빤히 바라보며 화제를 바꿨다.

    "디아나. 들어봐.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진짜로 그냥 같이 가지고 있다 보니 애착이 생겨서 그래. 트라우마 같은 거 전혀 없어. 너도 4계층에서 마을로 돌아가는 내내 내가 멀쩡했던 거 봤잖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디아나는 손을 뻗어서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고는 자기 얼굴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낭군님. 이 몸의 눈을 보고 똑바로 다시 한 번 말해보게. 정말로 아무 문제없는가? 여신님의 사명도 좋지만, 자네의 안전이 우선일세. 이 몸은 철저히 하고 싶네. 사소한 실수로 자네를 잃고 싶지 않네. 그러니 솔직하게 대답해주게. 정말로 괜찮은가?"

    그 진지한 말투에, 나는 다시 한 번 곰곰이 자신의 심리를 생각해봤다.

    확실히 펄슨한테 이상할 정도로 애착이 생긴 건 맞다.

    하지만 그뿐이다. 내가 무슨 펄슨을 되찾았다고 해서 맨날 꺼내놓고 말을 걸 것도 아니고, 그냥 인벤토리에 넣고 다니고 싶을 뿐이다.

    그 외에는 정말로 아무 문제없다. 하물며 던전에서 뭔가 사고가 발생할만한 트라우마 같은 건 전혀.

    전에도 말했다시피, 난 그렇게 섬세한 놈이 아니니까.

    "응. 난 괜찮아."

    "…알겠네. 그 허파는 이 몸이 바넷사에게 다시 돌려주도록 말하겠네."

    내가 진지하게 대답하자, 한동안 내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던 디아나가 안도의 미소를 띠며 그렇게 말해줬다.

    "고마워. 믿어줘서. 그리고 바넷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낭군님."

    "응."

    "그 얘긴 이 몸이 알아서 한다고 했네. 그리고 이 몸의 얘기는 아직 안 끝났네."

    "으, 응? 할 얘기가 또 있어?"

    "음. 애초에 이 몸이 왜 낭군님을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겐가?"

    그, 그러고 보니….

    얘가 무슨 애도 아니고, 자고 일어났더니 내가 안 보인다고 해서 곧장 찾으러 다닐 이유는 없지.

    게다가 이 방은 내 방의 근처. 목걸이도 빛나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야.

    그럼 대체 왜?

    생각해보니 얘 이 방에 처음 왔을 때 숨도 헐떡이고 있었지.

    "이 몸의 머리를…굳이 레이아양의 허벅지 위에 놔두고 간 걸 기억 못하는 겐가?"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디아나가 생각만 해도 열 받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마에 힘줄까지 살짝 띄우면서.

    "일부러 그런 겐가? 이 몸에게 그렇게 굴욕을 주고 싶은 겐가?"

    "잠깐만. 디아나. 잠깐만. 그게 뭐 어때서…레이아 허벅지 폭신폭신 하잖아?"

    "폭신폭신? 폭신폭신? 그래! 위에서 그 폭신폭신한 지방들이 코를 막는 바람에 질식사할 뻔 했네!"

    내 말이 분노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듯, 디아나는 그렇게 폭발하면서 내게 달려들었다.

    "뭔가! 그 지방은! 자랑인가! 자랑으로 밀어붙이는 겐가! 앉아서 조금만 숙여도 가슴이 허벅지에 닿는다고 자랑하는 겐가! 숨은 안 쉬어지지! 자세는 굴욕적이지! 이 몸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는가! 자네는! 이 몸에게! 굴욕을 주는 것이! 그렇게! 좋은가아아!"

    토닥토닥토닥토닥.

    디아나의 연속 때리기가 구원의 몸에 작렬했다!

    구원은 흐뭇해졌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바넷사 얘기 아직 다 끝난 거 아닙니다.

    다음 편에 이어져요.

    닭구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i74 // 전 편에서 비웃는 것처럼 행동한 건 구원이 하렘을 만끽한 상태에서 도와달라고 하는 게 놀리는 것처럼 보여서 화나는데, 화나는 걸 대놓고 티낼 순 없으니 얼버무리려고 콧김을 내뱉은 겁니다.

    멱살 잡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넷사가 최우선시 하는 건 여전히 디아나입니다.

    게다가 구원한테 감정이 생기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 반동으로 더 디아나를 위해 행동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까지 사로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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