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214화 (19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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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비아의 각오

    으드드득.

    실비아가 무릎을 꿇으면서 말하는 것과 동시에, 사라의 입에서 그런 험악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라 입에서 들린 소리 맞지? 내 팔에서 들린 소리 아니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아니더라도 아픈 건 마찬가지지만.

    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아픈데.

    사, 사라야? 손에 힘 좀 풀어주면 안될까?

    피가 안 통하는데. 아니 부러질 것 같은데. 으아아아. 부러져부러져부러져.

    사라의 손을 탁탁 치면서 탭하자, 사라가 간신히 손에 힘을 살짝 풀었다.

    이거 옷 걷으면 분명 손 모양으로 피멍 들었을 거야.

    하지만 사라는 전혀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살벌한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눈빛이란 건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거겠지.

    "저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를 주세요."

    "…좋아요. 해보시죠."

    존댓말까지. 진짜 화났잖아.

    "다른 여자가 나 좋다고 찾아오는 것까지 제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잘난 게 죄는 아니잖아요?"

    눈앞의 사라와 뒤에 서 있던 바네사, 그리고 방금 자길 내 여자로 삼아달라고 부탁했던 실비아마저 어이없단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사실이잖아?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나 이래 뵈도 잘나가는 남자야. 손만 살짝 스쳐도 여자들이 끔뻑 죽는다고. 성적인 의미로.

    특히 실비아. 넌 그런 눈으로 보면 안 되지. 너 지금 뭐 하러 온 건데.

    "그래서, 갑자기 이 여자가 찾아와서 저런 말을 하는데, 당신이 잘났다는 거 말고 다른 이유는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다고요?"

    "아뇨. 사실 그게…여기 얘가 바로 전에 말했던 제가 그 성감대 만들어준…으아아악!"

    이번엔 사라가 내 옆구리를 꼬집기 시작했다.

    "엄살은…완전히 당신 때문이잖아요!"

    아니, 엄살이 아니라 네가 이러는 건 진짜 아프다니까.

    너도 아프라고 꼬집는 거잖아.

    "그래도! 그래도 거절할 건데 이러는 건 부당하잖아!"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사라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하아…진짜로 옆구리 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천사님이 보고 싶다. 어서 부드러운 손길로 쓰담쓰담 해줬으면 좋겠다.

    이거 천사님이 돌아오기 전에 나아버리겠지?

    젠장. 자연회복력이 높은 게 이럴 땐 안 좋군.

    "제대로 거절할 거라고요?"

    "무, 물론이죠. 당연하신 말씀을."

    "그런데 왜 말은 더듬어요?"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조금 아깝…아닙니다. 어떻게 제가 우리 아름다우신 세 분을 두고 그런 생각을. 당연히 거절해야죠."

    방금 느껴진 그거. 명백하게 살기였다.

    사라는 그래도 고백할 때 다른 여자들도 인정해준다고 말했으니까, 농담 삼아 해본 말인데.

    그때 그건 디아나하고 레이아만 지정한 거였나? 아니, 말투를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었는데.

    그럼 막상 다른 여자가 더 꼬이려고 하니 화나는 건가? 이게 맞는 거 같다. 하긴 당연한가.

    "그럼 빨리 해. 나랑 하던 거 마저 하고 싶지 않아?"

    내가 확실히 거절한다고 대답하자, 그제야 사라는 눈에 힘을 풀고 말투도 반말로 다시 바뀌면서 살짝 애교를 부렸다.

    여자란 무섭다. 상대가 우리 예쁜 사라가 아니었으면 여성 불신에 걸렸을 거다.

    그런데 너 아까까진 엉덩이로 하는 거 결사반대 하지 않았냐?

    다른 여자를 쳐내기 위해서라면 엉덩이쯤은 내줄 수 있다는 각오인 거야? 아니면 그냥 엉덩이로 하고 싶었던 거야?

    뭐 좋다. 그거야 이따가 직접 하면서 반응을 보고 확인하면 되는 일이니.

    참고로 난 사라가 좋아할 거라고 확신한다.

    이건 그냥 내 감이 아니야. 섹스 애널라이즈를 믿는 거지.

    "그런 고로 미안하지만…."

    "부탁드립니다!"

    "대체 이러는 이유가…흐합! 핫! 피했…잠깐! 우리 대화로 해결합시다!"

    다시 사라의 손이 내 옆구리를 포착하는 걸 보고, 이번엔 화려하게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속도는 사라가 훨씬 빨랐고, 한 번은 피했어도 두 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 옆구리는 사라의 손에 사로잡혔다.

    다행이 아직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사라의 눈빛은 언제든지 꼬집을 수 있다고 협박하고 있었다.

    "말해봐요."

    "그냥 순수하게 호기심이 생겨서 사정만 들어보려는 거예요."

    "다른 뜻은 없고요?"

    "물론이죠. 제가 어느 안전에 감히."

    "…믿을 거야."

    간신히 사라의 손에서 옆구리를 해방시킬 수 있었다.

    떨렸지? 옆구리야. 이제 다신 널 인질로 잡히지 않을게.

    자연스럽게 양손을 허리위로 올려서 옆구리를 가드하고, 다시 실비아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뭔지 얘기라도 들어봅시다. 실비아양. 댁 내가 친절하게 성감대까지 만들어 줬잖아. 그것만으로는 만족 못하겠다는 거야?"

    "친절을 베풀어주신 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하지만…다른 남성과는 아무리 몸을 섞어도 그때의 그 느낌은 맛볼 수 없었습니다."

    "그거야 나랑 비교하면 다른 남자들이 불쌍해지지."

    "아뇨. 그게 아닙니다. 펠…공주님께서 말씀하시길, 하다 보면 약하게나마 절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구원님과 할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전 아무리해도 다른 남성과는 절정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절정을 느낄 수 없어?

    …혹시 나 뭐 실수했나?

    "자세히 말해봐."

    "자세히 말하라고 하셔도…그저 절정을 못 느낄 뿐입니다."

    "쾌감은 느껴지고?"

    "네. 그건 문제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쾌감이 지속돼도, 절정에 달하진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다른 남성에게서 얻을 수 있는 쾌감이 훨씬 약하긴 했지만, 마치 구원님이 처음에 애무만으로 제게 걸린 스킬 효과를 풀어주려고 하셨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실비아의 말을 듣고 나서야, 드디어 뭐가 문제였는지 깨달았다.

    응. 내가 잘못했네.

    즉, 이런 거다. 내가 만들어준 성감대만으로는 절정에 달할 수준의 쾌감을 얻을 수 없다. 아마 레벨 차이 때문에 성자의 성수의 위력이 반감돼서 그런 거겠지.

    완벽하게 내 실수다. 성자의 손길로 절정에 보내지 못한 경험을 하고도 이런 실수를 반복하다니.

    얘가 쾌감을 느낀 건, 그냥 몸이 쾌감에 익숙지 않아 민감하기 때문이다. 겉으론 느끼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절정에 달할 수준까진 도달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젠장. 디아나한테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줬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디아나라면 바로 문제점을 파악하고 내가 성감대를 만든다고 얘기했을 때 말렸을 거다.

    실비아와 한 경험을 자세히 말하면 괜히 디아나가 화내는 시간만 길어질 테니, 간략하게 말한 게 이런 화를 불러일으켰다.

    "잠깐만요."

    그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사라가 나섰다.

    "그러니까 당신은, 고작 쾌감을 얻기 위해서 지금 구원의 여자가 되겠다는 말인 건가요?"

    "…고작 쾌감? 고작 쾌감이라고 하셨습니까?"

    사라의 말을 들은 실비아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눈동자를 활활 불태우며 말했다.

    "당신 같은 평범한 여성은 모릅니다! 평범하게 여성으로서의 쾌감을 즐길 수 있는 당신 같은 사람은! 당신이 평생 쾌감을 모르고 살았던 제 기분을 아십니까?! 처음으로 여성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됐을 때의 그 기분을 아십니까?!"

    실비아는 그 작은 몸집에서 나오는 거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박력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 피를 토하는 것 같은 처절한 외침에, 사라조차도 한 발짝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야. 기분은 알지만, 그래도 굳이 내 여자가 될 필요 없어. 아마 네가 못 느끼는 건, 너랑 내 레벨 차이 때문에 스킬 위력이 약해져서 그런 거야. 가서 조금만 기다려봐. 내가 레벨만 올리면…."

    "아뇨. 성감대가 생기고 다른 남성들과 몸을 겹쳐본 이후로, 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제게 여성으로서의 기쁨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건 구원님밖에 없다고요. 부탁드립니다. 절 당신의 여자로 삼아주십시오.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사정이 딱한 건 알겠는데. 나도 이미 장래를 약속한 여자가 셋이나 있는 몸이라서 말이야. 너도 들었잖아? 디아나가 날 자기 남자라고 선언한 거. 그거 누가 봐도 내 남자니까 건드릴 생각 말라고 한 거잖아."

    "…저도 디아나님께 신세를 진 적이 있는 몸. 디아나님의 상대께 정식으로 연을 맺어달라는 염치없는 부탁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연을 맺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당신의 여자로 곁에 두고 계셔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생각나실 때 한 번씩 제가 여성의 기쁨을 느끼게 해주십시오.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발을 핥으라면 핥겠습니다. 언제든지 옷을 벗으라면 벗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옆에만 두고 계셔주십시오."

    뭐야 그 조건.

    말만 좀 길게 했을 뿐, 쉽게 말해서 성노예처럼 부려도 상관없다는 얘기다.

    귀족이라는 애가 성노예를 자처할 정도라니. 그렇게까지 절실한 거였어?

    그렇게 상황을 파악하자, 조금 마음이 약해졌다.

    물론 남자 입장에서 너무 이상적인 조건이란 이유도 아주 조금 영향이 있었지만, 그건 사소한 이유다.

    섹스라면 어차피 우리 애들하고도 실컷 할 수 있다.

    마음이 약해진 가장 큰 이유는, 이렇게까지 절실해 보이는 애를 그냥 놔둬도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신이 날 성자란 직업으로 이 세계에 데려온 건, 이런 애들을 구원하라고 데려온 게 아닐까?

    그렇게 어울리지 않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옆에서 사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구원…."

    그래. 내가 우리 애들을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유야 어찌됐든, 이건 거절하는 게 맞다.

    괜히 어설프게 쾌감을 알려준 실비아에게도 미안하고, 여기에 성자란 직업을 달고 보내준 여신에게도 미안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매정하게 대놓고 말하기는 미안해서, 조금 돌려 말하기로 했다.

    "아니, 너 귀족 아니었어? 가문도 그렇고 너 자신도 왕실친위대의 기사인지 뭔지 라면서. 그런 조건을 아무렇게나 내걸어도 괜찮아?"

    "상관없습니다. 여성으로서의 기쁨을 맞보기 위해서라면, 전 뭐든 내던질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전에 벗으라니까 바로 옷을 벗어던졌던 거나, 성감대를 만들어준 후 바로 뛰쳐나갔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얜 아무래도 하나에 꽂히면 다 내팽개치고 그것만 쫓는 타입인 모양이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넌 각오가 돼있다고 쳐도 펠리시아 공주는? 너 공주 보좌나 호위 같은 역할 맡은 거 아니야?"

    왕실친위대의 기사란 애가 왕도가 아닌 여기에 있는 거다.

    그런 이유 말고는 설명이 안 된다.

    "공주님께선 기사로 살아가기보다, 한 명의 여성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제 결정을 이해해주셨습니다. 공주님께서 웃는 얼굴로 보내주셨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여기 올 수 있었던 거죠."

    그러고 보니 실비아는 지금 갑옷을 걸치고 있지 않았다.

    고급스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귀족으로선 간소해 보이는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설마 기사직을 아예 때려 치고 온 건 아니겠지?

    아무튼 정말로 각오 하나는 제대로 하고 온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받아줄 수는 없지.

    "네 가문도 그걸 인정해 준 거고?"

    "그, 그건…."

    역시나 여기선 말문이 막히는군.

    그야 그렇지. 그 자유분방한 펠리시아가 인정해준 건 이해가 되지만, 귀족가문에서 자기 가문 사람이 성노예 같은 삶을 사는 걸 인정할 리가 없지.

    아니, 솔직히 펠리시아가 웃으면서 보내줬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 펠리시아가 웃으면서? 또 뭔가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 아냐?

    "그렇지? 인정 안 해줬지?"

    "하지만 가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제 결심이 흔들릴 일은 없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네가 말한 대로 내 옆에서 그런 생활을 보내면, 그 가문에서 날 어떻게 생각하고 처리하려고 하겠어? 물론 디아나가 옆에 있으니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트러블이 생길 건 분명하지?"

    "……."

    실비아는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했는지, 아랫입술을 깨물고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딱봐도 머리에 피가 몰려서 즉흥적으로 뛰쳐나온 것 같으니 말이다.

    그렇게 냉정하게 생각할 정신은 없었겠지.

    "…그럼 가문과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고 나면, 절 구원님의 여자로 받아줄 수 있다는 겁니까?"

    하지만 포기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당장 가서 담판을 짓고 오겠습니다."

    실비아는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 야! 잠깐!"

    붙잡으려고 했을 때, 이미 실비아의 모습은 사라져있었다.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라….

    타입은 전혀 달라도, 묘한 부분에서 친구랑 닮은 기사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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