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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의 고민
지금까지는 내가 성자라는 지위를 되도록 이용해먹으려고 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신의 존재가 명확하게 밝혀져 있더라도, 내가 그 사자라는 역할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마음이란 건 모르는 거다.
내가 성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하고 싶은 대로 막 하고 다녔으면, 분명 그걸 안 좋게 생각하는 무리들도 생겨났을 거다.
괜한 소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성자라는 지위를 이용하는 건 자제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여신님과의 계약이란 게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으니 일단 던전을 탐험하고 있기는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우리 애들이랑 같이 평화롭게 살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놈이니까.
내가 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의외로 그런 부분은 제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씀.
애초에 내가 교황님께 여신님의 사자라는 걸 인정받은 것도, 내가 함부로 그 지위를 이용할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강제로 떨어지게 될 일이 생겼을 때까지도 자제하자면서 가만히 있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성자의 지위는 물론 디아나의 힘도, 뭣하면 펠리시아한테 고개를 숙이는 일이 있더라도 왕가의 힘까지 등에 업은 후 깽판을 칠 각오가 있었다.
물론 마틸다가 나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런 의미를 담아서 강한 어조로 마틸다에게 말을 했던 나였지만, 마틸다는 어째선지 욱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라? 지금은 감동받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안심해야 정상인 타이밍 아니야? 왜 저런 표정을….
"그런 게…! 그런 문제만이 아니란 말이에요!"
"무슨 말이야. 혼자 고민하지 말고 제대로 말로 해줘. 그렇게 혼자 끌어안고 있으면 알 수가 없잖아."
그런 문제만이 아니라니.
그밖에 다른 문제도 있단 말이야?
"하지만! 하지만 만약 저주에 풀린 제가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마틸다는 그렇게 말하면서 두 주먹을 내 가슴 위에 얹고는 콩콩 두드리며 외쳤다.
그 불안에 가득 찬 얼굴을 보고, 나는 마틸다가 왜 이렇게 불안해했는지 깨달았다.
그래. 마틸다는 단순히 저주가 풀리면 교황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때문에 불안해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아까 전 반응을 생각해봤을 때 그런 이유도 분명 있었겠지만, 그 이외에도 저주를 풀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었던 거다.
즉, 마틸다 역시도 불안했던 거다.
내가 마틸다가 날 사랑하는 지금의 감정이 저주에 의한 것인지 마틸다 본인의 진심인 건지 의심한 것처럼, 마틸다 역시도 자신이 느끼고 있는 그 감정이 정말로 저주에 의한 것이면 어떤 건지 불안했던 거다.
전에는 자신의 본심이라고 확실히 말했던 마틸다였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게 계속 그렇게 강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내가 계속 이렇게 저주가 풀릴 때까지 마틸다를 받아주지 않고 보류하는 상황에서, 마틸다도 계속 자신의 마음에 확신을 가지기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전 당신을 정말로 좋아해요. 계속 곁에 있고 싶어요. 하지만 저주에 풀린 제가 지금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당신은 절 교황청으로 보내겠죠? 그 이후로는 다시 이렇게 만날 일도 없어지겠죠?! 그러면 전 제가 정말로 당신을 좋아했던 건지 확인할 방법도…!"
과연. 확실히. 저주가 풀리면 많은 것들이 변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만, 확실히 뭔가 변하긴 변할 거다.
아마 마틸다는 핑크빛 모드가 되는 일은 없어지겠지.
그래도 내게 호감은 남아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변해버린 마틸다의 태도를 보고,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거다.
마틸다의 고민은 단순히 교황청에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든가, 자신의 감정이 저주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든가, 그런 차원을 넘어서 불확실한 미래 그 자체에 있었다.
확실히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해결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마틸다를 보면서, 나는 확실히 마틸다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미안해. 마틸다. 지금까지 알아주지 못해서. 내가 확실히 하지 못해서."
솔직히 지금까지 마틸다를 확실히 받아주지 않은 건, 전부 마틸다를 위해서 그런 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저주가 풀리고 나에 대한 감정이 싹 사라져버렸는데 나와 이미 그렇고 그런 관계라고 생각해봐라.
게다가 만약 몸에 사도 인장까지 새겨져있다면?
한 번 새긴 사도 인장은 결코 지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물론 눈에 안 보이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없어지는 게 아니다.
즉, 내게 사랑을 느끼지 않는 마틸다가, 내 거라는 표식을 영원히 몸에 달고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마틸다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면서 자제하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마틸다가 이렇게 불안해하는 걸 보고도 계속 그렇게 판단을 보류하고 있을 정도로 나는 물러터진 놈이 아니었다.
이래 봬도 할 때는 하는 놈이라고. 결단을 내려주겠어.
"아…. 다, 당신…."
나는 마틸다의 턱에 손을 얹고, 살며시 그 입술에 입을 맞췄다.
핑크빛 모드가 발동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틸다는 핑크빛 모드로 변하지 않았다.
단지 내 지금 행동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떨리는 눈동자로 날 쳐다볼 뿐이었다.
설마 키스를 해도 핑크빛 모드로 변하지 않다니. 설마 저주에 뭔가 변화가 생긴 건가? 아니면 지금까지 나와 해제 작업을 하면서 저주가 조금 약해진 건가?
뭐,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닌가.
"마틸다. 지금부터 넌 내 여자야. 지금부터 쭉, 저주가 풀린 이후로도 넌 계속 내 여자야."
가벼운 키스를 마친 후, 나는 그렇게 속삭였다.
마틸다 입장에선 갑자기 말을 바꾸는 내가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계속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하며 불안해하느니, 차라리 확실한 미래를 가지는 편이 더 안정될 거라고 나는 판단했다.
그래. 계속 내 곁에서 내 여자로 있을 거라고 하는 확실한 미래를 말이다.
"하, 하지만 당신…당신 분명 제 지금 감정이 저주에 의한…."
"지금 네 감정이 네 진심이든, 저주에 의한 것이든 상관없어. 난 이기적인 놈이니까 말이야. 좋아하는 사람은 전부 곁에 두고 싶어. 만약 저주가 풀리고 네가 날 좋아하지 않게 되더라도 상관없어. 다시 날 좋아하게 만들면 그만이야. 이래 봬도 성자님이니까.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도 못 훔쳐서야 뭐가 성자겠어. 그러니까 이제 불안해할 거 없어."
스스로 생각해도 약간, 아니. 상당히 제멋대로인 발언이다.
하지만 이미 정한 거다. 나는 더 이상 쓸데없는 고민을 하지 않고, 결심한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확실치 않은 미래의 일로 고민하느니, 이렇게 행동하는 게 나답기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명 마틸다고 그걸 원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넌 그냥 대답만 하면 돼. 말해. 마틸다. 내 여자가 되겠다고."
"다, 당신…네에…. 네엣…!"
내 예상대로, 내 제멋대로인 발언을 듣고도 마틸다는 감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가지고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었다니.
"당신…당시인…사랑해요…정말로…진심으로오…."
눈가에서 한 줄기 눈물을 흘리면서, 마틸다는 핑크빛 모드로 들어가 두 손으로 내 뺨을 끌어안고는 몇 번이고 내 입술에 입을 맞춰왔다.
"그래. 나도야. 지금부터 그 증거를 보여줄게."
그렇게 말하고 나는 마틸다의 허리를 안아 들어서, 그대로 침대로 다가갔다.
나 스스로 결심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사도 인장을 새기겠어.
잠깐 우리 애들에게 허락을 안 받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지.
마틸다와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 오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관계가 진전될 거라곤 생각을 안 하고 있었으니까 미처 우리 애들한테 허락을 받을 생각을 못했다.
하지만 그제 레이첼 누님과의 관계를 허락 받았을 때를 생각해보면, 우리 애들도 마틸다를 받아들이는 건 이미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던 모양이고.
딱 이번만큼은 사후 보고를 해도 괜찮겠지?
그렇게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나는 마틸다의 몸을 살며시 침대 위로 내렸다.
사도 인장을 새기기 위해서는 우선 안에 사정을 할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다.
"아…. 당신…."
침대 위에 눕게 되자, 마틸다가 살짝 불안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방금 전 대화를 통해서 불안을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주를 푸는 행위에 조금 두려움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만 핑크빛 모드가 살짝살짝 풀리는 것 같네. 저주랑 뭔가 관계가 있는 건가?
"괜찮아. 내 결심이 흔들리지 않는 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행위니까."
하지만 난 그런 마틸다를 내려다보며, 안심시키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해줬다.
사도 인장을 새긴다는 건, 이른바 낙인을 찍는 거나 마찬가지인 행위다. 이 여자는 앞으로 계속 내 여자라고 말이다.
게임 상에선 호감도가 최대에 이르면 찍을 수 있는 사도의 인장이지만, 실은 이 사도의 인장. 딱히 구속력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게임 같으면 호감도가 최대에 이른 npc에게 쓸 수 있는 스킬이라고 하면 당연히 호감도가 최대로 고정되는 부가 기능도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여신님이 관련 되어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그레이트 어스사의 게임들은 그런 호감도가 최대치로 고정되는 기능 같은 게 전혀 없었다.
덕분에 원래 있던 세계에서는 편리한 시스템을 일부러 넣지 않아서 쓸데없이 난이도를 올린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강제로 감정을 고정시키는 건 여신님의 사상에 반하기 때문에 일부러 넣지 않은 기능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런 고로, 사도 임명을 하더라도 나에 대한 사랑은 언제든지 식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한 번 새긴 인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사랑이 식으면 인장에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데, 인장이 둘로 쪼개져 보이게 되는 거다.
사랑이 식으면 상대방의 세부 능력치를 알 수 있게 되는 사도 임명 고유의 능력도 사라지기 때문에, 게임 상에서 호감도가 떨어졌다는 걸 알 수 있는 건 호감도 확인용 특수 아이템을 사용하거나, 인장을 통해 확인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인장이 쪼개지면 다시 한 번 호감도를 올려서 인장의 모양이 정상으로 돌아오게 만든다.
게임에선 편리한 기능이었지만, 그게 현실이 된다면 그야말로 낙인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 애들 셋은 나에 대한 사랑이 식을 리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만에 하나 식게 된다고 하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사랑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인장을 썼었다.
하지만 마틸다는 저주가 풀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까지 줄곧 사도 인장을 쓸 생각을 안 하고 고민하고 있었던 거다.
저주 때문에 사도 인장을 새기는데 성공하더라도, 저주가 풀리고 인장이 쪼개져버리면 마틸다는 본의가 아니게 낙인이 찍혀버리게 되는 거니까.
하지만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둔 상태로, 나는 지금부터 마틸다의 몸에 사도 인장을 새긴다.
이건 나 자신과의 약속이자 다짐이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만약 마틸다가 저주에 풀린 후 나에 대한 감정이 식는다고 하더라도, 아까 말했던 것처럼 반드시 날 다시 사랑하게 만들고 말겠다는 나 자신에게 하는 맹세.
"당신…."
그런 내 각오를 느낀 건지, 마틸다는 저주를 푸는 행위라는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내 목에 팔을 둘러서 끌어안았다.
그 몽롱한 눈빛은 다시 마틸다가 핑크빛 모드로 변했다는 걸 의미했다.
평소엔 쉬도 때도 없이 핑크빛 모드로 변하는 마틸다를 다루는데 애먹는 나였지만, 지금은 그런 마틸다를 바라보며 안도의 마음부터 생겨났다.
핑크빛 모드가 풀리는 원인이, 마틸다가 부정적인 감정을 품었을 때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나왔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핑크빛 모드가 된다는 건, 적어도 지금은 불안함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느끼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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