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파이어 애로우!"
헤르카의 마법으로 인해 때아닌 낮을 맞이한 전장에 불꽃이 피어오른다.
유니크 스킬 해를 가리는 자의 효과로, 마법을 즉시 시전.
눈 깜짝할 새에 개수를 무진장하게 불린다.
두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던 불화살은 세 자릿수를 넘어가면서 모두의 시선을 빼앗았다.
"불 마법이다!
모두 열기를 조심해!"
블램이 외쳤다.
불 마법은 피해 범위가 넓어서 아군까지 다치게 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정신 없는 전장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다.
내가 훨씬 강한 마법들 내버려 두고 가장 약한 파이어 애로우를 먼저 시전한 이유는,
해가의 유도 기능을 점검하기 위한 시운전.
"가라."
나는 손으로 적들을 가리켰다.
파이어 애로우는 붉은 궤적을 남기고 적들에게 날아갔다.
다수의 악몽갈퀴는 민첩하게 움직여 직선 궤도에서 벗어나려 들었지만,
귀여운 발버둥이다.
파이어 애로우는 공중에서 방향을 자유자재로 전환, 목표로 한 타깃을 맞힐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걸 보면서 적의 HP를 계산해봤다.
가장 약한 놈은 파이어 애로우 네 발이면 죽는군.
40발이면 열 마리는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우리 유격대와 전투 중이라서 지친 놈들.
그런 놈들은 급소를 노리기 쉽다. 목이나 가슴 정중앙, 머리를 노리면 한 발 내지 두 발로 처리할 수도 있었다.
"우와! 데칼 굉장해.
전부 다 노린 대로 맞았어!"
오이아의 목소리다.
후방지원팀은 토니우스 뒤에 숨어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조금 더 힘내볼까?
"파이어 애로우."
이번에는 120발 장전.
악몽갈퀴가 뒷걸음질 친다.
"……."
뭐야.
나, 왜 이렇게 세지?
이스티가 죽인 괴물의 유니크 스킬은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불의 여신의 가호를 받는 고위력의 오버 차징 파이어 애로우를,
적중률 100%로 난사한다!
마치 움직이는 포대다.
덕분에 적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기초 마법을 이런 경지까지 숙련하다니! 놀랍군.
내가 지원하겠다!"
마케르는 내 화력으로 인해 전황이 바뀌었음을 직감했는지
바로 흑마 뒤에 붙어서, 몰려오는 악몽갈퀴를 봉으로 쳐내고 두드리며 네리스의 부담을 덜었다.
"형! 나도!"
압베트도 참전해서 네리스의 사각을 보완한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마물을 포착하는 대로 파이어 애로우를 만들어서 쏘아 보냈고,
네리스는 달라붙는 마물을 창으로 쳐내면서 차분하게 공간을 만들었다.
우리는 마치 바다를 가르고 들어가
끊임없이 밀려오는 물결을 걷어내는 것처럼 싸우고 있었다.
물이 우리를 완전히 집어삼키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진짜 바닷물은 아니기에 승산은 있었다.
적들은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하피를 잃었고, 내 화력에 압도되어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예전이었으면 진작 마력이 바닥나서 물병을 입에 물고 싸워야 했을 상황인데,
마력을 반도 쓰지 않고 악몽갈퀴의 기세를 꺾어버렸다.
겨우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긴 나는, 후방지원팀이 있는 쪽을 봤다.
전투원도 없이 어떻게 버티고 있지?
토니우스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태평하게 웃었다.
"이쪽은 걱정하지 마."
그는 한 손에 책을 들고 손으로 무언가를 지휘한다.
"저게 뭐야?"
네리스가 뒤를 보고 말했다.
"토니우스 씨는 소환사입니다.
적이 대규모 물량 공세로 나와도 대응할 수 있게끔,
용사님이 모셔온 분입니다."
"그렇게 치켜세우지 마.
그저 시간 벌기가 특기라서 뽑혔을 뿐이니까."
시간 벌기라니,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토니우스가 거느린 괴물은 바닥에서 솟아난 전장 5m에 달하는 촉수였는데,
땅을 수면처럼 미끄러지면서 적들을 밀쳐내고, 사로잡아 으깼다.
촉수를 다루는 마법……. 굉장하다.
"저런 마법도 있구나."
토니우스는 빙긋 웃었다.
"의외지?
용사 후보가 흑마법을 다루다니."
"좋아 보이는데?"
최면으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내가
흑마법에 엉뚱한 편견을 가질 리도 없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이 촉수 소환술은 이세계의 마도서에 적혀있는 특수한 유니크 스킬이야.
아직까지 사용법을 아는 건 나뿐이지."
쿵, 쿵 지면이 울린다.
후방지원팀 쪽으로 악몽갈퀴 성체가 다가가고 있었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뼈 수레바퀴를 휘둘러 촉수를 쳐냈다.
"이런, 한가롭게 얘기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지."
하지만 곧 몰려든 촉수가 성체를 묶어서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파이어 애로우!"
나는 그틈에 달려드는 작은 악몽갈퀴를 마법으로 제거했다.
"고마워. 데칼.
하지만 이쪽은 내게 맡기고, 전진해! 후방지원팀은 내가 안전하게 데려갈 테니까."
그러는 게 좋겠군.
토니우스의 수비는 굳건하다.
내가 굳이 돕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네리스. 가자!
블램이랑 앙겔 도우러!"
"네."
그때, 앙겔과 맞붙던 악몽갈퀴 성체의 큰 몸이 기우뚱하더니 바닥에 고꾸라졌다.
"도움?"
앙겔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이번에 들어온 후보들 기세가 좋기는 하군.
우리가 근심을 사다니 말이야."
블램이 상대하던 성체 역시 온몸이 조각나 쓰러진다.
둘 다 대단한데?
"주군. 길이 열렸습니다. 꽉 붙잡으세요!"
"그래!"
나는 네리스에게 달라붙었다.
흑마가 힘차게 지면을 박차고 내달린다.
블램과 앙겔이 뚫은 길을 지나자,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기묘한 연체 생물들이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으아악!"
뭐야. 이 좆같은 생물체는!
보기만 해도 이성이 떨어질 것 같잖아!
"포악한 오물들이네요."
"이름이 그래?"
"네. 포악한 오물."
"……."
오물처럼 더러워 보이긴 한다.
"끈질긴 놈들입니다. 말을 움직이기 힘들겠어요."
네리스가 멈춰서 창을 휘두른다.
두 동강 난 포악 오물은 바닥에 철퍽 떨어져 더는 움직이지 않는 듯하다가
꾸물거리며 재생하더니 다시 움직인다.
으으…….
"이놈들은 산을 뿜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조심하라고 해도……."
그때 헤르카의 광탄 폭격이 포악 오물들의 몸을 관통했다.
"헤르카!"
"데칼. 그대로 나아가! 내가 길을 뚫을게."
"하지만……."
몸에 구멍 난 정도로는 안 될 텐데?
흑마가 달린다.
묘하게도 헤르카의 공격을 받은 포악 오물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헤르카가 공격한 놈들은 그대로 누워있는데?"
"빛 마법은 이계에서 온 사악한 생명체에게 효과적입니다.
이대로 길을 뚫겠습니다."
"그래…!"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졌다.
헤르카의 마법이 끝났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무언가 거대한 것이 우리 쪽에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거대하다.
키가 십 미터는 거뜬히 넘는 거대한 이계 괴물.
네리스는 급하게 고삐를 당기고 방향을 틀었다.
이계 괴물이 묵직한 팔을 휘둘러 지면을 강타했다.
온몸이 흔들린다.
네리스의 빠른 회피가 아니었으면 말이랑 함께 바닥을 뒹굴고도 남았을 충격이었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저걸 어떻게 뚫지?"
"가까이 접근해 보겠습니다. 주군의 마법으로 쓰러뜨려 주세요!"
"좋아…!"
그렇다면 가장 강한 마법으로 가자.
유니크 스킬 '별 떨구기' 는 범위를 예상할 수 없으니까.
나는 광범위 기술 중 가장 파괴력이 강한 파이어 볼을 선택했다.
"파이어 볼!"
바람의 장막으로 열기를 억누르면서, 파이어 볼에 마력을 집어넣는다.
오버 차징 작업은 순조로웠다.
레벨이 천 삼백을 웃도는 내가 모든 것을 집중해서 사용하는 파이어 볼.
메테오가 부럽지 않은 파괴력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준비됐어!"
"들어갑니다!"
네리스는 포악 오물들을 모조리 떨쳐내고 달려든다.
목표는 거대한 이계 괴물.
나는 파이어 볼을 겨냥하고 쏠 준비를 마쳤다.
조금 더…….
너무 가까워도 안 된다. 폭발 여파에, 네리스가 휘말릴 가능성이 컸다.
지금이다……!!
"가라!"
나는 파이어 볼을 놓아주었다.
파이어 볼은 빨려 들어가듯이 적의 몸으로 쑥 들어가서, 엄청난 열기로 주변을 집어삼켰다.
"네리스!"
네리스는 방향을 돌리고 충격파에서 벗어난다.
쾅!!
폭압이 지면을 흔든다.
열기는 이계 괴물을 집어삼키고 주변에 있던 포악 오물들까지 깨끗이 날려버렸다.
"해치웠나?!"
그때, 연기를 가르고 무언가가 날아왔다.
이계 괴물의 팔이었다.
"아……!"
흑마의 바로 옆에!
충격파로 균형을 잃은 흑마는 옆으로 쓰러지고, 나와 네리스도 낙마했다.
나는 뒷덜미를 감싸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몸에 날카로운 아픔이 달린다.
"네리스!"
네리스는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주변에 몰려오는 포악한 오물들을 쳐내고 있었다.
"주군. 일어나십시오. 여기 있으면 위험합니다!"
"윽……."
젠장.
그만한 위력의 마법을 맞고 안 죽었어?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자존심 상했다.
이계 괴물은 연기 속에서 멀쩡하게 우리를 내다보며 기다란 팔을 휘둘렀다.
그 팔 휘두르기 한 번이 천재지변 같은 위력을 자랑해서, 도저히 접근 불가.
블램과 앙겔도 어찌 손을 써야 할지 알지 못하고 몰려오는 오물들만 밀쳐내는 형국이었다.
그때였다.
"내가 하겠다."
"리사!!"
용사가 검을 빼 들었다.
리사는 말을 타고 달려간다.
포악한 오물들이 일제히 뛰어올라 리사의 몸을 뒤덮지만, 잠깐의 번뜩임과 함께 놈들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잘게 썰려서 피를 뿌렸다.
리사는 피의 비가 몸을 더럽히기도 전에 쭉쭉 앞으로 나아가서, 이계 괴물에게 육박.
놈이 팔을 휘두르기 직전 말에서 뛰어올랐다.
뭘 한 거지?
수준이 너무 달라서 알아볼 수 없었다.
육섬팔뢰를 쓴 것 같지는 않은데,
이계 괴물은 온몸이 조각나서 터져버렸다. 리사의 검격이 만든 빛이 뒤늦게 궤적을 그리며 공간을 가른다.
처음 보는 나만 놀라는 줄 알았는데 다들 경악하는 분위기다.
용사의 무예는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아니, 사람 맞아?
후드둑 떨어지는 고기 조각의 건너편에서 리사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데칼. 따라와라!"
흑마는 어느새 스스로 일어나 말발굽으로 포악한 오물들을 두드려 패고 있었다.
"주군!"
네리스가 먼저 올라타서 손을 내민다.
나는 네리스의 손을 꽉 잡고 올라갔다.
우리는 리사의 뒤를 따랐다.
리사가 만든 피의 길.
웬만한 마물은 용사의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 하는 싸움은 모두 소모전이다.
가능한 한 마왕과 맞닥뜨리기 전까지 리사는 힘을 보전하는 편이 우리에게 이득이었다.
하지만 내 마법이 막히고 네리스가 낙마한 시점에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거다.
나는 분했다.
판단 미스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공격 마법을 써야만 했다.
이곳은 마왕의 땅. 어중간한 마음으로는 싸워 이길 수 없다.
나는 보관함에서 여신의 물병을 꺼내서 마시고,
눈을 크게 떴다. 다음에는 실수하지 않겠어.
네리스는 리사의 등에 바짝 붙어 따라갔다.
우리를 가로막았던 이계 괴물이 또 나타났다.
이번에는 둘, 셋…… 아니 다섯 마리나 있었다.
리사가 검을 빼 든다.
"리사. 나한테 맡겨……!"
흑마가 리사를 앞지르려던 그때였다.
하늘에서 쏟아진 붉은 빛이 이계 괴물의 몸통을 꿰뚫어 무수한 구멍을 만들고,
괴물은 그대로 쓰러졌다.
리사는 붉은 빛을 검으로 쳐내고 멈췄다.
"정지."
뭐지? 리사가 처리한 게 아닌가?
일렁이는 붉은 빛이 몹시 불길하다.
모든 이계 괴물이 쓰러진 후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리사가 무언가 느낀 듯 하늘을 보았다.
나도 따라서 하늘을 본다.
편익을 넓게 펼치고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인영이 보였다.
"박서연…!!"
왔구나!
맞설 준비를 하는데, 서연은 나와 리사를 그대로 지나쳤다.
"설마…!"
리사가 말머리를 돌린다.
여느 때와 같이 나를 노리러 달려들 줄 알았는데,
서연은 명백히 리사와 나를 피했다.
서연의 목적은 뭐지?
서연이 지나간 자리로 붉은빛이 쏟아져 내린다.
"토니우스!"
블램이 외쳤다.
토니우스는 다수의 촉수를 불러내 우산 씌우듯이 아군의 머리를 보호한다.
붉은 소나기를 맞은 마물들은 비록 스쳤어도 생기를 빼앗긴 것처럼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위험하다.
박서연, 더 강해졌어……!!
상처만 회복한 게 아니라 레벨까지 올린 것 같다.
박서연의 존재를 눈치챈 마물들은 신을 배알하는 것처럼 몸을 낮추고 물러난다.
어쩌지? 이대로 발목을 붙잡히면 리사가 서연이를 죽일지도 몰라.
마물의 기세가 누그러진 틈을 타 뒤처졌던 유격대원들이 가까이 따라붙는다.
서연 역시 우리를 따라오며 피의 비를 내렸다.
내려오지 않을 셈이다.
저 녀석 마왕군 때려치웠나? 피아식별 안 하는 건 여전하네!
"저 녀석,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헤르카. 떨어뜨릴 수 있겠어?"
헤르카는 서연이 날리는 붉은 창을 피하느라 바빠 보였다.
안 되겠군……!
서연이 직접 싸울 생각이 없어 보여. 이대로 우리 체력을 소모할 생각이다.
젠장, 왜 저렇게 똑똑해?
"데칼!"
리사가 내 결단을 재촉한다.
"떨어뜨리는 건 무리야. 마물의 기세가 회복되면 우리만 다쳐.
이대로 빠져나가자!"
"알았다. 빠진 사람은 없겠지. 이대로 뿌리친다!"
"예!"
우리는 론그리카 늪지대를 빠져나왔다.
다들 하늘의 적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마물의 추격이 끊어질 때쯤 박서연의 모습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추격을 포기했어? 박서연이?
싸움 방식도 묘하게 졸렬하다.
리사 앞에서 분노 조절이 되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녀가 용사와의 정면 대결을 피하는 방침을 취하고 있다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어렵겠는데.
우리는 그대로 내달려, 폐허가 된 마을에 다다랐다.
"정지. 잠시 말을 쉬게 하고,
폐허를 수색한다."
사람이 살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다들 말없이 말에서 내려 마을로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