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478화 (462/1,205)

478====================

진일보

젠장. 너무 안일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서야, 나는 나 자신이 얼마나 안일한 판단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전 소계층들도 쭈욱 그래왔다.

이전 계층에서 다음 계층으로 이어지는 소계층에 가기 위해선 몬스터의 성기가 열쇠로 필요하다.

하지만 다음 계층에서 이전 계층으로 이어지는 소계층에 올라가는 건 딱히 열쇠가 필요하지 않다.

그냥 소계층에 있는 페이크 보스만 잡을 능력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개미굴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소규모 계층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다.

누구 하나쯤은 발견했을 만도 한데 말이다.

대체 그 이유가 뭘까?

간단하다.

소규모 계층에서 다음 계층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정확히 그 자리를 알고 있는 게 아닌 한 절대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위치가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코볼트 동굴을 통해 2계층으로 내려갔을 때는, 통로가 모래에 깊숙이 덮여있었기 때문에 그걸 뚫고 나와야했다.

개미굴에서 3계층으로 내려갔을 때는, 통로가 눈으로 막혀있었기 때문에 그걸 녹이면서 위로 뚫고 가야했다.

그렇다면 계층 전체가 물에 잠겨있는 4계층은 어떻게 통로를 숨길까?

이 강력한 물의 흐름이야말로 얼음동굴에서 4계층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숨기는, 이른바 물의 장벽이라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4계층을 탐험할 때 디아나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바닥 쪽에는 조류가 복잡하고 강한 곳이 있으니 말려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젠장. 그 얘기를 들었으면서도 이런 생각을 지금에서야 해내다니.

하지만 아무리 후회하더라도 이미 때는 늦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내 몸은 조류에 휩쓸려 점점 더 일행과 멀어져갈 뿐이었다.

일단 물의 정령을 소환해내어 필사적으로 내 몸을 떠미는 물의 흐름을 막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이 거대한 물의 흐름 앞에서 내 미력한 정령력은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이거 정말 본격적으로 위험해진 건지도 모르겠는걸.

이대로 우리 애들과 멀어져서 표류하게 된다면….

나는 괜찮다.

내 방어력이 이런 곳에서 맞아 죽을 방어력도 아니고, 내게는 맵도 인벤토리도 있다.

홀로 표류되더라도, 단순히 버티기만 하는 거라면 며칠이고 버틸 수 있을 거다.

문제는 우리 애들이었다.

음식도, 야영물품 같은 것도, 전부 나에게 있는 상황.

게다가 쟤들은 지도도 없잖아.

그야 여기까지 오는 동안 쭈욱 일자로 길을 내려왔으니, 어쩌면 길을 잃지 않고 위로 돌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음식도 펭귄을 잡아서 나오는 날개 같은 걸 먹으면서 지내면 어떻게 되긴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는 오히려 평소보다 조금 더 냉정해져서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애들과 떨어지는 건 불가항력으로 보였다.

어떻게든 대책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우리 애들은 아직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우리 애들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공간에서 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공기가 생겨나 물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공기방울은 점차 영역을 확장해나가서, 결국 내가 있는 곳까지 닿게 됐다.

디아나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게 멀리서도 똑똑히 보였다.

아까 보스전에서 그렇게 마나를 소비하고 또 이런 짓까지 한 거다.

아마 남아있는 마나 한줌마저도 전부 짜내면서 무리를 한 거겠지.

저렇게 창백해진 얼굴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은 디아나를 안쓰럽게 여기기보다는 디아나가 만들어준 이 기회를 살리는 게 중요했다.

"구워어어언!"

사라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려고 했다.

아니. 사라뿐만이 아니었다.

레이아도 창백해진 디아나와 날 번갈아가며 쳐다보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 있었다.

그리고 실비아나 마틸다도 각각 내 이름을 외치면서 당장이라도 통로에서 빠져나올 기세였다.

"안 돼! 오지 마! 거기 있어! 내가 갈게!"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황급히 소리를 질러 제지했다.

디아나가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건 그리 길지 못할 거다.

쟤들이 통로 밖으로 나온 다음에 디아나의 힘이 다해버리면, 괜히 희생자만 늘어나는 꼴이다.

레이아는 애초에 전투 능력이 없고, 레벨이 높은 실비아와 마틸다는 수영을 할 줄 모르고 말이다.

유일하게 나랑 같이 물에 빠지게 되도 멀쩡할 사라 역시, 물속에서는 특유의 재빠른 몸놀림을 살릴 수 없다. 장기적으로 보면 몬스터의 밥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는 거다.

즉, 만약 희생자가 늘어나는 꼴이 되면 사태는 최악으로 치닫기만 할 뿐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우리 애들의 행동을 제지하고, 물이 없어진 바닥에 발을 디디고는 전속력으로 통로 쪽을 향해 질주했다.

그동안 오른 암살자 레벨로 인해 민첩 스탯도 상당히 상승한 내 몸은 마치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서 순식간에 통로까지….

턱.

통로에 거의 가까이 다다랐을 때, 내 발목을 무언가가 붙잡았다.

바로 바닥에 흐물흐물하게 눌어붙어있던 수초형 몬스터였다.

젠장! 하필이면 이럴 때에! 이 녀석은 물이 없는데도 움직일 수 있는 건가!

당황한 나는 황급히 수초를 발로 차봤지만, 역시나 이 녀석에게 타격에 기반을 둔 공격은 아무런 데미지가 없었다.

성자 스킬도 안 먹히고. 진짜 상성 최악이란 말이야.

"구원! 가만히 있어!"

하지만 나에게는 든든한 동료가 있었다.

사라가 얼른 화살을 활에 메기고는, 내 발을 붙들고 있는 수초를 향해 날렸다.

그 한 방으로, 내 공격에 꿈쩍도 안 하던 수초가 그대로 찢어졌다.

"크흑!"

"디, 디아나씨!"

하지만 그와 동시에 디아나의 입에서 피가 울컥하고 솟아나오며 주변이 다시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괜찮다. 아직 괜찮다. 이대로 바닥을 단단히 붙잡고 기어가면, 아무리 조류가 강하다고 하더라도…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완전히 물에 잠기기 전까지 통로를 향해 달려가려고 했을 때, 갑자기 거대한 그림자가 내 위를 덮었다.

그 정체는 바로 고래였다.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안 될 정도로 거대한 그 고래는, 마치 공기가 남아있는 이곳이 좋다는 것처럼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속도로 날 향해 돌진해왔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이후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너희는 일단 돌아가서 구조를 요청해! 내 방어력이면 며칠이고 버틸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도 따로 4계층의 마을로 돌아가 보도록 해볼게! 만약 날 이대로 두고 갈 수 없다면서 괜한 짓을 하는 애가 있으면 진짜 평생 얼굴도 안 볼 거니까 알아서해!"

공기가 남아있는 공간을 고래가 덮치기 전에, 나는 재빨리 그렇게 내뱉고는 인벤토리에서 수컷 개미의 성기를 꺼내 암기술까지 응용해서는 온힘을 다해서 던졌다.

그리고 성기가 우리 애들이 있는 곳으로 정확히 날아가는 걸 본 것과 동시에, 거대한 그림자가 엄청난 양의 물을 이끌고 그대로 날 덮쳤다.

고래가 몰고 온 파도는 아까 전의 강렬한 조류 이상으로 내 몸을 유린했고, 나는 전신을 두드리는 강한 충격을 느끼며 천천히 정신을 잃었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걸까?

와그작와그작하고 귓가를 간질이는 시끄러운 소리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뭐야. 4계층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텐데?

멍한 머리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몸을 내려다보고 나서야, 나는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피라니아 처럼 생긴 물고기 떼가 내 온몸에 달라붙어서 장비들을 우걱우걱 씹고 있었던 거다.

그야 내 몸에서 나는 소리면 아무리 물속이라고 몸을 타고 소리가 들리겠지.

그래도 다행인 건, 5계층의 소재들로 강화한 내 장비는 피라니아의 공격에도 전혀 상처 입고 있지 않았다는 점일까.

황제 펭귄에게 쉽사리 찢긴 다리 방어구의 명예를 겨우 되찾은 느낌이었다.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면서, 나는 충격으로 인해 아직도 나른한 몸에 성자의 전력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피라니아가 내 몸을 더욱더 맹렬하게 물어뜯어갔지만, 어차피 이런 잔챙이들의 공격으론 내 방어구도, 내 방어력도 뚫지는 못한다.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우리 애들은 어떻게 됐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걔들이 나 없이도 위로 올라갈 수 있을지 심히 걱정됐다.

하지만 마지막에 말한 내 판단은 정확했을 거다.

적어도 날 구하겠다면서 무모하게 뛰어드는 걸 방치하는 것보다는, 위로 향하는 길을 다시 찾아 나가는 게 훨씬 안전할 거다.

괜찮다. 펭귄들도 이미 충분히 상대했으니 나 없이도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거고, 길도 어차피 1자로 내려왔으니까.

3계층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레이아의 스태프로 열 수 있고, 3계층으로 나가기만 한다면 마을도 비교적 가깝다.

그게 아니라면 헤어지기 직전에 던져준 수컷 개미의 성기를 가지고 아예 개미굴로 가면 된다.

거기엔 거대 마석을 조사하는 마법사 협회 사람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걔들이 무사히 저택에 도착하기만 하면, 내가 구조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저택에는 디아나를 제외하면 세계 최강을 칭할 수 있는 마법사들이 떼로 모여 있으니까.

마음속에 남아있는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애써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그런 것보다 나 자신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로 했다.

맵을 바라보니 이미 얼음동굴의 출구에서는 상당히 멀리까지 떠밀려온 상황이었다.

깨어나자마자 식물형 몬스터에 붙들려있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아니. 그 이전에 저 조류에서 벗어난 게 운이 좋았다.

저렇게 복잡하게 물이 흐르는 곳은, 소용돌이치는 것처럼 그대로 몸이 빨려 들어가 한자리에 계속 맴돌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

어쩌면 그때 그 고래가 물살을 몰고 덮쳐왔기 때문에 벗어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뭐, 애초에 그 놈의 고래가 없었다면 지금쯤 우리 애들이랑 같이 얼음동굴에 있었을 테니까 전혀 고맙지는 않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몸이 자유로워진 이상, 뭔가 행동을 하긴 해야한다.

사실 혼자 조난당했을 때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게 제일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이미 얼음동굴의 출구에서 상당히 먼 곳까지 떠밀려온 상황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다시 그곳으로 가봤자, 또 조류에 휩쓸릴 건 뻔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야말로 영원히 복잡하 조류에 휩쓸리며 떠밀려다니 게 될지도 모르고.

우리 애들과 헤어지기 자력으로 마을을 향해 가겠다고 했던 것도 그런 생각으로 한 말이었다.

지금도 그게 가능하다면 제일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말이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솔직히 말해서 마을이 정확히 어디쯤 있을지 알 방법이 없었다.

아니. 일단 길드에서 사온 지도는 있다.

하지만 4계층은 온통 물로 가득 찬 곳.

바닥 부근은 아까같이 물의 흐름이 복잡한 곳이 존재하기 때문에 되도록 사람들이 다가가지를 않는다.

게다가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직선거리로 쭈욱 헤엄쳐 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엉망인 거다. 지도가.

기껏해야 어디부터 어디까지 거리가 대략 어느 정도고, 중간 중간 특징적인 지형들을 그려놓은, 거의 보물찾기 놀이용 지도 수준의 지도였다.

이걸로 마을까지 대체 어떻게 찾아가라는 거야.

아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래도 거리라도 알 수 있는 게 어디야.

게다가 난 전에 정식 루트로 4계층에 온 적도 있으니까.

맵을 확대해서 4계층의 입구부터 현재 위치까지의 거리를 대충 짐작하여 이 지도에 대입해보면…역시 미개척 지역이잖아.

나는 그냥 지도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이딴 지도로 마을을 찾아가느니, 차라리 맵을 보고 4계층 입구를 통해 3계층으로 빠져나가는 게 훨씬 더 나아보였다.

하루 종일 수영만 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대체 며칠이 걸릴지 짐작도 안 될 정도로 멀어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미개척지역에 가만히 죽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어느 샌가 복상사해서 둥둥 떠다니는 피라니아를 털어내고, 우선 움직이기로 했다.

4계층을 이동하면서 내가 제일 주의해야할 건 역시나 식물형 몬스터였다.

다른 놈들은 내 방어력으로 버티면서 계속 성자 스킬을 때려 넣다 보면 언젠간 이길 수 있다지만, 식물형 몬스터만큼은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타격이나 성자 스킬은 먹히지 않고, 정령마법으로 공격하기엔 내 정령사 레벨이 너무 낮았다.

그나마 먹힐 가능성이 있는 공격이라면 암살자 스킬을 이용해 베어 넘기는 건데, 그런 시도를  하기엔 가지고 있는 장비가 마석 채취용 나이프밖에 없었다.

즉, 그냥 안 만나는 게 제일이라는 거다.

그리고 만나지 않는 방법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말이다.

식물형 몬스터들은 기본적으로 땅이나 천장, 벽에 뿌리를 박고 있으니까, 그냥 수중에 계속 떠다니면 된다.

전에는 수영을 못하는 실비아나 마틸다 때문에 바닥을 걸어 다녔지만, 나 혼자가 된 이상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그렇게 행동 방침을 결정한 나는, 맵의 저편에 보이는 3계층으로 이어진 통로를 향해 천천히 수영을 해나갔다.

나 홀로 던전 탐험이라…과연 어디까지 잘 될 수 있을지.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ziozia //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asfdgads //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서리바람 // 피임 마법과 같은 효과인데 마음대로 풀 수만 없는 저주로군요. 피임 마법이 통하므로 당연히 그런 저주도 통합니다.

vofjelaosldk // 딱 발기만 가능하도록 물건 쪽만 제외하고 전신마비가 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