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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0화 (9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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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크들의 영역

    길을 따라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왠지 기온이 더 상승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흥분으로 고양되어 그런 거라고 생각했지만, 땀을 뻘뻘 흘릴 정도가 되자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왠지 더워지고 있지 않아?"

    "음. 2계층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구먼."

    구원의 물음에 디아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더운 게 당연한 거라. 2계층은 사막이라도 되는 건가?

    그리고 드디어 길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부시게 밝은 빛이 쏟아져 나오는 걸 보고, 구원은 단숨에 달려 나갔다.

    "더워어어어어!"

    그리고 밖에 나가서 가장 처음 느낀 감상이 이거다.

    설마 진짜로 사막이었을 줄이야….

    그렇다고 흔히 생각하는 모래가 흩날리는 사막은 아니고, 원래 세계에 비유하자면 그랜드 캐니언 같은 곳이었다.

    디아나가 2계층에서 싸울 대비가 안 돼있다고 한 건 이걸 말하는 거였나.

    확실히 이대로 싸우기에는 힘들 것 같다.

    하지만 대비를 한다고 해도 어떻게 하는 걸까? 역시 마법인가.

    일행들을 돌아보자, 역시나 사라와 레이아도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어하고 있었다. 반명 딱 한 명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구원은 유일하게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디아나를 바라봤다.

    그저 익숙해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땀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고 있다.

    "디아나? 혹시 이런 상황에서 쓸 만한 마법 같은 건 없어?"

    "왜 없겠나? 물론 있네. 마법으로 불가능한 거라곤 그리 많지 않다네."

    "그럼 지금 써줄 수 있어?"

    "흠. 이 몸의 마력이 아직 부족해서 말일세."

    "그런 것 치고 넌 안 더워 보이는데?"

    "마력이 부족하여 이 몸의 주위만 겨우 시원하게 할 수 있을 정도라네. 자네도 마법의 혜택을 받고 싶으면 이 몸의 레벨을 올릴 때 더 노력하게나."

    "지금은 불가능한 얘기잖아! 에잇! 이렇게 된 이상!"

    구원은 디아나에게 다가가 와락 껴안았다.

    와. 뭐야 이거. 갑자기 에어컨이라도 틀은 것처럼 주위 온도가 확 내려갔다.

    "오오. 진짜 시원해. 너 치사하게 혼자만 이러고 있었냐?"

    하지만 디아나는 구원의 기습에 놀랐는지, 딱딱하게 굳어져서 말이 없었다.

    대신 구원을 매도하는 건 사라였다.

    "구원! 아무리 더워도 그렇지 뭐하는 거예요!"

    "미안. 근데 진짜 시원해. 자."

    구원이 디아나를 들어서 사라에게 휙 넘겨주자, 사라도 엉겁결에 디아나를 건네받았다.

    "어머, 시원해."

    "그렇지?"

    "자, 자네는 던전에서 무슨 짓인가!"

    그제야 경직에서 풀려난 디아나는 크게 호통 치며 구원의 머리를 지팡이로 내리쳤다.

    "쿠루룩?"

    그리고 디아나의 호통소리를 들은 건지, 오크 몇 마리가 근처에 다가왔다.

    확실히 1계층 오크와는 조금 다르다.

    일단 피부색이 녹색에 가까웠던 1계층과는 다르게 이놈들은 황록색에 가깝다.

    그리고 장비하고 있는 무장도 1계층과는 비교도 안 되게 충실해 보였다.

    "이 놈들이 2계층의 오크인가."

    "앗, 미, 미안하네. 이 몸이 큰 소리를…."

    디아나로서는 아마 처음이 아닐까 싶은 실수에, 디아나는 크게 당황하는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여기에 온 이상, 어차피 전투가 벌어질 건 빠르냐 늦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숫자도 적당하니, 2계층 몬스터한테 지금 전력으로 얼마나 통하나 싸워봐야지.

    구원은 성자의 손길을 두르고, 놈들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나름대로 기습을 한다고 달려간 거지만, 놈들은 침착하게 무기를 들고 구원을 맞상대했다.

    확실히 1계층과는 다르게 무기를 체계적으로 다룬다.

    초월종과 가까운 느낌이라고 할까? 다만 초월종만큼의 파워는 없는 모양이지만.

    살짝 더 까다로워졌지만, 이 정도라면 많은 모험가들이 계층 간 이동을 주저할 만큼의 격차는 아닌 것 같다.

    구원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놈들이 동시에 무기를 양손으로 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선 일반 몬스터들도 스킬을 쓴다고 했었지.

    구원은 재빨리 한 놈의 등 뒤로 돌아가 놈의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동시에 휘둘러진 무기에서 나온 기파에 구원이 떠민 놈의 몸이 갈가리 찢겨나갔다.

    앞도적인 신체능력만 있으면, 다 대응할 방법이 있다는 말이다.

    "너, 너희들! 동료를! 한낱 미물도 동료의식은 있는 법인데!"

    구원의 말을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놈들은 동료를 죽인 것에 크게 당황했는지 무기를 휘두르는 힘이 아까보다 덜 들어간 게 느껴졌다.

    결국 그 이후로는 손쉽게 놈들을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역시 우리 전력으로는 2계층 몬스터도 상대할만하군.

    "디아나!"

    전투가 끝나자마자, 구원은 마석을 캐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디아나에게 달라붙었다.

    "무슨 짓인가! 안 떨어지나!"

    아까의 교훈을 살려, 이번에는 큰 소리로 말하지 못하고 속삭이는 디아나가 귀여웠다.

    "조금만. 이러고 있자. 더워 죽을 것 같아."

    "으으윽."

    디아나도 구원이 더운 와중에 고생한 걸 아는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더 이상 떨어지라고는 하지 못했다.

    그렇게 잠깐 생체 에어컨을 만끽하고 드디어 좀 나아진 구원은 머리를 짜내기 시작했다.

    예전에 우연히 본 오지에서 살아남는 다큐멘터리를 떠올리며 인벤토리에서 옷가지를 여러 개 꺼냈다.

    "디아나. 이것 좀 전부 푹 적셔줘."

    그냥 사막에 떨어진 사람들과는 다르게, 구원 일행은 물을 무한으로 공급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

    그렇게 푹 적신 옷가지를 몸에 두르자, 그나마 조금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보기에는 조금 이상해 보이겠지만 말이다.

    "사라야. 자, 너도 나처럼 해봐. 꽤나 시원해."

    "네, 네? 하지만…."

    아무래도 여자다보니, 이런 차림을 하는 건 거부감이 드는 모양이다.

    미안하지만 너에게 선택권이란 없다. 나만 이 꼴로 있을 수는 없지. 너도 나와 같은 모습이 돼줘야겠어!

    "계속 그렇게 다닐 수도 없잖아. 어차피 오래 있을 건 아니니까 잠깐만 나랑 같이 이러고 다니자."

    "아, 알겠어요. 할 수 없죠."

    구원의 설득에 사라도 할 수 없이 옷가지를 몸에 두르기 시작했다.

    전위가 아니라고는 해도 사라 역시 몸을 쓰는 직업이니 이 더위를 참기는 힘들었겠지.

    그리고 구원은 레이아를 바라봤다.

    하얀 사제복이 땀으로 흠뻑 젖은 것이 상당히 더워보였다.

    그래도 하얀 사제복이 젖어서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건 제법….

    아니, 그게 아니라.

    "레이아는…디아나를 안고 다니면 되겠네."

    어차피 둘 다 몸 쓰는 직업은 아니니 붙어 다녀도 아무 문제없을 거다.

    "네? 하지만…."

    "그렇게 하세. 자네도 그 차림으로는 덥겠지."

    디아나도 딱히 불만 없다는 듯이, 가볍게 말했다.

    아까 내가 달라붙을 땐 그렇게 기겁했으면서….

    "네. 그럼 실례할게요."

    그리고 레이아는 디아나를 뒤에서 껴안았다.

    마침 디아나의 머리가 딱 레이아의 가슴위치에 있어서, 안 그래도 젖어서 비쳐 보이는 가슴이 더욱더 강조됐다.

    큭. 디아나 녀석. 부럽다. 저 성역을 뒤통수로 만끽할 수 있다니.

    하지만 디아나 입장에선 그게 아닌 모양이다.

    "꺅!"

    디아나는 자신의 뒤통수에 닿는 느낌의 정체를 확인하기위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몇 번 주물주물 만지며 감촉을 확인하더니, 점점 표정이 썩어갔다.

    "잠깐만 기다리게. 다시 생각해보니…."

    "치사하게 너 혼자 시원하지 말고 한 명 정도는 좀 껴줘라."

    디아나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하고, 구원은 바로 선수를 쳤다.

    "으윽. 이 몸이 이런 굴욕이…. 이 몸도 성장만 하면 이 정도는…!"

    아니. 내가 비교해본 결과 너 성장해도 저 정도 크기는 안 된다니까. 물론 그래도 충분히 크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임시로나마 더위 대책을 마친 일행은, 일단 주위를 둘러보기로 했다.

    일행이 1계층에서 내려온 곳의 입구는 거대한 사암절벽 같은 곳에 뚫려있는 곳이었다.

    "디아나. 이 절벽이 어딘지 짐작 가는데 없어?"

    "음. 이렇게 큰 절벽은 들어본 적도 없네."

    이렇게 큰 곳이면 발견하는 즉시 소문이 안날수가 없을 텐데.

    혹시 여기도 정규루트와 이곳은 맵이 분리되어있는 걸까?

    조금 주변을 걸어봤지만, 황량한 사막지대는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져 있었다.

    "사라. 뭐 보이는 거 없어?"

    "잠깐만요."

    사라는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한 바퀴 돌며 멀리까지 쭉 훑어봤다.

    그리고 절벽이 있는 뒤쪽을 바라보고는 굳어졌다.

    "구원. 저걸 봐요."

    응? 뭘? 거기엔 절벽밖에 없잖아.

    하지만 뒤를 돌아본 구원은 곧바로 사라가 뭘 보라고 했는지 이해했다.

    절벽에는 마치 러시모어 산처럼 거대한 오크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었다.

    윤곽만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의 투박한 생김새에, 워낙 크다 보니 가까이 있을 때는 눈치 채지 못했었다.

    "그럼 설마…여기가 2계층에 있다는 오크들의 영역 한복판이란 말이야?"

    그게 아닌 이상 저 조각은 말이 안 된다. 만드는 것만 해도 아마 엄청난 세월이 걸렸을 테니까.

    "구원. 저기서 오크 떼가 다가오고 있어요."

    그리고 곧 이어 사라가 또 다른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가 오크들의 영역인건 확실한 모양이다.

    구원은 주먹을 다잡고 말했다.

    "숫자가 얼마나 되는데?"

    "글쎄요? 수백 마리는 되는 것 같아요. 아, 혹시 저기 유독 큰 늑대에 타고 있는 게 주술사인가요? 화려하게 꾸미고 있네요."

    "좋아. 튀자."

    구원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어차피 오늘은 2계층 입구가 맞나 확인만 하러 온 거였어.

    일행은 신속하게 절벽으로 돌아가 이곳에 온 입구로 다시 들어갔다.

    "새로운 입구를 발견한 건 좋은데,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지 않는 이상은 결국 정규루트 쪽을 뚫긴 뚫어야겠네."

    "뭐, 그야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나. 이정도 발견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소득일세."

    그야 그렇긴 하지만 말이지.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레이아가 프로텍트를 배워야하나.

    슬슬 마을에도 돌아가야 할 때다. 레이아가 프로텍트를 배우려면 얼마나 남았을까?

    "레이아. 사제 레벨은 몇이나 됐어?"

    "죄송해요. 아직 26이에요."

    "아, 아니. 죄송할 거 없어. 레이아 잘못도 아니고."

    구원이 아쉬워하는 게 티가 났나보다.

    천사님께 그런 티를 내다니. 나도 아직 멀었군.

    하지만 역시나 이번 여정에 레이아가 프로텍트를 배울 레벨까지 올리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충분히 빠른 성장이기는 하지만 말이지.

    아쉬움을 뒤로하고 1계층으로 올라왔을 때, 일행의 눈앞에는 땅에 조아리고 있는 오크의 뒤통수가 보였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은 전혀 안됐지만, 이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이렇게 적절한 위치에 놓여있다니.

    "슛! 볼은 나의 친구!"

    구원은 순식간 치고 나가서 놈의 머리에 사커킥을 날렸다.

    그러고 보니 옛날부터 궁금했던 게 하나 있다.

    나의 친구라면서 왜 항상 발로 차는 걸까. 사이코패스인가.

    아무튼 놈은 갑작스런 공격에 머리를 잡고 뒹굴었다.

    일단 주변에 다른 오크들은 보이지 않는다.

    겁도 없이 이런 곳에 혼자 돌아다니다니.

    그렇다면 굳이 어그로를 끌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구원은 성자의 손길을 먹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커킥의 향연에 놈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랜만에 발로만 공격하니 옛날 생각도 나고 좋네.

    한때 붉은 발의 구원이라고 불렸던 시절이 떠올랐다.

    하지만 일반 오크라면 벌써 잡혔을 공격에도, 놈은 결국 버티고 일어났다.

    물론 일어났다고 해서 놈의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다.

    곧바로 놈의 머리에 사라의 화살이 날아왔고, 놈이 그걸 방어하는 사이에 구원이 다시 한 번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넘어져 있는 편이 밟기 쉽잖아.

    하지만 상황은 구원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꾸뤠에에에엑!"

    구원에게 다리를 걸려 정면으로 넘어진 놈은, 고간을 붙잡고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이 반응. 익숙한 반응이야.

    마치 전에 웨어 울프 초월종에게 페니스 브레이크를 먹였을 때와 같은…!

    그리고 구원은 사태를 파악했다.

    성자의 손길로 물건이 팽창한 상태에서 그대로 앞으로 넘어진 거다.

    그 이상 끔찍한 상상을 하고 싶지 않아서, 구원은 최대한 놈을 편히 보내주기 위해 밟는 걸 멈추고 주먹으로 구타했다.

    요즘 주먹을 더 많이 쓰다 보니 무투가 스킬도 주먹 공격 관련 스킬이 레벨이 더 높다.

    그렇게 놈은 제대로된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파티가 총공격을 가했는데도 이정도로 버티다니. 편하게 보내주려고 했는데도 운이 없는 놈이다.

    그러다가 구원은 문득 자신의 주먹을 바라봤다.

    아, 성자의 손길을 안 풀었네.

    엎어져 있는 상태로 성자의 손길을 연달아 맞은 놈이 정말로 편히 갔을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구원은 조용히 명복을 빌어주기로 했다.

    먼저 간 놈 중에 너랑 비슷한 꼴을 당한 웨어 울프도 있다. 둘이 친하게 지내라.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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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해주신 분들도 정말 감사합니다.

    코멘트 써주신 분들도 정말 감사합니다.

    드디어 2계층으로 넘어갔습니다.

    처음 계층이다 보니 설명할 것도 많고 해서 지지부진했지만, 이제 한동안은 던전 공략 내용은 적당히 스킵하면서 갈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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