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는 떨어져서, 대원들을 모았다.
그제야 네리스와 헤르카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대화는 끝나셨습니까?"
"응.
너희 둘은 안 가도 돼? 챙길 가족들 있잖아."
"괜찮습니다.
전장에 나선 이상, 저는 이미 죽은 딸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무서운 가족이네."
"나는 필리오테 가문의 내놓은 자식이라서. 에헷."
"언제나 가문 이름을 자랑스럽게 외치는 것 치고는 씁쓸하다."
"자, 자랑스러운 자식이기도 한걸?"
살짝 떳떳하지 못한 발언이었는지 말을 더듬는다.
어른들 꽤 고생시켰을 타입이지. 헤르카는.
하지만 두 사람 다, 정말 잘해주었다.
"아리엘과 얘기하고 와서 조개 꺼내줄 테니까.
성이라도 둘러보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기꺼이 그러겠어. 이런 멋진 성에 올 기회는 얼마 없으니까."
"멋진 성……?"
그건 동의하기 어려운데.
"먼지만 걷어내면 꽤 볼만해질거야.
나 정도 되는 심미안이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지."
"몰랐던 사실이네."
잘 보면 허전할 틈 없이 그림 장식 같은 게 걸려있긴 하다.
전혀 관심이 없어서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마왕님에게도 전성기라는 게 있었겠지. 청소는 솔직히 사람 손 없으면 힘들었을 거다. 넓어
보이기도 하고.
"나는 아리엘과 얘기하고 올게.
마물들 좀 치워달라고 해야지. 포악한 오물? 이제 그것들은 꼴도 보기 싫어."
"……동감입니다."
네리스, 헤르카와 헤어진 후.
나는 바로 아리엘을 찾아갔다.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2층으로 올라간 후 아리엘을 부르며 복도를 걷는다.
그러자 아리엘이 드레스 룸으로 추정되는 방에서 나왔다.
또 로브 걸치고 있네.
"안에는 속옷만 입었지?"
"이게 편하다."
"니트야?"
"……틀어박힌 생활을 하다 보면 이렇게 돼.
세탁물이 늘어나면 귀찮을 뿐이다."
…….
세탁도 직접 하면서 지냈구나.
팔색 조개 성이 워낙 편리한 나머지 득을 본 게 많았지.
옷은 여벌이 많아서 틈만 나면 새 옷을 꺼내어 입을 정도다.
우리 니트 마왕님은 후드를 쓰고 침침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뭐냐.
할 말 있으면 얼른 해라. 자게."
"용사가 왕국으로 돌아간대.
마물 좀 싹 치워줄 수 있어?"
"진작 해 놓았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엉덩이가 꼴리는 마왕"
"……."
"히키코모리 마왕?"
아리엘은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벨리사가 원한다면 내가 차원 마법으로 이동 시켜 줄 수도 있는데."
"나도 물어보긴 했는데, 거절하더라.
거기에, 너는 대원들 앞에서 그런 굉장한 마법 쓰면 안 되잖아."
"마음을 조종하는 신이 그런 걸 왜 신경 쓰는지 모르겠군.
다시 최면을 걸면 되는 거 아닌가."
"거슬리는 걸 하나부터 열까지 고치면 끝이 없어.
리사가 하겠다는 대로 두는 게 낫지."
아리엘이 재밌는 상상을 한 듯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아아. 알겠다.
내가 차원 마법을 써도 대원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을 네 모습을 상상해본 참이다."
"……최면이 생활인 나에게는 그것도 제법 귀찮단 말이지.
유격대가 흩어지면 리사만 쏙 데려올 거야.
복잡한 일은 시아가 도맡아서 해줄 거고."
'복잡한 일은 시종에게 맡긴다'
그것이 내 방침이다.
리사는 떠났으니 이 문제는 내 손을 떠났다.
"아, 성에 내 식구들을 불러도 되지?"
"마음대로 해라.
어지럽히지만 않으면 된다."
"그리고 아리엘도 내 성의 식구가 돼 줬으면 해."
"음."
아리엘은 내가 건넨 팔색 진주를 받아들였다.
굳이 주지 않아도 셀레네가 교육하겠지만.
"……이건 받지 않겠다."
"엥? 왜?"
진주를 반납할 줄은 몰랐던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얼빠진 소리를 냈다.
"왜냐니.
사생활 침해다."
윽…!?
엿보기 기능이 있다는 걸 간파당했다.
역시나 마왕인가.
"이게 있어야 성에 들어올 수 있는데?"
"그러면 내가 기능을 일부 제한하겠는데. 그래도 상관없겠지."
아리엘은 내 손바닥에 놓인 진주를 잽싸게 가져갔다.
"그래…."
아리엘을 훔쳐볼 수 없다니. 좀 아쉽네.
자위하거나 옷 벗는 장면을 발견하면 꼴리는데.
뭐, 나중에 기능을 풀어달라고 하자.
정액받이 마왕일 때는 기꺼이 들어줄 거다.
"그러면 가보겠다.
아아, 불알이 꽉 차서 정액 뽑고 싶을 때는 말해.
그때는 바로 오겠다."
"그래."
암시는 여전히 유효하다.
내가 불알이 꽉 찼다든지, 정액 싸고 싶다는 식으로 말하면 아리엘은 하던 일을 모두 멈추
고
내 정액을 착취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상시 그러면 곤란하니까. 지금은 서로를 위해서라도 정액을 다 싼 척하는 편이 나았
다.
아리엘도 내가 얼마든지 쌀 수 있다는 사실은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겠지만…….
뭐, 암묵의 합의다.
리사를 배웅하고 1층 홀에 대왕 팔색 조개를 내려놓는다.
적당하군.
"현우 오빠."
서연이 뒤에서 훅하고 나타났다.
"깜짝이야."
언제 나타났어?
"오빠 곁에 용사도 마왕도 없을 때를 노렸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대답한다.
"그렇게 싫은 티 내지 말고, 친해져 보는 건 어때?"
"싫어.
지금, 이 순간도 오빠를 사랑하는 건 나뿐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다른 여자들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는걸……."
"……."
그래. 이게 서연이지.
조개 성 식구 중에서 유일하게 그녀만이, 다른 여자를 적대시할 정도로 나를 독점하고 싶어
한다.
그 사실이 기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칼 들고 덮치거나 하면 안 돼."
"오빠는.
내가 아직도 그때와 같은 줄 알아?"
"그때와 같았으면 나는 주검이 됐겠지……. 등을 푹! 하고 찔려서."
"등이 아니라 여기였어."
서연이 손가락으로 내 배를 누르고 내장의 위치를 정확히 그린다.
"여기. 이쯤.
동맥을 끊기에는 소지한 칼의 길이가 모자랐으니까."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지 마라.
무섭잖아."
"그때는 오빠와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 줄 알았거든…."
"……."
"오빠."
"응?"
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오빠한테 몹쓸 짓 많이 했지. 나."
"아니라고는 못 하겠는데.
나도 너한테 몹쓸 짓 많이 했으니까. 서로 잘 어울리는 커플 아냐?"
"우리, 이제 그때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그래도 나는 그때보다 오빠를 더 사랑해."
"그 말 하려고 뒤에서 나타났어?"
"응."
서연은 귀엽게 웃었다.
언젠가 캠퍼스에서 봤던 모습이 떠올랐다.
교복 입고 있던 모습도.
내 앞에 앉아서 끙끙대며 공부하던 얼굴도.
"오빠랑 나…….
굉장히 먼 곳까지 와버렸네."
"그러네.
용사 파티보다 훨씬 멀리……."
나와 서연이는 다른 세계의 이방인.
과거의 기억이 선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눈빛만으로 많은 감정을 나눌 수 있었다.
"오빠는 이 세계가 마음에 들어?"
"시아가 만들어 준 세계야.
마음에 들지 않을 리 없지."
"그럼 나도…… 오빠와 여기서 머물고 싶어. 언제까지나.
응. 사정 관리당하고 싶을 땐 말해."
"그건 아직도 포기 안 했냐."
"당연하지. 현우 오빠랑 평생 함께할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어. 정말로, 뭐든지."
"그래도 죽지는 마."
서연이는 너무 뒤가 없으니까.
그것만이 걱정이다.
"죽으면 오빠를 볼 수 없으니까, 안 죽어."
"이제 한 걸음 남았어.
다 끝나면 성에서,
예전에 보다가 만 영화나 같이 마저 보자."
"응! 아, 오빠.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서연이 대뜸 말했다.
"뭔데?"
"오빠. 여자친구 몇 명?"
"……'여자친구'라고 불리는 여자만?
아니면 여자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여자?"
"일단은 '여자친구'라고 불리는 쪽."
"이스티, 너, 리사."
세 명이네.
자지의 신부가 된 틸리아와
신부 지망인 디아나도 있지만,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모호하다.
"좋아. 기억했어."
"……사이좋게 지내라."
"그저 누가 오빠를 가장 사랑하는지 깨닫게 해줄 생각일 뿐이야."
나는 서연을 꼬옥 안고 키스했다.
"웁, 하움?"
서연은 바로 나한테 달라붙어서 키스에 응했다.
"츄루루……. 쮸우…. 쯉……. 현우 오빠아…."
"그런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지금은 네가 제일 좋아."
"지금 말고, 계속 나 사랑해 줘…. 계속……. 나만 바라봐 줘."
서연이가 내 몸에 매달려서 귀엽게 보챘다.
미쳐 날뛸 때 비하면 지금은 천사나 다름없다.
"때가 되면 사정 관리 부탁할게.
그때까지는…… 착한 여자친구로 있어 줘. 알았지?"
"하으……. 응……. 현우 오빠가 부탁하면, 나, 거절할 수 없어……."
서연이는 나를 꼭 안고 행복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서연이가 만족할 때까지 안아주었다.
"잠깐 성에 갔다 올게.
기다릴 수 있지?"
"응. 초 단위로 세면서 기다릴까?"
서연이의 뺨을 손가락으로 잡고 늘린다.
"아부브…."
"그냥 마음 편히 기다려.
네 곁에 다시 돌아올 테니까."
"네…… 오빠…♥"
나는 서연이를 떼어 놓고─달라붙어서 꽤 힘들었다─ 팔색 조개 성으로 이동했다.
오랜만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반가운 얼굴은 어디에 있나 볼까.
"오빠!!"
뒤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
돌아보기도 전에 누군지 알았다.
서연이가 알면 엄청나게 질투했겠지.
'현우 오빠를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할 정도니까.
이 밝고 예쁜 목소리로 날 오빠라고 부르는 건 성에 한 명뿐이다.
카렌이 웃는 얼굴로 내 앞에 바짝 붙었다.
"어서 와!"
"카렌."
"으응."
카렌은 그거 아니야, 라는 듯이 젖가슴을 살살 흔들며 몸짓한다.
"좆집아."
"응!"
나는 카렌을 껴안았다.
좆집의 젖탱이를 느끼며 기쁨에 잠긴다.
카렌은 내가 젖가슴을 느낄 수 있도록 살살 비벼오며 요망하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오빠가 좋아하는 젖가슴♥"
나는 참지 못하고 카렌의 젖탱이를 옷 위로 주물렀다.
"시아와 벨라는 어디에 있어?"
직접 확인해도 되지만,
괜히 젖탱이 조물조물하면서 카렌의 예쁜 얼굴을 느긋하게 감상한다.
"흣…. 응……. 후으….
학생회장님은 일하러……. 벨라 씨는 안쪽에…."
"고마워."
아쉬운 마음으로 카렌의 젖탱이에서 손을 뗀다.
"나 찾았어?"
벨라가 1층 홀의 옥좌에 나타났다.
불의 여신님은 내가 알던 모습 그대로.
다리를 드러낸 하얀 슬릿 드레스를 입고 선명하게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여신 아니
랄까 봐 잘난 듯 턱부터 든다.
반가운 마음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왜 보자마자 음흉하게 웃는데?"
"일단 엉덩이 맞자."
"하아……. 나, 명색이 불의 여신인데."
벨라는 기가 막힌 듯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계속 바라보고 있었더니, 얌전히 엉덩이를 대고 몸을 숙인다.
나는 벨라 곁으로 가서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착, 착 때렸다.
"앗…. 읏…."
"주인님 마중이 늦잖아. 응?"
"죄송해요…. 앗…. 주인님……. 보지 노예인데, 까불어서 죄송해요♥"
엉덩이 좀 때려주면 언제 까불었냐는 듯이 바로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내준다.
솔직하게 호감을 부딪쳐오는 게 카렌의 매력이라면, 이런 변태 짓에 스위치가 켜지는 게 벨
라의 매력.
나는 오랜만에 상 주는 기분으로 벨라의 하얀 엉덩이를 가볍게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늦은 만큼 혼나야지."
"앗, 흐읏…. 아…….
카렌이 보고 있는데……."
"카렌이 봐서 차라리 다행이지.
카렌은 네가 어떤 보지 노예인지 다 알잖아.
새로 올 식구들이 엉덩이 맞으며 기뻐하는 불의 여신님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어?"
"……흐읏……. 읏…!"
벨라가 엉덩이를 치켜들고 내 손에 맞는 게 기쁜 듯이 살살 허리를 흔든다.
음란한 몸짓이다.
보지 노예로 사는 게 몸에 밴 우리 불의 여신님.
제르미나 공략을 앞둔 지금, 이 세계로 올 때 처음 만났던 벨라를 만나고 싶었다.
나는 손을 멈췄다.
"보고 싶었어. 벨라."
벨라는 몸을 일으키고,
아직 엉덩이 맞기에 취한 듯 살짝 풀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주인님과 만나서 기뻐."
"기분 나쁘게 웃는다고 하더니."
"그건, 그거야."
"혼나고 싶었어?"
"……."
벨라는 고개를 끄덕인다.
"주인님께 굴복한 보지 노예니까…….
언제든, 야하게 혼나고 싶은 거야…."
"그것도 좋지만, 급한 일이 남았어.
이쪽에서 새로 얻은 정보는 없어?"
시아가 자리에 없을 때 벨라를 찾는 건 나한테 당연한 일이다.
나는 시아를 공략할 때조차 벨라의 도움을 받았으니까.
내가 위급할 때 큰 힘이 되어주는, 여신 겸 노예다.
"접대실로 장소를 옮기는 편이 낫겠어.
카렌도 올래?"
"네! 갈게요."
우리는 벨라를 따라서 접대실로 이동했다.
예전에 용사 학교로 갈지 말지 논의할 때 썼던 방이다.
벨라는 누군가를 부른 듯했다.
1층 알현실이 아니라 이곳을 고른 이유는 긴 얘기가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장소 선택에 불만은 없었다.
나는 왕처럼 옥좌에 앉아 있으면 편하지만, 다른 사람은 서 있어야 하니까.
차라리 모두 앉을 자리가 있는 접대실이 나았다.
"벨라?"
"앉아서 기다려. 지금 불렀으니까."
벨라가 창가에 서서 바깥을 보고 있는 가운데,
나와 카렌은 얌전히 앉아서 이 방에 올 누군가를 기다렸다.
"카렌. 붙어 봐."
"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