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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479화 (463/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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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일보

    표류 1일째.

    혼자 남겨진 불안감은 있었지만, 의외로 혼자 하는 던전 탐험은 할만 했다.

    주의할 점은 두 가지.

    우선 상대하기 곤란한 식물형 몬스터들이 자리 잡고 있는 땅이나 벽 쪽으론 가지 않을 것.

    그리고 디아나에게 마나 충전을 받을 수 없는 만큼 마나 관리에 더 신경을 쓸 것.

    그 두 가지만 조심한다면, 몬스터들을 상대하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그야 물론 4계층 몬스터들이 상대인 만큼 가끔 내 방어력을 뚫고 데미지가 들어오는 적들도 있었고, 성자 스킬에 쉽게 뻗지 않는 적들도 있었다.

    다만 그런 적들은 대게 몸집이 커다랗고 혼자서 다니는 몬스터였기에, 장기전으로 몰고 가면 결국에는 내 생명력이 바닥나는 것보다 적이 복상사하는 속도가 빨랐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전투 방식을 고수하기 위해선 생명력을 일정이상 유지하는 게 관건이었다.

    때문에 전투가 끝나면 생명력이 회복될 때까지 은신 상태로 가만히 숨고, 생명력이 완전히 회복되고 나면 그제야 다시 이동을 했다.

    안 그래도 혼자서 몬스터들을 처치하며 이동하느라 속도가 느린 와중에 이렇게까지 하니 더 속도가 느려지게 됐지만, 그래도 목숨이 위험한 것보다는 훨씬 낫다.

    스스로의 목숨이 아까운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가 죽으면 우리 애들이 엄청 슬퍼할 테니까.

    내가 우리 애들 상대로 장난치고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울릴 수는 없지.

    표류 2일째.

    눈을 떠보고 맵을 확인하니, 자는 사이 원래 잠을 자던 곳에서 상당히 먼 곳까지 이동된 상태였다.

    그것도 내가 향하던 방향과 반대쪽으로.

    아니. 그게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잠은 자야할 거 아냐?

    그래서 잤단 말이지. 몬스터가 습격하면 그냥 한 대 맞은 다음에 깨어나서 싸우겠단 생각으로 말이야.

    그래서 그냥 은신술만 쓰고 잠을 잤는데, 이게 또 의외로 잘 먹혀든 모양인지 자는 동안 한 번도 습격을 안 받았다.

    은신술의 스킬 레벨이 상대의 레벨에 비해 많이 부족하더라도, 은신술을 쓰고 이렇게 움직임까지 전혀 없으면 들킬 확률이 대폭 줄어든다는 건가.

    좋은 걸 깨달았다. 초월종 같이 상대하기 귀찮은 녀석이 나타나면 써먹자.

    다만, 그걸 깨달은 대가로 이렇게 멀리 떠내려 올 동안 전혀 눈치를 못 챘지만.

    원래는 어딘가에 몸을 고정시킬 생각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몸을 고정시키려면 어딘가의 지형에 몸을 묶어야 된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괜히 지표면에 다가갔다가 식물형 몬스터에게 붙들리기라도 하는 날에는…같은 생각이 드니 도저히 지표면 근처에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이렇게 자는 동안 떠밀려가는 게, 식물형 몬스터에게 붙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다.

    어제 그렇게 노력해서 지나갔던 길을 또 다시 지나가야한다는 생각이 드니 조금 우울해졌지만, 어쩔 수 없지. 갈까.

    표류 3일째.

    풍경이 전혀 안 변한다는 건, 의외로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구나.

    아니. 맵을 보는 한 조금씩 조금씩 확실히 나아가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전혀 변하지 않는 거다. 풍경이.

    앞을 봐도 물. 뒤를 봐도 물. 양옆을 봐도 물. 위아래를 봐도 물. 물물물물. 지겨워 죽겠다.

    특히 나는 식물형 몬스터를 경계해서 지표면에 다가가지 않고 있는 만큼, 더욱 풍경에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살면서 심해 공포증이라는 걸 느껴 본적은 없었지만, 이쯤 되니 슬슬 심해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가 됐다.

    아니. 난 아직 엄청 멀쩡하지만 말이야.

    표류 4일째.

    변화가 필요하다.

    아니. 그게 아니라면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라도.

    수영하며 지나가다가 몬스터를 만나면 성자 스킬로 죽이고, 다시 수영을 하고.

    너무 지겹다. 지겨워 죽겠다.

    난 원래 게임에서 반복 노가다를 할 때도 이런 기분은 안 들었는데.

    성자 스킬로 아무리 몬스터를 잡아봤자 성자 레벨은 오르지도 않다보니, 노가다를 하는 기분마저 들지 않았다. 최악이다.

    적어도 무투가 레벨이나 암살자 레벨이라도 오른다면 성취감이라도 있을 텐데.

    안 그래도 난 우리 애들에 비해 전투직 레벨이 부족하기도 하니까, 이건 수행의 일환이라고 자기암시라도 걸 수 있고 말이다.

    하지만 내 무투가 레벨이나 암살자 레벨은 여기 몬스터들을 잡기에 너무도 부족했다.

    레벨도 꽤나 높으면서 체력도 방어력도 형편없는 펭귄이 그런 점에선 참 좋았는데 말이야.

    하아…일단 계속 가볼까.

    표류 5일째.

    아무래도 안 되겠다.

    뭔가가 필요해. 뭔가 집중할 수 있는 게.

    그래. 방어력을 믿고 그냥 무투가 스킬만 남발해볼까?

    아무리 데미지가 약하게 들어가더라도, 결국 잡을 수 있긴 있을 거 아니야?

    숟가락 살인마 같은 얘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

    좋아. 결정했다. 다음에 만나는 녀석은 무조건 때려잡는다.

    누가 이기는지 똑똑히 보여줄…잠깐. 아무리 그래도 범고래는 아니잖아. 범고래는.

    왜 하필 튀어나와도 저런 녀석이 튀어나오는 거야.

    에에잇! 저 녀석 다음에 나오는 놈은 반드시!

    표류 6일째.

    크하하하! 피라니아다! 피라니아! 그래! 저런 녀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어디 내 불 주먹 맛을 쬐끔만 맛 보거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기긴 이겼다.

    게다가 피라니아의 공격은 생명력이 깎일 수준도 아니어서, 육체적 피해는 전혀 없었다.

    다만. 성자 스킬이면 그냥 픽픽 죽어나갈 놈들 상대로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싸운 건지를 생각해보면 정신적인 피해가…크흑.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한시라도 빨리 마을로 돌아가서 우리 애들을 안심시켜줘야 할 때에.

    오랜 싸움의 도중에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마지막 남은 피나리아 한 마리에게 성자의 손길을 두른 주먹을 날렸다.

    다만 방금 전까지 무투가 스킬로만 싸운 덕분에, 그만 쓸데없이 무투가 스킬을 사용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쳇. 마나 아깝게…어?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분명 마지막 녀석은 복상사로 죽었는데…무투가의 경험치가 올랐어?

    이건 설마…레벨 시스템의 허점인가?!

    이건 확인할 필요가 있어! 절대로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나는 표류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몬스터들의 찾아다니며 검증을 해봤다.

    우선은 성자 스킬로 거의 다 죽여 놓고, 마무리만 성자의 손길을 두른 채 무투가 스킬로.

    무투가의 경험치가 오르긴 올랐다. 다만 잡은 몬스터의 수준을 생각해보면 오른 양은 확실히 적었다.

    이런 꼼수까짖는 안 통한다는 건가. 그렇다면….

    다음 실험은 성자의 손길을 두른 채로 무투가 스킬을 연타하며 상대를 복상사시키는 것.

    그러자 이번엔 확실히 몬스터 수준에 걸 맞는 경험치를 얻을 수 있었다.

    이거라면, 이거라면 무투가 레벨도 암살자 레벨도 급속도로 올릴 수 있어!

    원래 나는 성자 스킬을 쓸 때도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사용해서 써왔지만, 그동안은 무투가 레벨이 거의 오르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렇게 스킬을 겸용하자, 갑자기 경험치를 고스란히 무투가 직업이 얻게 된 거다.

    이건 명백하게 시스템의 허점이었다.

    게임을 하면서도 이렇게 버그 같은 걸 발견한 적은 없었는데, 설마 다른 세계에 날아와서 이런 시스템의 허점을 발견하게 될 줄이야.

    그래. 난 성자 스킬로 몬스터를 잡는데, 나 혼자 직업 레벨이 잘 안 오르는 게 그동안 은근히 억울했어.

    이걸로…잠깐. 성자? 이거 혹시….

    새로운 발견에 기뻐했던 나지만, 또 한 가지 검증할 것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이건, 시스템의 허점 같은 게 아닐지도 몰라.

    그런 가능성이 생각났던 거다.

    다음은 무투가 스킬과 암살자 스킬을 혼용해서 몬스터를 잡아볼 필요가 있겠어.

    표류 7일째.

    전 날에는 피라니아 떼를 만나지 못해 할 수 없었던 마지막 실험.

    피라니아 떼를 만나자 마자, 나는 일단 성자 스킬로 한 마리만 남기고 다 해치운 다음 곧바로 실험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결과, 원래 피라니아가 줄 경험치가 무투가와 암살자에게 각각 일정 비율씩 나눠져 들어간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5 대 5 비율로 경험치가 들어온 것도 아니다.

    대략 8 대 2. 아마 무투가 스킬과 암살자 스킬이 각각 피라니아에게 데미지를 준 비율일 거다.

    이 결과가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성자 스킬과 다른 직업의 스킬을 겸용해서 몬스터를 잡으면 다른 직업에 경험치가 몰리는 건 시스템의 허점이 아니다.

    그냥 성자 레벨은 그런 걸로 경험치가 오르지 않으니, 다른 직업이 전부 가져가는 것뿐이다.

    즉, 아마도 여신님이 성자의 성장이 쉽도록 배려해서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난 그것도 모른 채, 지금까지 강적을 만날 때마다 직업 레벨을 올릴 수 있는 경험치를 전부 버리면서 싸워왔던 거고.

    젠장! 이건, 이건 너무하잖아!

    여신님! 적어도 전에 만났을 때 제일 처음 얘기해야 했던 게 이 얘기 아니었어요?!

    왜 공적 치하 같은 걸 우선시하신 거예요!

    그렇다고 뭔가 상을 준 것도 아니고, 그냥 잘했다고 칭찬한 게 전부잖아요!

    나는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여신이 진짜 흑막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강하게 들었다.

    …뭐, 완전히 애먼 데에 화풀이하는 격이지만.

    애초에 성자 스킬과 다른 직업의 스킬을 병용해서 싸운 건 딱히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제야 눈치 채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는 얘기다.

    대체 왜 그동안 눈치를 못 챈 건가.

    역시 그건가. 우리 애들이랑 있다 보니, 아무래도 이렇게 꼼꼼히 경험치 체크 같은 걸 하기보다는 우리 애들의 상태 확인 같은 걸 우선시했기 때문인가.

    즉, 이렇게 혼자가 됐기 때문에 이런 것도 눈치 챌 수 있었다는 거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표류 생활도 의외로 나쁘지 않…을 리가 있겠냐!

    아아. 젠장. 안 돼. 우울해지지 말자. 이런 상황에서 우울해지기까지 하면 진짜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긍정적 마인드. 긍정적 마인드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래. 나 그런 거 잘 하잖아?

    때와 장소 구분 못하고 장난치거나 노는 거.

    물론 그것도 상대가 있어야 가능…아니. 그러니까 긍정적인 마인드!

    그래. 지금이라도 이런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게 어디야.

    좋아. 지금부턴 적어도 직업 레벨을 올리는 재미라도 생기겠어!

    …라고 생각했던 때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표류 18일째.

    직업 레벨 노가다고 나발이고. 사람을 보고 싶다.

    아니. 보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사람 말소리라도 좀 들어보고 싶다.

    "아, 물론 네가 곁에 있다는 걸 잊은 건 아니야. 펄슨."

    나는 내 유일한 말상대, 펄슨을 향해 말을 걸었다.

    고독이란 거, 의외로 사람에게 치명적이더라고.

    표류되고 나서 나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의 의미를 절실히 깨달았다.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몬스터와 만날 때마다 말도 걸어보고, 끊임없이 혼잣말도 해보고, 별 짓을 다 해봤다.

    오죽하면 자기 전에 디아나의 영상을 꺼내서 혼자 감상까지 했을 정도였다.

    분명 야한 영상인데도 불구하고, 흥분되기는커녕 그리운 마음만  너무 사무치게 들어서 그 방법은 그날 이후로 봉인했지만.

    괜히 더 보고 싶어져서 후유증이 장난 아니더라고.

    아무튼 그런 고로, 나는 사람이 그리워 미칠 지경이었다.

    전에 디아나가 혼자서 생각하면서 중얼중얼 거렸던 이유가 지금은 너무도 공감이 갔다.

    아마 디아나도 혼자 마법 연구를 하다가 생긴 버릇인 게 확실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거다.

    아니. 그렇게 하더라도 난 버티기 힘들었다.

    때문에 나는 그냥 아예 내가 말상대를 하나 만들기로 했다.

    언젠가 본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공은 없었지만, 대신 나는 몬스터를 잡아서 나온 허파에 공기를 불어넣고 양 끝을 묶어서 가지고 다녔다.

    이름은 펄슨. 뭐, 말 그대로 사람이란 뜻이다.

    처음엔 스스로 하면서도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는 참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가상의 말상대라도 있는 것이 정신안정에 큰 도움이 됐던 거다.

    "쳇. 또 몬스터인가. 조금만 기다려라 펄슨. 형이 금방 처리하고 올 테니까."

    물론 친구를 인벤토리에 넣는 짓 따윈 하지 않는다.

    인벤토리 안의 풍경이 어떨지는 상상도 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원래 있던 세계에서는 동물을 강제로 잡아다가 친구라고 부르면서, 싸울 때를 제외하면 조그만 공에 넣고 다닌다는 사이코패스 같은 행동을 강요하는 게임이 있었는데, 난 그런 사이코패스가 아니니까!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축하 댓글도 감사합니다.

    갑자기 잭팟이 무슨 소린가 했는데 이벤트 중이었군요.

    앞으로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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