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레이아의 일상
"그런데 이렇게 되면 치료는 어떻게 할 건가요?"
구원과 레이아가 서로를 따뜻한 눈빛으로 마주보고 있자, 그 사이에 사라가 껴들어오며 말했다.
"그러네요. 원래는 카일이 전부 파악하고 있다가 알려줬는데 말이에요. 어쩜 좋죠?"
레이아가 턱에 손가락을 대고 고민하는 말투로 말하자, 멀리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물론 목소리의 정체는 카일이었다.
"뭐야. 넌 뭔데 벌써와."
"네놈은 신경 꺼라! 그보다 레이아 누…아니, 레이아님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저, 그게…."
레이아는 곤란한 얼굴로 구원을 바라봤다.
"너같이 잘못을 뉘우치지도 못하는 변태랑 같이 다니기 싫다는데."
"아닙니다! 정말 믿어주십쇼! 전 정말로 그런…."
놈이 또 변명을 하려고 하자, 레이아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
레이아는 스스로가 천사같이 맑고 깨끗한 만큼, 거짓말하는 걸 싫어할 것 같아 보이긴 한다.
카일도 그걸 눈치챘는지, 도중에 말을 흐렸다.
"그런…짓을 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그만 뭔가에 홀려서…. 정말 반성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카일은 땅바닥에 엎드려 빌면서 말했다.
우와. 얘 진짜로 자기가 그랬다는 걸 인정해버렸어. 괜찮은 거냐?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레이아의 곁에 있고 싶었어?
"…그만 일어나세요. 아픈 사람들이 계신 곳에 안내해주시겠어요?"
"요,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스스로 그렇게 반성하고 계시는데, 제가 더 용서할 게 있나요?"
저런 변태에게마저 레이아는 천사였다.
"너 진짜 우리 레이아가 천사라서 다행인줄 알아라. 그런 변태 짓을 용서받다니. 다른 여자 같았으면 평생 눈앞에 보이지 말라고 했을 거야."
실제로 크리스나 사라는 카일에게서 몸을 지키듯이 은근슬쩍 내 뒤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 이이이익! 네, 네놈이 말 안 해줘도 안다!"
결국 카일이 앞장서서 병자들에게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빈민촌의 병자들에게 포션을 나눠주고, 레이아와 크리스가 치유 마법을 사용해 치료하러 돌아다니는 자선활동이다.
포션이란 게 상당히 비쌀 텐데, 신전도 통이 크네.
벌이가 좋다보니 이렇게 통도 커지는 걸까? 매번 예배를 드리러 오는 숫자만 해도 엄청난 숫자였으니, 아마 성금도 엄청나게 벌고 있기는 할 거다.
자선활동을 따라다니면서 확실히 알게 된 점은, 여기서 레이아의 인기가 엄청나다는 거였다.
마치 성녀라도 되는 것처럼 빈민가의 모두가 레이아를 떠받들었다.
이런 반응이면, 적어도 빈민가에서 레이아의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별로 없어 보이기는 했다.
다만 환자들을 적극적으로 돌보다보니, 자연스럽게 환자들과 신체접촉이 많아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마치 치과에 갔을 때 머리 위에 간호사의 가슴이 닿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혹시 저것도 레이아가 유독 인기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미안한 말이지만, 크리스는 레이아와 비교해서 여성스러운 볼륨이 많이 부족하고 말이지.
"장난 아니네."
"뭐, 그럴만하죠. 당신 파티에 들기 전까지 레이아는 하루도 빠짐없이 여기에 사람들을 도우러 왔는걸요."
크리스는 이런 반응에 익숙해보이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 정도야?"
"네. 심지어 신전의 지원 외에도, 레이아는 자기 돈까지 몽땅 털어서 여기 사람들을 돕는데 썼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 레이아는 빈털터리였지.
지금까지 같이 다니면서 딱히 돈을 막 쓰는 것 같지도 않아서 의아했는데, 이런 비밀이 있었다니.
빈민가에서 인기가 이렇게나 높은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유였다.
미안하다 크리스. 잠깐이지만 너와 레이아의 인기 차이는 볼륨의 차이라고 생각했었어.
"과연 우리 천사님. 돈 쓰는 방법마저 천사 같다니까."
"…정말, 레이아는 당해낼 수 없겠네요."
"응? 뭐야. 사라 너 레이아랑 이런 걸로 경쟁한 셈이었어?"
옆에서 중얼거리는 사라를 놀리려고 구원이 살짝 도발하는 말투로 말했다.
"…하아."
하지만 사라는 구원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피곤한 얼굴로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뭐, 뭐야. 왜 그래? 평소처럼 안 달려들고.
그 이후로도 저녁노을이 질 때까지 일행은 치료를 위해 돌아다녔다.
하는 거 없이 구경만한 구원이었지만, 꽤나 피곤했다.
아무리 치료를 위해 신체접촉을 피할 수는 없다지만, 우연을 가장한 바디터치를 시도하려는 괘씸한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카일 같은 놈이 또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어서, 일일이 애널라이즈를 사용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우리 천사님에게 필요 이상으로 접촉하는 놈들은 전부 차단할 수 있었다.
역시 여기 올 땐 내가 꼭 붙어있어야겠어.
구원은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치료 순회를 마친 후, 다시 고아원에 들러 아이들에게 저녁을 차려줬다.
"근데 넌 왜 아직까지 따라 오냐? 볼일 없으니까 가라."
"여기 살고 있으니 당연한 거다!"
"뭐야? 안 쫓겨났어?"
"네, 네 놈의 모하…내 잘못을 크게 뉘우친 모습을 보고 원장님께서도 이해해주셨다."
카일은 구원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레이아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바꿨다.
이젠 자기 스스로 변태 짓을 했다는 걸 완전히 받아들이고 있군. 좋은 자세야.
그건 그렇고 아무래도 고아원 원장은 잘 말로 구슬린 모양이다.
하긴 여기 원장은 이놈이 사회적으로 말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한가.
레이아가 그런 얘기를 떠벌일 성격도 아니니, 어쩌면 이놈을 완전히 묻어버리는 건 실패한 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크리스가 얘기해주지 않으려나? 아니면 내가 나중에 몰래 말해줄까?
빈민가를 나서 신전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시간은 꽤나 늦은 밤이 되어있었다.
오늘 밤은 레이아의 차례이니, 레이아도 같이 저택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구원 역시도 같이 신전까지 따라왔다.
아무래도 짐을 정리하고, 가벼운 보고 같은 것도 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레이아를 기다리는 동안, 이번엔 제대로 옆에 앉아있는 사라에게 말을 걸었다.
"사라야."
"네?"
"나 아직 화 안 풀렸는데."
"뭐, 뭐가요?"
"설마 낮에 나한테 했던 일이 기억 안 난다고는 말 못하겠지?"
"그, 그건…갑자기 레이아가 나와서 놀라서 그만…."
"으윽. 아까 밀쳐졌을 때 무릎을 다친 것 같아."
"거, 거짓말 말아요! 당신 웨어 울프의 공격도 맨몸으로…."
"으아아. 역시 마음의 거리가 먼 탓인가! 다친 사람을 대하는 태도마저 차가워!"
"무, 무릎 베게라도 다시 해드릴까요?"
"호오. 자기 무릎 베게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시는 건가?"
"그럼 없다는 거예요?!"
으윽. 말을 좀 잘못 골랐나. 레이아 같은 타입이면 먹혀들었을 텐데.
사라는 자기 외모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확실히 자각하고 있다 보니, 때때로 자신감이 엄청나다.
"으윽. 낮에 입은 마음의 상처가…."
구원은 가슴을 부여잡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워, 원하는 게 뭐해요."
좋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군.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보듬어줄 필요가 있어. 하지만 그냥 어루만지는 걸론 안 돼. 좀 더 직접적으로…."
"요점만 말하세요."
"나중에 같이 잘 때 씻는 것부터 같이 하는 건…안 될까?"
"…좋아요."
예상과는 다르게, 의외로 사라는 간단하게 승낙해줬다.
"정말로? 무르기 없기다? 그때 돼서 딴 소리 하면 안 된다?"
"알았어요. 그냥 같이 씻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좋았어. 크크큭. 내 원대한 계획도 모르고 쉽게 승낙을 해버리다니.
구원은 아직 꿈을 저버리지 않고 있었다.
커다란 욕실에서 메이드의 시중을 받으며 우리 미인 파티원들과 같이 씻는다는 원대한 꿈을.
그야말로 하렘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행동이다.
그 꿈을 위해서, 우선은 이렇게 차근차근 한 명씩 같이 씻는데 익숙해지는 거다.
"구원씨. 잠깐 괜찮으신가요? 대사제님이 부르세요."
사라와 협상을 마쳤을 때, 타이밍 좋게 레이아가 나타나 구원을 불렀다.
"나를? 왜?"
"글쎄요? 그냥 구원씨를 불러오라고만 하셔서요."
뭐지? 설마 아직 던전에도 안다녀왔는데 또 공부를 시키려는 건 아니겠지?
그야 물론 나름 재미있긴 했지만, 이런 때에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제부터 레이아와 흐뭇한 밤을 지내야 하는데.
"마나풀의 서식지 말인데요, 안내를 좀 해줄 수 있을까요?"
하지만 다행히 공부 관련 얘기는 아니었다.
"어라? 아직 거기에 사람 안 보내셨어요?"
"네. 왜인지 갑자기 모험가들의 파견 요청이 늘어나서 일손이 부족해졌거든요. 우선은 그곳을 관리한 사람 몇 명만 보내려고 하는데요. 실력은 문제가 없는 아이들이지만, 던전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이거든요. 과연 지도만 보고 찾아 갈 수 있을지 걱정돼서…."
과연. 그런 문제인가.
아마 파견 요청이 늘어난 건 나 때문이다.
새로운 루트를 공개해버렸으니 말이다. 새로운 곳을 개척해 보려는 모험가들이 안전을 위해 평소보다 사제를 더 찾는 거겠지.
원래는 비밀 통로 쪽으로만 다니다 보니, 파티원 이외의 사람과 함께 행동하는 건 꺼려지지만….
"괜찮아요. 안 그래도 텔레포트 설치 때문에 한번 그쪽으로 가야했거든요."
디아나가 텔레포트 설치를 위해 갈 때, 디아나 혼자 갈 리도 없다.
분명 길드의 직원들과 같이 가게 되겠지.
그렇다면 어차피 그때는 비밀 통로를 못 쓴다. 신전의 인원 몇 명이 더 늘어난다고 해도 전혀 문제될 거 없다.
"그럼 저희가 던전에 들어갈 때 연락을 드릴게요. 아마 며칠 내로 가게 될 것 같아요."
"네. 부탁드립니다."
대사제와 대화를 마치고, 일행은 드디어 디아나의 저택에 돌아왔다.
분명 그냥 할 일도 없는 쉬는 날이라서 레이아를 따라간 것뿐인데, 하루가 엄청 길었던 기분이 든다.
그만큼 보람찬 하루긴 했지만.
"이제 왔나…."
저택에 도착해 우선 디아나한테 가보자, 디아나는 침대에 축 늘어져있었다.
"다, 다녀왔어. 괜찮아?"
"으음…문제없네."
"협상은 어떻게 됐어?"
"그냥 각 학파의 수장들에게 각자 방을 내주기로 했네."
"어라? 그게 끝? 다른 애들은?"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힘들었네. 반발이 심하더군."
"잘도 그 조건으로 끝났네."
"음. 그냥 학파의 수장들이 성과가 뛰어난 인물들을 수행원 자격으로 머무르게 할 생각인 모양이더군."
구원의 생각보다 훨씬 좋게 마무리가 됐다.
실은 수장들을 머무르게 하는 건, 구원이 없을 때를 대비한 것이기도 했다.
학파의 수장들은 전원 여성. 디아나가 항상 저택에 있는 것도 아니니, 디아나가 있을 때면 아마 디아나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려고 하지 않을 거다.
그러면 자연히 사내새끼들이 디아나한테 꼬리를 칠 수도 없게 된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조건이 이렇게 되면, 아예 이 저택에 남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수장들도 같은 방에 머물 수행원으로 남성을 고르지는 않을 테고 말이다.
"그거 잘됐네!"
"음. 이 몸도 잘 됐다고 생각하네. 그런데 자네 생각 이상으로 기뻐하는군."
"당연하지. 네 기쁨이 내 기쁨 아니겠어?"
"흠. 흠. 하여간 자네는 말은 참 잘 하는군."
하지만 디아나는 싫지 않은 듯, 침대에서 일어나 구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텔레포트 마법진 설치하는 거 말이야. 언제 갈 것 같아?"
"아마 내일 가게 될 것 같네. 왜 그러나?"
"아니, 신전에서 마나풀 서식지로 안내해 달라고 해서. 이왕 텔레포트 설치하러 갈 때 같이 가려고. 내일이면 잘 됐네."
"흠. 그럼 이 몸이 사람을 시켜 신전에 연락해두겠네."
"응. 부탁할게."
디아나와 대화를 마치고, 구원은 얼른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는 레이아가 아직 사제복차림으로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실은 구원이 씻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구미호의 변신 조건을 완전히 파악했으니, 이젠 슬슬 구미호가 되기 전에 레이아의 본모습과도 좀 즐겨야하지 않겠어?
덤으로 남자의 로망이 가득 담긴 원대한 계획에도 한걸음 다가가고 말이다.
============================ 작품 후기 ============================
후원 쿠폰, 원고료 쿠폰 보내주신 분들 너무 감사드립니다.
추천해주신 분들도 정말 감사합니다.
코멘트 써주신 분들도 정말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연참은 불가능했습니다.
자고 일어나니 하루가 삭제되어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