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484화 (468/1,205)
  • 484====================

    후폭풍

    디아나가 내 위에서 비켜난 후, 나 역시 몸을 일으켜서 침대에서 내려가려고 했다.

    "…사라야?"

    "뭐, 뭐야?"

    "정말로 유아퇴행 안 했지?"

    "아, 안 했거든?!"

    그러면서도 끝내 내 팔을 붙잡고 놓지 않는 사라였다.

    …하아. 어쩔 수 없나.

    아무래도 오늘도 사라를 떼어놓기는 힘들 것 같았다.

    뭐,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사라는 원래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살았었다.

    그리고 그런 할아버지를 잃었을 때, 사라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거다.

    어디있는지도 모를 촌구석에서 홀로 여기까지 복수를 하러 올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현재는 내가 사라에게 있어서 예전 할아버지와 비슷한 위치일 거다.

    그 왜, 결혼하면 가족이잖아?

    솔직히 식만 안 올렸다 뿐이지, 나랑 얘들이 하는 짓을 보면 거의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니까.

    그러니까 유일한 가족이라는 의미에서, 할아버지와 비슷한 위치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건 내가 멋대로 하는 추측이지만, 할아버지에 이어서 나도 정신적인 지주로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아마도 그럴 지도 모른 다는 얘기지만.

    아무튼 그렇게 소중한 존재를 또 잃을 뻔 한 거다.

    할아버지의 죽음이 기억나기도 했을 테니, 사라가 이러는 건 충분히 이해가 됐다.

    그러니 난 사라를 떼어놓는 걸 깔끔히 포기하기로 했다.

    애초에 굳이 떼어놓고 싶을 정도로 싫은 것도 아니고 말이다.

    아니. 싫기는커녕 오히려 좋다.

    사라 같은 애가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데 기분 좋지 않은 남자가 있을 리가 없지.

    심지어 평소 쿨하기 때문에 갭까지 느껴져서 더 귀엽게 느껴지는 효과도 생겼고.

    "…갈까."

    "안 떼어놓고 그대로 가는 겐가?!"

    "어쩔 수 없잖아?"

    "으으으으음…."

    디아나는 사라가 할아버지를 잃었다거나 하는 자세한 내막은 모를 테니 사라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겠지.

    하지만 그래도 역시 우리의 마음씨 좋은 할머…최고 연장자.

    디아나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 질투하지 않고 그대로 넘어가줬다.

    "후훗. 사라씨도 참."

    물론 마음씨 좋게 이해하고 넘어가준 건 레이아도 마찬가지였다.

    레이아는 대신 반대쪽 팔에 달라붙어서는 가슴을 밀어붙였지만 말이다.

    "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좋은 아침이에요. 모두 같이 계셨군요."

    방문을 열고 나가자, 실비아와 마틸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를 해왔다.

    아니. 기다렸다는 듯이가 아니라, 실제로 기다린 거다.

    얘들 역시도 같이 잤던 셋과 마찬가지로 내 상태를 걱정했을 테니까 말이다.

    "좋은 아침. 응. 뭐, 어쩌다보니."

    사실 우리 셋은 공인된 사이.

    실비아와 마틸다는 그럴 마음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정확히 관계를 정립하지 않은 사이.

    그러니까 셋과만 같이 잔 건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이지만, 나는 공연히 미안해졌다.

    실비아는 부럽단 표정으로, 마틸다는 살짝 씁쓸한 표정으로 우리 모습을 보고 있어서 더욱더.

    일순 씁쓸한 표정을 지었던 마틸다였지만, 이내 다시 오만한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날 내려다보듯이 천천히 내 얼굴을 바라봤다.

    뭐, 키는 내가 훨씬 크지만.

    "얼굴색은 좋아 보이네요."

    안색 살핀 거였냐! 헷갈리잖아! 좀 더 걱정스런 표정으로 쳐다보라고!

    그러고 보니 얘, 어제부터 쭉 핑크빛 모드가 발동을 안 하는데.

    원래 이렇게 지근거리에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거의 무조건 발동했는데 말이야.

    …고장났나? 아니. 방금 건 표현이 좀 안 좋았다.

    저주의 영향력이 약해진 건가? 라고 말하고 싶었어. 응.

    아무튼 그런 거라면 오히려 여러모로 잘 된 거다.

    어디 한 번 실험해볼까?

    "그러는 넌 여전히 좀 초췌해보이네. 모처럼 예쁜 얼굴인데 아깝잖아. 뭐라도 먹고 좀 더 푹 쉴 필요가 있겠어."

    "예, 예쁜…당시인…."

    응. 전혀 약해진 게 아니었다.

    그냥 내가 너무 걱정되는 바람에 핑크빛 모드가 발동될 틈이 없었던 것뿐인 모양이다.

    그건 그거대로 좀 기쁜 일이지만 말이다.

    마틸다가 저주에 관계없이 날 좋아한다는 게 정말일 가능성이 올라가는 거니까.

    아무튼 식당에 내려와서 식사를 하려고 하니, 마법사 협회의 누님들이 총출동해있었다.

    마법사 협회의 수뇌진이 총출동해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 따로 없었다.

    아니. 난 저택에서 자주 보지만 말이야.

    저택에선 누님들도 이렇게 제대로 차려입고 있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주변의 모험가들이 기가 눌린 듯 쳐다보고 있으니 더욱더 눈에 띄었다.

    4계층에 다니는, 심지어 4계층의 마을까지 온 모험가들은 수많은 모험가들 중에서도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그야말로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을 사람들이지만, 과연 상대가 마법사 협회의 수뇌부 전원이라면 기가 눌릴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디아나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리고 덤…이 아니지. 오히려 이쪽이 본체구나.

    여기엔 지고의 대마법사님도 계시니까.

    그러고 보니 디아나는 로브는 두르고 있었지만, 후드까진 뒤집어쓰고 있지 않았다.

    하긴. 마법사 협회의 수뇌들을 전부 모아서 소동을 피운 거다.

    디아나의 정체가 안 들킬 리가 없었다는 건가.

    이거 디아나가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이 희생한 모양이네.

    "누님들. 제 구조를 위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셨다고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나는 디아나의 머리에 손을 얹어서 한 번 쓰다듬어주고, 누님들께 감사 인사를 했다.

    "뭘. 디아나님의 부탁이니 당연한 것이네."

    …거긴 좀 걱정했다고 말씀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니면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라든가.

    그동안 꽤나 친해지긴 했지만, 역시나 나 따위보단 디아나가 최우선인 누님들이었다.

    아무튼 마법사 협회의 누님들까지 포함해서 다 같이 식사를 하고, 우리는 곧장 지상을 향해 올라가기로 했다.

    가는 도중 본 4계층의 알림판에는 내 구조가 완료됐다는 글이 붙어있었다.

    3계층에서도 그랬지만, 모험가 구조 의뢰는 안내판에 붙여서 그 계층 모험가 전체에게 부탁하는 만큼, 구조가 완료됐다는 사실 역시 이렇게 알리는 거다.

    모험가들이 쓸데없이 구조에 힘쓰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안내판에 내 얼굴 그림이 달린 글이 올라와있으니 뭔가 미묘한 기분이었다.

    특히 구조 관련 글로 붙어있으니 더욱더.

    …응?

    "저기 저건 뭐야? 떼어가지 마시오? 저런 걸 누가 떼어간다고 저런 주의 사항을…."

    "구, 구원은 몰라도 돼."

    내가 의아해하자, 사라가 황급히 내 팔을 끌었다.

    참고로 사라 얘, 아직도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 물론 식사할 때도 계속.

    "아니. 몰라도 된다니. 그게 무슨…."

    "구원씨. 텔레포트 마법진은 저쪽이에요."

    아, 네. 천사님. 저 특유의 빛의 기둥이 보이니까 그건 아는데요.

    "자, 자! 빨리 가게! 저택에서 푹 쉬어야하지 않겠나!"

    결국 진상은 알지 못한 채, 나는 떠밀리듯 텔레포트 마법진을 통해 지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길드 앞에는 이미 바넷사가 마차 째로 대기하고 있었다.

    사실 그동안 캐낸 마석도 엄청나게 많으니, 정산할 동안 레이첼 누님과 차분히 얘기를 나눌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이렇게까지 귀가할 준비가 철저히 되어있으니, 레이첼 누님과 느긋하게 얘기는 하지 못했다.

    게다가 내 한쪽 팔에는 사라도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었고.

    "누님. 이번에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뇨. 그런. 제가 발견하지 않았더라도 구원씨는 분명 알아서 마을까지 오셨을 거예요. 어차피 바로 근처였고요."

    "아뇨. 아뇨. 그런. 겸손하실 거 없어요. 누님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제가 꼭 보답으로 식사라도 대접해드릴게요."

    때문에 난 그런 식으로 누님만 알아들을 수 있게 메시지를 보냈다.

    또 한 번의 식사 대접. 하지만 이번에는 저번과는 꽤나 느낌이 다를 거라는 걸 암시하듯 강한 눈빛을 보내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요. 기대 안 하고 기다릴게요."

    하지만 누님은 내 눈빛의 의미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그렇게만 말할 뿐이었다.

    결국 마석 정산은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아서 하지 않고, 그렇게 간단히 감사 인사만을 전한 후 나는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내가 옆에 있는데 식사대접이니 뭐니 하면서 다른 여자를 꼬드기다니."

    "생명의 은인인데 그 정도는 당연하잖아."

    감이 좋은 사라는 뭔가 걸린다는 듯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아직 그렇게 얼버무렸다.

    물론 레이첼 누님께 식사 대접을 하기 전까지는 우리 애들한테 승낙을 받아낼 생각이지만, 우선은 그 전에 할 일이 많았으니까.

    "다녀오셨습니까. 구원님."

    그리고 저택에 도착하자, 마차를 대는 건 다른 메이드한테 맡긴 바넷사가 저택의 현관문을 열면서 내게 깊숙이 인사를 했다.

    물론 바넷사가 내게 다녀왔냐고 인사를 하는 건 처음이 아니었지만, 디아나가 옆에 있는데도 내 이름까지 부르면서 이렇게 인사를 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게 바로 바넷사 나름의, 내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인사인가 보다.

    "그래. 다녀왔어."

    평소에 뭔가 내 취급만 좀 이상하다곤 해도, 역시 얘도 날 위하는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닌 모양이야.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바넷사의 인사를 받아줬다.

    내가 인사를 받아주고 나서야, 바넷사는 숙이고 있던 허리를 천천히 폈다.

    지금 고개를 들 때, 바넷사 눈빛이 한 순간 날카로워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그럼 자네는 오늘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게 알겠는가?"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디아나가 날 쳐다보고 허리에 손을 척 올린 채 그렇게 명령했다.

    저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내게 거부권은 없는 모양이다.

    "네. 디아나 누님. 아, 근데  누님. 질문이 있습니다."

    "음. 뭔가."

    "노는 건 쉬는 것에 포함 됩니…푹 쉬겠습니다."

    "음."

    내 질문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던 디아나는, 내가 순순히 쉬겠다고 말하자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점심시간도 안 됐는데 말이야.

    침대에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 오히려 더 몸이 근질근질할 것 같은데.

    "그럼 난 내 방에…."

    "잠깐 기다리게."

    "응?"

    "사라양. 자네는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인가?"

    날 불러 세운 후, 디아나가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이 사라를 보고 한 마디 했다.

    "뭐, 뭐가요?"

    "뭐가요가 아닐세. 아침부터 식사를 할 때도, 마차를 타고도 쭈욱 계속 그러고 있지 않나. 조금 그러다가 그만할 거라 생각하고 가만히 놔뒀네만…. 이 몸도  달라붙어있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는 걸세. 지금은 이 자를 푹 쉬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안는 겐가?"

    "하, 하지만…."

    "하지만이 아닐세. 이제 그쯤해도 되지 않나. 자네. 자네도 뭔가 말 하는 게 어떤가?"

    "아니. 그게 말이야."

    아마 지금 강제로 떼려고 하면 사라 얘 패닉 상태에 빠질 거 같은데.

    지금은 이렇게 놔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사라였지만, 이러는 걸 보면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니까.

    "음?"

    어쩔 수 없지.

    내가 사라의 할아버지에 관하 우여곡절까지 다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차라리 실제로 사라가 어떻게 반응할지 보여주는 편이 빠르겠다.

    나는 사라가 방심한 틈을 노려서 황급히 팔을 빼내고, 사라에게서 멀리 떨어지기 위해 전력질주 했다.

    "아, 안 돼애애애! 구워어어언! 가지 마아아!"

    그러자 잠깐 멍한 표정을 짓던 사라가, 곧바로 울먹이면서 내게 달라붙어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내 몸에 얼굴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흐그윽…구워어언…구워어언…. 왜애…왜 떨어지려고 해애…?"

    "…봤지."

    나는 거 보라는 표정으로 그러게 말했다.

    솔직히 사라의 반응이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컸던지라 나도 내심 깜짝 놀랐지만 말이다.

    어느 정도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정도일 줄이야.

    사라야. 유아퇴행 아니라면서.

    소중한 사람을 또 잃을 뻔한 경험은 아무래도 꽤나 심각하게 사라의 마음에 상처를 준 모양이다.

    "이, 이게 무슨…."

    "뭐, 지금은 조금 봐주자고. 아마 조금 지나면 사라도 안정될 테니까."

    "그, 그런가…."

    디아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사라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그냥 디아나도 레이아도 같이 있자."

    "음? 하지만 자네는 쉬어야…."

    "방금 전까지 푹 자다 온 건데, 쉰다고 해봤자 어차피 바로 잘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괜찮잖아. 디아나도 내 얼굴 보고 있고 싶지 않아?"

    "그, 그거야…."

    "레이아도 그렇지?"

    "네! 물론이에요!"

    "결정됐네. 오늘은 다 같이 느긋하게 같이 보내자고."

    "으, 으음…."

    연장자로서 일부러 그렇게 행동했던 것뿐이지, 디아나 역시도 내게 어리광 부리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우리는 결국 오늘 하루는 그렇게 다 같이 보내기로 했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