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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세계 최면물-271화 (271/414)
  • 271화

    규모를 봐서는 예전에 많은 사람이 살았을 법한 마을이다.

    지금은 잡동사니 가득한 쓰레기 처리장, 혹은 유령이 나오는 음산한 폐허처럼 보였지만,

    그래서 몸을 숨기기는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을 풀지 마라."

    리사는 말을 천천히 나아가게 했다.

    우리는 매복을 경계하며 리사의 뒤를 따랐다.

    큰 대로 중앙에는 무너진 건물 잔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말을 타고 이 앞을 지나가는 건 무리가 있어 보였다.

    물론 이 정도 잔해는 마법으로 부수면 치울 수 있지만, 당연히 큰 소리가 나겠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블램이 리사에게 물었다.

    리사는 잔해 더미에 눈길을 주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매복은 없는 것 같군.

    덮친다면 지금이 호기인데, 그럴 낌새가 없다.

    날이 밝을 때까지 이 마을에서 휴식하도록 하지."

    "버려진 마을일까요?"

    "글쎄. 누구든, 이 마을에 대해 아는 자 있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

    비교적 멀쩡한 집에도 세월의 흔적이 그림자처럼 드리운 걸 보면

    이 이름 없는 마을은 버려진 지 50년은 되는 것 같았다.

    "쉴만한 데가 있는지 찾아보는 게 좋겠군.

    오이아. 주변 경계를 부탁한다."

    "일단 조사도 할까요?"

    "그래."

    "브루노! 같이 가자."

    "조사는 저 혼자 충분합니다."

    "안 돼!

    위험한 게 있으면 어떻게 해? 곰 덫이라거나!"

    "버려진 마을에 곰 덫이 왜 있어요?"

    다들 말에서 내려 적당한 곳에 묶어 놓았다.

    후방지원팀이 바쁘게 움직인다.

    말의 관리, 주변 경계, 조사……. 이름 없는 마을이 은신처로 삼기에 적합한 곳인지

    검토하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중,

    리사는 남은 이들을 불러들였다.

    "데칼. 반마신을 직접 본 인상은 어땠지?"

    "상처도 회복했고, 전보다 훨씬 강해졌어."

    리사도 알겠지만, 중요한 사실이라서 짚고 넘어간다.

    "그래. 분명히 치명상이었을 텐데,

    회복도 성장도 너무 빨라. 마치……."

    리사는 말을 줄였다.

    마치…… 여신의 대리인처럼?

    짚이는 구석은 있는 것 같지만, 함부로 말할 수 없었겠지.

    나와 용사, 그리고 박서연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셋 다 여신의 대리인이며 여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서연은 질투의 가호를, 용사는 빛의 가호를.

    나는 불의 가호와 빛의 가호 둘 다.

    그런데 우습게도 내가 셋 중에 제일 약하다.

    시아의 도움 덕분에 돌연사하지 않을 정도로 강해지긴 했지만, 상황이 좋지는 않다.

    서연에게 최면을 건다고 해도 직접 마주 보고 얘기할 거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서연이 저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이게 예상 밖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데칼의 생각을 들려줘."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는 이상 이쪽에서 손을 댈 방법이 없어.

    우리 중 비행하며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모두의 시선이 헤르카에게 쏠렸다.

    헤르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틈이 안 나.

    강화 마법, 방어 마법, 보호 마법을 바쁘게 돌리면서 허겁지겁 피하는 게 고작이야."

    "서연을 떨어뜨릴 방법은 없을까?"

    "공중에서 격추하는 건 무리야. 그 여자, 보기보다 굉장히 빨리 날고 있거든."

    날고 있다…….

    이럴 때 이스티가 없는 게 아쉽다.

    조개를 꺼내면 언제든 부를 수 있긴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악몽갈퀴, 포악한 마물, 이계 괴물…….

    아이 엄마에게 보여줄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여기 일은 여기서 처리한다.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굳게 마음먹는다.

    "내려오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안 돼.

    최대한 박서연의 사고방식으로 접근한다.

    "어떤 방법이지?"

    모두 내 이야기에 집중했다.

    "한 가지 확실해진 점이 있어.

    박서연이 우리 위치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나타나서 공격을 퍼부었다는 건,

    그 녀석의 관심사는 오직 나라는 거야. 마왕군도, 유격대도, 전혀 관심 없겠지."

    토니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데칼을 쫓아서 여기까지 올 정도니까."

    헤르카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유격대를 무력화시키려고 했어.

    그러면 자기 목적이 이루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거야."

    "그래.

    하지만 나와 유격대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무조건 나를 고르겠지."

    "그건, 그렇지만……."

    "애초에 왜 내려오지 않을까?

    다른 사람은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어도, 리사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겠지."

    본인 입으로 듣기 전까지 진짜 이유는 알 수 없겠지만,

    정황상 리사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다.

    "한 번 용사한테 패배한 적이 있으니까?"

    "리사는 너무 압도적이었거든."

    아무리 서연이 레벨을 올린다 한들, 리사는 이길 수 없다.

    '만에 하나' 도 없다.

    그 정도로 둘 사이의 격차는 컸다.

    "……."

    "헤르카. 뭐 이상한 점이라도 있어?"

    "데칼 말에 따르면, 다른 녀석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거잖아. 그 여자는."

    "그렇지."

    "나였으면 용사를 강하게 의식했을 거야.

    아니,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야. 나한테 패배라는 굴욕과 모욕을 맛보여준 상대인 데다,

    목표물……인 데칼을 얻는 길에 걸림돌까지 되고 있잖아? 용사한테 닥치는 대로 공격을 퍼붓는 게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그건 너무 정상적인 감성이야."

    "정상적인 감성?"

    헤르카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천재 소녀라도 모르는 게 있구나."

    "뭔데!? 궁금하게 하지 말고, 빨리이."

    헤르카가 귀엽게 보챈다.

    "알고 보면 단순한 거야.

    나는 서연을 내려오게 할 방법이 있다고 했지. 그리고 다음에 뭐라고 했어?"

    "그 미치광이 여자의 관심사가 데칼 뿐이라는 거?"

    "그래."

    그날.

    박서연과 헤어진 날, 나는 박서연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로 만들었다.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나는 여신의 간섭으로 정신이 나갔었고.

    그걸 변명으로 삼아도 내 의지로 암시를 걸었다는 건 틀림없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저 에페에게 연애 상담을 받고 부추김당했을 뿐인, 내 소꿉친구 박서연은

    내 암시로 인해 미쳐버린다.

    "나를 생각하는 것 외에는 모두 망가진 거야."

    "……."

    "졌다고 굴욕감을 느낄 리도 없지.

    리사와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건 그저 하나의 사실일 뿐,

    연적이라면 모를까, 당한 만큼 갚아 주겠다고 생각할 리 없어."

    헤르카는 무언가 눈치챈 듯했다.

    "데칼이 말하는 방법이라는 거. 혹시……."

    "그래. 리사가 날 도울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지면 돼.

    그것만으로 서연은 내려올 거야."

    "일부러 그대를 위험하게 내버려 두라는 뜻인가?"

    리사는 기가 막힌 듯했다.

    "시도해볼 만은 해.

    어차피 내려오지 않으면 건드릴 수도 없잖아?"

    "……."

    "내 생각은 모두 전했어.

    결정해줘. 리사."

    난처한 것 같다.

    투구를 쓰고 있어도, 리사가 곤혹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데칼, 그대가 박서연의 상대를 맡는 것과

    내가 일부러 그대를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방치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분명히 구별하고 있나?"

    "알고 있어."

    "나는 허락할 수 없어."

    "리사……."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면 더욱더 그렇다.

    나는 데칼, 네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다."

    "……."

    뜻밖에 설레는 말이었다.

    "이건 듣지 않았던 것으로 하겠다."

    "그러면 방법이……."

    "방법은 있다."

    리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그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지원팀을 포함해,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내가 가장 신뢰하는 대원들.

    모두 함께 생각하면 반드시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

    "……."

    뻔한 말.

    뻔한 말이지만…….

    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같은 심정이었는지 음산한 폐허에는 훈훈한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뭐, 뭐냐.

    장난치는 게 아니다. 나는 진심이야."

    "알아. 다들 용사님을 따르는 이유를 알겠어."

    "음."

    앙겔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토니우스는 계속 실없이 웃는다.

    "이거 참.

    마법사들이 나설 차례 같네요.

    헤르카 양. 같이 방법을 생각해 볼래요?"

    "으으……."

    헤르카는 벌써 머리가 복잡한지, 끙끙 신음했다.

    "새 마법을 만드는 수밖에 없나……."

    지금 뭐라고……?

    "주군.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하면, 좋은 방법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네리스까지…….

    "알았어.

    지원팀에도 물어봐야지. 좋은 아이디어가 있을지도 모르고."

    리사는 즐거운 듯 말했다.

    "바로 그 마음이다. 데칼.

    뭐든지 혼자 하려고 할 필요 없어. 우린 협력해서 함께 나아가면 되니까.

    그걸 위한 팀, 그걸 위한 유격대다."

    "……."

    뭐지.

    리사가 쓰고 있는 갑갑한 철 투구도 예뻐 보인다.

    마음도 예쁘다는 건 이럴 때 하는 말이구나.

    너무 눈부셔서 똑바로 볼 수 없을 지경이다.

    "후방지원팀이 돌아오는군."

    브루노의 조사 결과.

    이름 없는 마을은 안전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근처에 위험한 마물이 많아서 오히려 마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주변에 사람 사는 마을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도적의 근거지가 됐든, 노숙자의 은신처가 됐든 했을 테지만요."

    브루노의 보고를 들은 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에겐 잘된 일이다.

    적당한 건물에 들어가서 쉬도록 하지."

    "네~! 아, 용사님.

    우리가 괜찮은 집도 찾아놓았어요. 가요!"

    오이아가 밝은 목소리로 떠든다.

    "음. 침대가 있었으면 좋겠군."

    모두 오이아를 따라 한 방향으로 걷는다.

    서연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최면을 수없이 다룬 만큼, 서연의 마음속에 일어난 일은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다.

    「내가 없으면 불행해진다.」

    나와 떨어져 있을 때는 삶의 질이 떨어지는 정도로 견딜 만 했겠지만,

    내가 칼 맞고 죽은 후에는 나를 다시 볼 수 없어서 끔찍한 우울감에 시달렸겠지.

    마음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만큼.

    그렇게 된 인간은 강한 약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사회에서 격리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최면은 강력해서 마음이 망가진 인간도 놓아주지 않는다.

    서연은 내 생각만 해서 마음의 아픔을 달래려고 했을 거다.

    그 암시에서 벗어나려면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이제 곧 오빠를 만난다' 같은 식으로 자신을 속이면 조금은 나을 테니까.

    나를 떠올리는 것이 곧 구원이라면.

    집착이 되는 건 금방이다.

    그녀가 겪었을 정신적 고통을 생각하면 이세계 마물과 인간을 작두로 해체하고 다녀도 이상할 게 없다.

    착하고 사랑스러운 여대생, 박서연과 지금의 박서연은 전혀 다른 존재.

    그러나 분명히 같은 사람이기도 하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없으면 불행해진다」…….

    서연에게 건 암시는 이게 전부다.

    실수로라도 날 사랑해라! 같은 암시는 걸지 않았다.

    애초에 불행 암시는 우리 관계가 깨질 때 걸었던 것.

    칼로 찌른 게 나와 영원히 함께 있기 위함이라면,

    왜 그 녀석은…… 날 미워하지 않는 거지?

    최면을 모른다 해도, 자기 인생이 나 때문에 이렇게 망가졌는데?

    "……."

    발을 멈춘 나를, 네리스가 돌아본다.

    "주군.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다고 해도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 녀석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

    "네?"

    서연을 내 업보라고 생각해왔다.

    실제로 그녀는 나를 쫓아 세계를 도약했다.

    마른 마을에서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면 딱 마주쳤겠지.

    날 죽이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니, 그대로 변사체가 됐을지도 모른다.

    시아의 설계가 없었더라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어.

    업보는 업보인데 내 죗값을 치르게 하려는 업보가 아니었다.

    내가 구해야 해.

    "배고프다. 얼른 가자."

    "이런 곳입니다. 대단한 식사는 기대하기 어렵겠죠.

    제 몫을 드릴까요?"

    "네리스 것을 내가 왜 뺏어……."

    타이밍 좋게 네리스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났다.

    "……."

    네리스가 귀를 빨갛게 물들이고 성큼성큼 앞서 걸어간다.

    "배고팠구나. 우리 네리스."

    "생리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오늘은 배불리 먹을까. 조개 소환할게."

    멈칫.

    그녀의 발이 멈췄다.

    "솔깃했어?"

    "……모두 데려갈 생각입니까?"

    "그럴 리 있냐.

    내 성에 남자는 못 들어와. 여자도 선택받은 사람만 들어올 수 있지."

    "주군의 기준으로 선택된 여성이겠군요."

    "그럼, 예쁜 건 기본이야. 몸매가 꼴리면 더욱더 좋고, 강인하기까지 하면 최고지."

    "하지만, 다른 대원을 빼놓고 호의호식하는 건 좀 꺼려집니다."

    "음식을 가져오면 되잖아.

    도시락을 만들어 달라고 해볼게."

    "좋은 생각입니다."

    "적당히 때를 봐서 말할 테니까, 말 좀 잘 맞춰 줘."

    "맡겨주십시오."

    네리스의 눈빛에 의욕이 넘쳤다.

    식량 부족은 아니지만, 맛있는 밥은 역시 중요하다.

    "데칼~. 네리스~. 여기야! 어서 와!"

    오이아가 멀리서 손을 흔들며 우리를 부른다.

    브루노는 큰 소리 내면 안 된다며 곁에서 안절부절못한다.

    그녀 뒤에 있는 건 제법 큰 저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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