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최면의 신
"사람 많네."
"외부인 출입이 허가되는 몇 안 되는 날이니까."
"후보생들 어깨에 힘이 들어갈 만 하군."
"그럼. 학생회장님이 직접, 후보생들 품행 유지에 힘 써달라고 말씀하셨는걸."
학생회장님이 직접 말이지?
"아. 데칼은 못 봤겠구나."
"학생회장을? 아니면 학생회가 내린 지침을?"
"그야 지침 쪽이지. 강당은 박살이 났으니까. 조회에 참여하려 해도 어쩔 수 없지.
기숙사 방에 알림이 왔었어. 아마, 수첩에도 적혀 있을걸?"
학생 수첩을 펼쳐서 확인해본다.
정말 그런 게 있었다.
외부인 출입이 허가되는 특별한 날.
후보생들의 품행 유지에 관한 여러 가지 규칙들. 행동의 결과는 점수로 치른다.
누군가에게는 사사로운 일로 평가 점수를 잃는 날이 되겠지만,
하던 대로만 하면 앉아서 점수를 버는 기쁜 날이 될 수도 있겠지.
평가 점수가 남아도는 나한테는 별 의미 없었지만, 일반 후보생에게는 충분히 조심할 이유가 되어 보였다.
이런 게 답답한 후보생은 밖에 나가 있든가 하겠지.
근데 이 규칙.
시아가 만들었을까? 아니면 네리스?
눈앞에 둘이 허덕이는 모습이 아른거린다.
15p의 여운은 꽤 길게 남을 듯싶었다.
"이거, 달콤하고 맛있어. 데칼."
"뭔데?"
나는 아바와 길거리 음식을 먹었다.
언뜻 보기에 호떡을 닮았다.
안에 든 건 꿀이 아니었지만, 달고 맛있었다.
간식으로는 딱 맞네.
"이런 날에는 여자랑 남자랑 같이 다녀도 될 텐데.
여자친구랑 같이 있을 수 없어서 서운하겠다?"
슬쩍 여자친구 얘기로 떠봤더니, 아바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릴리와는 헤어졌어."
"……."
으음. 나 때문인가?
아마 그렇겠지.
"서로 생각하는 게 너무 달랐어. 정말 서로 사랑했는지도 의문이고."
"기운 내.
하나 더 살게."
"진짜? 고마워."
나는 아바의 군것질을 돕기로 했다.
릴리는 내 최면때문에 섹파 만들기의 일환으로 아바를 찾아간 거다.
내가 그사이에 끼어들어 릴리한테 섹스를 가르쳤으니, 헤어질 만 했다.
"내가 사야 하는데.
오히려 데칼에게 얻어 먹네."
"여자친구랑 헤어졌다는 놈 점수를 털어먹을 수 있겠냐.
내 점수 너무 많아서 골치 아프니까. 네가 쓰는 것 좀 도와줘."
"하하하. 무슨 고민이 그래?"
네리스나 헤르카 정도는 아니지만.
내 점수는 노점을 죄다 털어도 문제없을 만큼 많다.
이것저것 집어먹고 구경했더니 금세 날이 저문다.
"데칼. 저기 봐."
아바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갑자기 주변이 시끄러워진다.
"저것 봐. 용사님이야."
"용사님이셔."
"벨리사 님이다!"
벨리사 크라멜.
가녀린 양어깨에 국운과 숙명을 짊어진 용사.
그녀가 말끔하게 차려입은 하수인을 데리고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가고 있다.
멋들어진 의장용 갑옷을 입고 자줏빛 머리카락과 예쁜 자색 눈을 드러낸 채로.
평소 그녀가 선호하는 장비가 아니다.
평소라고 해도 실제로 본 건 딱 한 번뿐이었지만.
리사는 평범하게 몸을 지킬 수 있는 갑옷을 껴입는 편이다.
물론 보기에는 이쪽이 더 좋았다.
머리카락도 찰랑거리고, 예쁜 얼굴이 도드라진다.
"용사님. 아름다운 분이라고는 들었는데, 정말 상상 이상이야.
여신이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아바가 중얼거리는 혼잣말에 절로 웃음이 났다.
"그렇겠지?"
리사가 중간에 네리스를 만나 가볍게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걸 보고 아바가 말했다.
"데칼은 인사드리러 안 가?
……선별된 인원이잖아."
누가 들어도 상관없는데, 아바는 조심스럽다.
"저쪽에서 올 거야."
"……?"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용사 최면 조교는 이미 시작됐다. 그녀한테 「마음 편하게 나를 의지해라」라는 암시를 걸었기 때문에.
예상대로 리사는 네리스와 헤어진 후 이쪽을 알아채고 나에게 다가왔다.
주변 사람들이 당황한다.
용사의 행차에는 꼭 정해진 루트가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리사는 신경 쓰지 않고 쭉 걸어왔다.
"그대. 며칠간 안 보이더니, 어디에 있었어?"
내가 없으면 불안하기라도 한 듯.
살짝 토라진 말투여서 귀여웠다.
"집에 갔다 왔어.
나는 챙길 식구가 많거든."
"……음. 그런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 옆에 있는 후보생은?"
아바는 뻣뻣하게 굳은 채로 말했다.
"저, 저는! 바덱 로운의 동생, 아바 로운입니다."
"로운 가문의 아바 로운인가.
그대의 형제 바덱이 전장에서 활약한 일은 기억하고 있어.
동생 쪽도 훌륭하게 자랐군."
"감사합니다!"
"그래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대장님.
평소 입지도 않을 갑옷 입고서."
"조사원님 통찰력은 여전한걸."
통찰력은 무슨.
너무 예뻐서 전장에 어울리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마물이 두려워하기는커녕 용사와 한 번 해보겠다고 달려들 것 같잖아.
"쉽게 말하면…… 치장이다.
내가 원래 입는 갑옷은, 우중충할 뿐이라고 시아 님께 한 소리 들었지 뭐야."
"그건 그렇지."
얼굴 포함해서 온몸을 가리는 데 좋을 리가.
"그대까지…….
그래 봬도 꽤 좋은 소재로 만든 갑옷인데……."
리사는 귀엽게 투덜거린다.
"치장한 갑옷 입고 돌아다니기.
평화로워서 좋네."
"데칼. 지금부터 얘기할 게 있는데, 괜찮나?"
"갑자기?"
"저는 그럼 가보겠습니다. 용사님!"
아바가 뒤로 물러난다.
"친구를 빼앗아서 미안하군.
별로 남한테 하고 싶지 않은 얘기라, 이해해주길 바라. 아바 후보생."
"미안하실 거 없어요!
제 친구가 용사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저까지 자랑스러운데요."
"고맙다."
리사와 단둘이 남았다.
한 발치 뒤에 서 있는 그녀의 하수인과 많은 사람의 시선 때문에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사람들 표정은 기대감에 차 있다.
멜브릿을 지켜낸 특별조사원과 용사의 만남.
두 사람이 어떤 얘기를 나눌지 상상하는 건 후보생 입장에서 즐거운 일일 거다.
그나저나, 아바가 있는 자리에서 하지 못할 얘기가 뭘까.
"유격대 얘기야?"
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리오테 가문의 마법사를 설득해주었다고 들었어.
고마워. 데칼. 그녀와는 아직 인사를 하지않았지만, 까다로운 인물이라면서?"
까다롭다면 까다롭지.
지금은 절친한 섹스 프렌드지만.
"싸움보다는 그쪽이 특기거든.
협상이나 교섭 따위는 나한테 맡겨 줘.
말 안 통하는 마물 빼고는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든든하군.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줄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건 기쁜 일이야.
하지만 그대, 목숨을 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지.
떠날 때는 내게 말하고, 붙어 다니도록 해."
"……."
그랬었지.
나는 박서연에게 노려지고 있다.
그걸 구실로 용사 파티에 들어왔어.
용사가 날 신경 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알았어. 미안해. 대장."
"가족에게 인사하러 가는 일을 미룰 수는 없었겠지.
하다못해 너의 위치를, 내가 알 수 있게 해줘.
그리고……. 지금부터 뭘 할 예정이지?"
"딱히 아무것도 없는데.
좀 전에 친구랑 헤어졌으니까."
"그러면……."
용사님 태도가 묘하다.
긴장한 것처럼 눈 깜빡임 횟수도 늘었다.
혹시 데이트 신청인가?
"외부인은 퇴장할 시간이다.
나도 이제 스케줄이 없어."
"……."
"보, 보고 싶은 상연물이 있는데.
혼자서는 좀 어렵다. 그대, 함께 가주지 않겠나."
……마물화한 박서연도 단칼에 썰어버리는 분께서.
나한테 데이트 신청을 하며 우물쭈물하는 걸 보니 절로 웃음이 났다.
그렇군. 용사에게는 사적으로 만나는 친구가 없겠지.
결과적으로 나한테「의지」하는 건 필연적인 일.
용사를 천천히 벗겨 먹을 생각이었는데, 일이 술술 풀려서 기분이 좋았다.
"웃지만 말고 대답을 해주었으면 한다."
"같이 보자. 리사."
"으. 음."
"대장이라고 부르는 편이 좋아?"
"리사라고 해줘. 지금은.
금방 갈아입고 나올 테니 기다려 줘."
"그럼 공연장 앞에서 만나자고."
"음. 알았다."
리사는 빠른 걸음으로 떠난다.
상연물은 야외에 설치된 작은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용사와 마왕의 이야기를 그려낸 연극이었다.
리사는 갑옷을 벗고 사복 차림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투톤 원피스 위에 재킷을 걸친 모습이다.
"가자."
춥나? 가슴팍이 드러나지 않게 꽁꽁 감싸고 있네.
우리는 사람 없는 뒷좌석에 앉아서 연극을 봤다.
관객이 스무 명도 안 돼서, 어딜 앉아도 상관없었겠지만.
멀찍이 지켜보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연극배우들이, 용사 본인이 와서 보고 있다는 걸 알면 깜짝 놀랄 테니까.
연극이 시작됐다.
용사 역 배우와 마왕 역 배우가 서로 무기를 들고 대치하는 중이다.
"용사! 몇 번이고 내 앞에 나타나 나를 방해하는 나의 숙적이여!"
"나는 마물이 인간을 해치는 걸 바라지 않을 뿐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목숨 다할 때까지 싸우겠다. 마왕!"
그저 그렇군.
열연이기는 한데, 어디서 연기 좀 한다는 배우를 섭외해서 하는 게 아니라는 건 금방 알아봤다.
심심할 뿐이다.
은근슬쩍 리사 손이나 잡을까 고민하다가,
그녀의 옆얼굴을 보았다.
"……."
리사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흥미진진하게 연극을 보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얼굴로.
어찌 보면 뻔하기까지 한 이야기에, 소소하게 탄식하고 안심하는 걸 보며 생각했다.
리사는 이런 작은 행복을 태어나서 몇 번 누려봤을까.
연극에서 나오는 그림 같은 용사는, 현실의 인물에 대입할 수 없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이 세계의 벨리사는 그려진 용사 그 자체다.
수백 년 동안 싸우기만 했지, 다른 삶은 살아본 적도 없는.
여신에 의해 선별된 고결한 영혼.
처음부터 사람을 구할 숙명을 점지받고 내려왔다는 점에서,
그녀는 마치 신의 사도 같다.
동시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처녀다.
적당한 곳으로 데려가 최면을 걸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변했다.
그녀가 연극을 다 볼 때까지 기다리자.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일을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연극 내용은 지극히 단순했다.
용사가 믿음직한 동료와 함께 마왕을 물리치고 돌아와서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이다.
같은 날에 몇 번씩이고 해야 하는 상연물이니, 스토리텔링이 복잡하면 중간에 보러 온 사람들은 곤란할 테니까.
실망스럽지도 않았지만, 놀랍지도 않았다.
연극이 막을 내린다.
"아……."
리사는 아쉬운 듯했다.
"재밌었어?"
"응. 감동적인 이야기였어.
데칼은?"
"괜찮던데."
그저 그랬다.
나중에 놀랄만한 전개가 나오지도 않았고.
상상한 대로였다.
"고맙다. 데칼.
그대가 아니었으면 볼 수 없었을 거야."
"내가 없어도 혼자서 보면 되잖아?"
"같이 볼 사람이 없으면 용기를 낼 수 없어.
나는 이런 곳에서 한가롭게 지내도 될 사람이 아니니까. 마물을 하나라도 더 잡아야만 하지……."
"……."
"그러니까 무척 즐거웠어.
직접 앉아서 연극을 보다니. 처음 해보는 일이야."
처음 해본다고?
"그건 지금 생에서? 아니면 저번 생까지 포함해서?"
"이상한 말을 하는군.
저번 생도 이번 생도 내게는 전부 같은 삶이야.
벨리사 크라멜로 태어나 용사로 싸워, 세계의 균형을 지켰지."
……맙소사.
용사의 삶은 내 상상보다 훨씬 가혹했다.
진짜로 싸우는 삶만 살았을 줄이야.
카렌을 유년기 시절에 구한 용사도 마찬가지로 유년기 때부터 마물과 싸워온 거다.
"……그랬구나."
"연극 속 용사는 행복해져서 다행이야.
오늘은 마음 편안히 잘 수 있겠어."
그 뻔한 얘기가 퍽 마음에 든 듯이,
리사는 미소 지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너는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행복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어.
진짜와 연극 속은 다를 수밖에 없지……."
"어떤 점이 달랐어?"
"묘하게 캐묻는군.
그런 게 왜 궁금하지?"
리사가 날 경계한다.
나는 자연스럽게 리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이게 자연스러운 거야.
상연물을 본 후에 느낀 바를 얘기하고 떠드는 것.
그것까지 포함해서 봤다고 하는 거니까."
"……."
리사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촌스러운 소리를 했군. 미안하다.
노는 것을 배운 적이 없는, 재미없는 용사라서……."
"괜찮아. 계속 얘기해주면 돼."
나는 그녀의 무엇이 자신을 연극 속 용사와 다르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내 눈으로 보면 똑같았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강인한 용사.
그런데, 뜻밖에도 리사는 이상한 소리를 했다.
"나는 저런 완벽한 영웅이 아니야."
"마왕만 쓰러뜨리지 않았을 뿐.
사람들을 지키는 영웅이라는 점은 같잖아?"
"같지 않아. 데칼. 모르겠어?
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는 구하지 못한, 반쪽짜리 용사야.
치장된 갑옷을 입고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는 있지. 하지만, 나는 연극 속 용사처럼, 내가 구한 사람들로부터 고맙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없어."
"……."
"많은 사람이 날 우러러보고,
아이들은 심지어 나처럼 되고 싶어 하지만,
난 그저 싸우는 것만 할 줄 알 뿐이야. 마물의 시체를 산처럼 쌓아놓고 내일은 평온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지."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예정된 운명의 환생을 반복하며 여신의 대리인으로 살아왔으면서.
사람들의 마음마저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나는 소름이 끼쳤다.
책에 이름을 남길 법한. 진짜배기 인격자다.
"……남한테 할 얘기가 아니었는데.
오늘 나는 어떻게 되었나 봐. 잊어 줘.
데칼……."
"……."
"혼자 지내는 일에는 익숙해졌을 텐데.
어째서 너한테는 의지하고 싶어지는 걸까……?"
리사가 날 바라봤다.
최면으로 널 조종했기 때문이라고.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찔릴 법도 하지만, 나는 떳떳하게 가슴을 펴고 리사와 마주 봤다.
그녀를 어디로 데려가야 할지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