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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257화 (24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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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어져가는 던전의 비밀

    "여기가 개미굴…확실히 2계층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네요."

    레이첼 누님은 개미굴로 내려가는 통로의 벽을 만지면서 중얼거렸다.

    그런가? 동굴 같은 구조라고해도 사암 동굴이라는 느낌이고, 내가 보기엔 그냥 사막의 연장선으로 보이는데 말이야.

    하긴 이 누님은 길드 직원. 그것도 길드장의 딸이다.

    던전에 관해서는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전문가일 테니까, 뭔가 차이점이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키기기긱. 키기긱.

    좁은 통로를 1열로 내려가서 개미굴의 첫 번째 방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무수히 많은 개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역시 부활해있구나. 저번에 그렇게 말끔하게 소탕했는데도 이렇게 우글우글 거리다니.

    뭐, 그래도 아직 초월종은 부활하지 않았을 테니까. 잡몹 정도는 금방 처리할 수 있지.

    "구원씨, 잠깐만요."

    성역 선포를 쓰기 위해 앞으로 나가려고 했을 때, 뒤따라서 통로를 빠져나온 레이첼 누님이 말을 걸었다.

    "제가 먼저 상대해 봐도 될까요?"

    "네? 쟤들을요?"

    "네. 이곳의 몬스터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요."

    "하지만 위험하지 않을까요?"

    "걱정 마세요. 고작 2계층 몬스터보다 조금 강한 수준의 상대에게 당할 정도로 호락호락하진 않거든요."

    "으음…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으니까요. 저도 같이 갈게요."

    여차하면 성역 선포를 써서 어그로를 몽땅 끌 수 있으니까.

    실비아처럼 쾌감에 대한 내성이 약한 게 아닌 이상 잠깐 성역 선포의 영향을 받았다고 발정할 리도 없으니까, 안전책으론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어머. 후훗. 그럼 부탁할게요."

    레이첼 누님은 조금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귀여운 동생을 보는 것처럼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

    "실비아. 그럼 다른 애들 좀 부탁할게."

    "네, 넵!"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실비아는 긴장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검집에서 검을 빼는 모습은 극히 자연스러운 걸 보아서, 나로 인한 긴장과는 별개로 전투에 그다지 지장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특훈을 안 할 건 아니지만.

    뭐, 실비아가 긴장한다고 해도 그다지 위험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말이야.

    아직 통로를 다 빠져나오진 않았지만, 마법사 협회 누님들 중 한 명만 있어도 여기서 몬스터는 그냥 쓸어버릴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실비아가 나하고 눈만 마주쳐도 긴장하는데도 던전에 내려온 거다.

    "과연. 디아나님 말씀대로, 입구 쪽 개미들은 그다지 강하지 않네요. 2계층 몬스터랑 그다지 차이 없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레이첼 누님과 같이 개미들에게 다가간 건 괜한 짓이었다.

    레이첼 누님은 그야말로 엘프라는 느낌이 절로 드는 경쾌한 몸놀림으로 사방에서 덮쳐오는 개미들의 공격을 화려하게 피해내고, 마법을 사용해서 개미들을 상대했다.

    보고있냐? 디아나야. 이게 바로 엘프의 몸놀림이란 거다.

    그런데 하나 남은 순혈 엘프라는 애가 운동부족이라니. 부끄럽지도 않냐?

    뭐, 운동하면 운동하는 대로 토닥토닥 공격이 아파질 테니까, 그건 그것대로 싫었지만.

    응. 내가 잠깐 잘못 생각했어. 역시 디아나는 지금 이대로가 제일 좋아.

    "고마워요 구원씨. 알아보는 건 이정도면 된 것 같아요."

    "네. 그럼 누님들! 공격해주세요!"

    콰과과과광!

    내가 외치는 것과 동시에, 방 안을 가득 메우던 개미들이 일제히 순식간에 증발했다.

    뭐야 이거…무서워…. 역시 그냥 디아나 빠순이들이 아니었구나. 뭐 알고 있었지만 말이야.

    …앞으로 좀 더 저 누님들이랑 친하게 지내자.

    "여, 역시 대단하시네요."

    옆에 있던 레이첼 누님도 과연 이 위력엔 놀랐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누님도 굉장하시던데요? 무영창 마법만으로 개미들을 상대하셨잖아요."

    그랬나. 이 누님은 영창도, 마법진도 없이 마법을 사용하면서 개미를 상대했었다.

    마법 전사라는 느낌이라고 할까? 주먹을 뻗으면 맹렬한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경로상의 개미들을 꿰뚫었고, 손바닥을 내밀면 물의 방벽이 생성되어 회피 불가능한 공격을 차단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아니 상당히 멋있었다. 배울 수 있다면 배우고 싶을 정도로.

    "네? 후훗. 아뇨. 이건 무영창 마법이 아니라 정령 마법이에요. 길드에서 출발할 때부터 미리 불러두고 있었거든요."

    레이첼 누님은 그렇게 웃으면서 양 손을 가슴께로 들어 펼쳤다.

    그러자 그 손바닥 위에 각각 연녹색이 섞인 하얀 정령과, 물빛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그만 녀석들이 손바닥 위에서 꼼지락 꼼지락대는 것이 꽤나 귀엽다.

    "오오! 과연!"

    "정령은 처음 보시나요?"

    "네. 엄청 신기하네요. 혹시 이거, 저도 배울 수 있을까요?"

    "글쎄요. 친화력을 확인해보지 않으면 뭐라고 말씀드리기 힘드네요. 정령 마법은 그 어떤 마법보다도 선천적인 친화력이 중요한 마법이거든요. 나중에 디아나님께 물어보시는 게 어떤가요?"

    친화력은 아마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 지금 몸이 게임 시작 시에 생성되는 캐릭터와 동등한 조건이라고 가정한다면 말이다.

    기본적으로 플레이어는 모든 직업을 가질 수 있으니까.

    그보다 디아나 말이지.

    "디아나요? 쟤도 정령 마법을 쓸 줄 알아요? 한 번도 못 봤는데."

    내 질문에, 레이첼 누님은 왜 그렇게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물론이죠. 세계 최고의 대마법사님이라고요? 정령마법을 잘 안 쓰시는 건, 그저 마나 효율이 안 좋아서 그러신 것뿐일 거예요."

    과연. 그런 건가.

    정령 마법이란 건 마나를 많이 잡아먹는 마법인가보다.

    정령을 계속 불러두고 있어야 하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가.

    "무슨 얘기를 하는 겐가? 이 몸의 이름이 들린 것 같네만."

    레이첼 누님과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자니, 뒤에있던 일행들이 모두 다가왔다.

    "아, 정령 마법이 신기해서. 디아나. 너도 쓸 수 있다면서?"

    "음. 물론일세. 현존하는 마법 중 이 몸이 사용할 수 없는 마법이 존재할리 없지 않은가?"

    "그럼 혹시 나중에 나도 배울 수 있을까?"

    "음? 배우고 싶은 겐가? 그럼 나중에 이 몸이 친화력을 확인해주겠네. 대신…알고 있겠지?"

    디아나는 흔쾌하게 수락하면서 내게 손을 뻗었다. 좋아.

    이거 기대되는군.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몸을 씻는 마법 하나만큼은 꼭 배우고 싶었는데, 정령 마법을 배우면 그것도 가능한 거 아냐. 아주 좋다.

    나는 바로 디아나를 업었다.

    "디아나님. 피곤하시면 제가 마법을…."

    "아뇨. 어차피 할 일도 없을 테니까 제가 업고 갈게요."

    아무튼 우리는 개미굴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개미굴은 정말로 언제 소탕이 됐냐는 듯이 개미들로 빽빽했지만, 방금 스스로 말했던 대로 내가 할 일이라곤 전혀 없었다.

    개미들은 얼굴이 보이는 순간 소멸되어 버렸고, 그런 마법사 협회 누님들의 활약 덕분에 우리는 그냥 산책하는 것처럼 길을 따라 걸어 나가기만 하면 됐다.

    그나마 잠깐 멈췄을 때는, 병정개미와 초월종이 처음 등장했을 때였다.

    앞서 나왔던 개미들과 마찬가지로 레이첼 누님이 상대를 해보겠다면서 잠깐 전투를 했거든.

    하지만 그 이외에는 정말로 그냥 산책하는 기분이었다.

    던전 안에 있는데도 이렇게 심심함을 느끼게 되다니.

    너무 심심한 나머지 업혀있는 디아나의 허벅지를 주물럭거리기도 했지만, 그것도 계속할 수는 없었다.

    디아나가 ‘이런 곳에서 무슨 짓인가! 자네 바보인가!’ 라면서 머리를 토닥토닥 때려왔으니까.

    솔직히 디아나의 토닥토닥 공격은 간지럽기 그지없어서 아무런 데미지도 없었지만, 뒤에서 바라보는 마법사 협회 누님들의 시선이 너무 무서워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서 몬스터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보고도 저 시선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난 담이 크지 않아.

    젠장. 이렇게 된 이상 실비아라도 데리고 놀…특훈이라도 할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실비아를 쳐다보자, 이쪽을 빤히 바라보면서 졸졸 따라오던 실비아가 새빨개져서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훗. 설마 내가 디아나를 업고 있다고 해서 방심한 건 아니겠지?

    그렇게 시선을 피해봤자 여긴 개미굴의 안. 네게 도망갈 곳 따윈 없단다.

    "실비…."

    "여긴 마치 던전 안에 또 다른 작은 던전이 있는 것 같네요."

    내가 실비아를 부르려고 했을 때, 옆에서 레이첼 누님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비아야. 너 운이 참 좋구나.

    "역시 그런가요?"

    "네. 2계층으로 묶어서 생각하기에는 나오는 몬스터들의 수준도 너무 다르고, 무엇보다 기후도 다르니까요. 지금까지 던전의 계층을 나누는 가장 큰 기준이 바로 기후의 변화 여부였거든요."

    그러고 보면 이 안은 전혀 덥지 않다. 아니 오히려 서늘할 정도다.

    그냥 강렬한 빛이 있고 없고의 차이라고 생각했는데, 레이첼 누님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만약 이런 식으로 작은 던전들이 던전 각지에 더 있는 거라면, 정말로 던전 탐험의 패러다임이 바뀔지도 모르겠어요. 성기를 얻는 건 직업 때문이라고 해도, 이런 곳을 발견하시다니. 구원씨는 참 대단하시네요."

    "후훗. 구원씨는 여신님이 보내주신 분이니까요."

    레이첼 누님과 대화를 하고 있자, 갑자기 팔에 누군가 달라붙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뒤에서 ‘으윽…가슴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옆을 쳐다 볼 것도 없이, 귓가를 간질이는 이 천사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 명밖에 없다.

    젠장. 갑옷을 입고 있는 게 이렇게 슬플 줄이야. 갑옷만 없었으면 지금 내 팔은 부드러운 언덕에 파묻힌 황홀한 감각을 맞보고 있었을 텐데.

    천사님의 가슴이 맞닿고 있을 디아나의 허벅지가 부럽다.

    정작 그 디아나는 뒤에서 ‘가슴…가슴….’이라고 트라우마에 걸린 것처럼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안 되겠어. 이 이상 디아나가 가슴을 미워하게 되면, 정말로 성장하고 나서도 자신의 거유를 싫어하게 될지도 몰라.

    디아나의 가슴에 대한 증오심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내가 크기에 상관없이 가슴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줘야지.

    나는 레이아의 반대편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디아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디아나. 너무 그렇게 싫어할 것 없어. 난 크기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지금 등에 닿고 있는 네 가슴도 레이아와 마찬가지로 최고야."

    "그, 그런…자네는 바보인가! 이 몸이 속을 것 같나! 갑옷 때문에 아무것도 안 느껴지지 않나!"

    디아나는 처음엔 살짝 부끄러워하는 것 같더니, 이내 내 말의 오류를 깨닫고 내 머리를 토닥토닥 때려왔다.

    쳇. 들켰나. 목소리만 잘 깔아서 분위기 잡으면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그런 바보 같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레이아와 레이첼 누님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여신님이요? 그야 이방인은 모두 여신님이 보내주신 거지만…."

    "아뇨. 구원씨는 평범한 이방인분들과는 달라요."

    레이아는 신뢰의 눈빛을 반짝이면서 날 쳐다봤다.

    으윽. 그렇게 쳐다보면 살짝 양심이…. 딱히 내가 속인 건 없지만 왠지 모르게 거짓말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내가 진짜 여신님이 보낸 사도 같은 거였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 굳이 그런 게 아니더라도 여신님이 날 여기로 보낸 이유만이라도 알면 좋겠는데.

    단서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가장 큰 단서는, 내가 게임을 통해서 이 세계로 날아왔다는 점.

    그리고 그 게임의 목표는 던전 클리어였다.

    물론 그 이후로도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노닥거리거나 새로운 캐릭터를 공략하는 등 컨텐츠는 풍부했겠지만, 일단 표면적인 스토리의 목표는 던전 클리어였다.

    그렇다면 여신은 던전을 클리어 하라고 날 보낸 걸까?

    하지만 왜? 무슨 이유로?

    적어도 현 상황에서 던전이 세상에 악영향을 주는 요소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사람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고 있다.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갖가지 재료들과 마석으로 사람들은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니까.

    방치하면 몬스터들이 넘쳐나서 던전 밖으로 기어올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끊임없이 생겨나는 모험가 지망생들이 있는 한,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한 없이 낮아보였다.

    그럼 대체 굳이 날 이 세계에 보내서 던전을 클리어하게 하는 이유가 뭔데?

    진짜 던전 깊숙한 곳에 디아나도 모르는 마왕이 잠들어있다든가, 뭐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런 결론이 안 나오는 고찰을 반복하고 있자, 뒤에서 디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바로 그 마석이 있는 곳일세."

    "오오. 이것이…."

    "확실히 디아나님의 말씀대로, 상당히 독특한 느낌의 마석이군요."

    확실히 이 누님들은 디아나를 좋아하는 만큼이나 마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마석을 발견하자, 다들 어린애처럼 눈을 빛내면서 강렬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거대한 마석이 있는 방은 여왕개미나 초월종은 한 마리도 없이 고요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아직 리스폰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럼 이 몸들은 지금부터 마석 연구를 할 생각이네만, 자네들은 어쩌겠나?"

    "음…글쎄. 그냥 구석에서 시간이나 때워야지. 아니다. 그동안 사라랑 레이아, 실비아 데리고 개미들 잡으면서 직업 레벨이나 좀 올릴까."

    "저, 그런 거라면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요?"

    "네? 무슨 부탁이요?"

    "이곳에서 3계층으로 이어져있는 거죠? 거기까지 안내를 부탁드릴 수 없을까요?"

    "네? 하지만 디아나가 없으면 좀 추울 텐데…."

    "그거라면 괜찮아요. 저도 어느 정도 비슷한 마법을 쓸 수 있거든요. 물론 디아나님 같이는 못하겠지만요."

    과연. 던전에 들어올 때 의문이었던 피부노출 많은 옷을 입고도 사막에서 멀쩡했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정령을 계속 꺼내두고 있었다고 하니, 그걸로 온도 조절을 한 걸까?

    "그런 거라면…디아나. 우리끼리 갔다 와도 괜찮지?"

    "음. 다녀오게나."

    어차피 정말로 3계층으로 이어지는지 확인만 하는 거라면, 그다지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우리는 디아나와 마법사 협회 누님들과 헤어져서, 3계층으로 통하는 벽 뒤의 통로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Tigerfish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저작권엔 신경 쓰고 있었는데 실수로 써버렸네요.

    하죠칸 //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디아나는 일행 중 신체 나이가 가장 어린 깜찍한 아가씨인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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