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이세계 최면물 165편
<-- 과거편 -->
신들의 연회장은 제르미나의 세계, 구름 위까지 뻗은 천공탑의 꼭대기에 있었다.
한 번에 이렇게 많은 신을 보기는 처음이다.
그만큼 경계도 삼엄해서, 어디든 신성 기사들이 순찰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괜찮아. 긴장하지 말자.
오늘 나는 불청객이 아니다.
신성 기사단에 둘러싸여 최면 사용을 강요받는, 불쾌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아.
오히려 경호원이라고 해도 좋겠지.
나는 위풍당당하게 입구로 걸어간다.
"가장 달에 가까운 곳. 루미너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데칼 님."
신성 기사가 고개를 숙인다.
"음."
나는 등을 곧게 펴고, 옆으로 비켜서는 신성 기사들 사이로 걸어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손에 땀이 나는군.
헤벨은 신들이 친목을 위해 장소를 잡고 모이는 일도 종종 있기는 하다고 들었지만,
아무튼 나는 그런 것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기 때문에 벌써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것 같다.
이것은 그저 기억의 재현일 뿐.
이미 일어난 일을 되짚고 있을 뿐이라며 자신을 타일러도, 긴장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이때 내가 느낀 기분을 강하게 되새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의 내가 아무리 억누르려고 한들 소용없다.
아니, 기억의 재현자인 현재의 내가 더 떨고 있다고 해도 좋다.
왜냐면.
이 페이지가 기억의 마지막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일까.
아마도 이곳이 나의 마지막 무대.
최면의 신 데칼이 죽은 곳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제길. 생각을 비우고 기억의 재현에 집중하자.
상영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단서로, 결말을 예측하는 건 멋스럽지 못한 일이다.
나는 깊이 심호흡하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달밤 아래 탁 트인 널찍한 정원.
한쪽에는 본 적도 없는 음식들이 쌓여 있다. 뷔페처럼 골라서 집어갈 수 있게 해 놓은 것 같다.
신들은 술잔을 들고 점점이 퍼져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그래서 곳곳에는 음식이나 잔을 두기 위한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었고,
하얗고 청결한 옷을 입은 시종들이 다 먹은 접시와 잔을 정리하거나, 직접 쟁반에 술잔을 담아 신들에게 대접하고 있었다.
낯설지만 상상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이다.
현대에서 살았을 때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만약 홈 파티를 연다고 해도 널찍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음식과 술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형태가 가장 자연스럽기 때문에,
이런 파티는 아주 특별한 날, 공간이 넓은 건물을 대관하지 않고서는 하기 어렵다.
뜻밖이라는 점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제르미나라면 신들을 일자로 세워놓고 자기 위업을 찬양하게 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이 연회장은 의외로 자유로운 기풍이 묻어나고 있다.
어디에 앉기를 유도하지도 않고, 무언가를 보게 하지도 않아.
그냥 돌아다니며 얘기를 나누고 음식과 술을 먹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 눈은 지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여신들보다 고개를 낮게 숙이고 다니는 시종들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일레시아……. 어디에 있어?
내 불안감이 커져만 가고 있을 때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제르미나 님."
"제르미나 님!"
"오늘도 너무 아름다우세요."
제르미나다.
나는 숨을 죽이고 자연스럽게 훔쳐봤다.
달려가면 곧 닿을 거리에 제르미나가 있었다.
달빛을 품은 하얀 머리카락, 피조물을 위압하는 붉은 눈.
우리 집에 쳐들어와서 나를 멸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제르미나는 여전히 아름답고 무서운 존재였다.
다양한 신들과 접해보니 알겠다. 몸에 두른 신격부터 천지 차이라는 것을.
신들의 신인가.
제르미나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내 눈은 그녀의 옆에 있는 또 다른 여성에게 못 박혔다.
몰라보게 성장한, 시아가 서 있었다.
신격은 몰라도 제르미나 옆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검게 녹아내리는 머리카락과 성스러운 녹색 눈.
내가 잘 알고 있는 여신 일레시아의 모습이다.
설마…….
"그대들에게 소개하지.
이 아이는 일레시아. 니뮤엘 님께 빛의 권능을 받고 8급의 신격을 허락받은 내 시종이다."
"와아!"
"무척 아름다우세요. 일레시아 님."
"감사합니다."
……8급 신.
어느새 나보다 출세했네.
나도 모르게, 다른 신들과 함께 따라서 손뼉을 쳐주고 있었다.
괜히 쪼그라드는구나.
구하러 왔는데……. 다시 내 시종이 되라고 하는 것이 맞는 걸까.
아니, 맞는 게 당연하지.
내가 눈여겨본 여자다. 제르미나의 총애를 받고 8급 신이 되어도 이상할 게 없잖아.
질릴 정도로 일레시아와 섹스하고 싶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 여기까지 왔어.
연회를 시작하자.
"후……."
나는 집중하고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일레시아와 제르미나를 제외한 모든 신이, 자연스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자연히 초청객 중 서 있는 자는 나뿐이 되어, 일레시아와 제르미나가 나를 보았다.
"아저씨……!!"
"……예상하지 못했다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설마 내가 부른 모든 신에게 최면을 걸었을 줄이야.
조금 놀랐구나."
"……."
나는 앞으로 걸어가, 제르미나와 대치했다.
이제부터는 말 한마디, 몸짓 하나도 제르미나의 시험대에 오른다.
기준에 미달했을 경우 즉시 처형.
모든 신을 막아도 제르미나 하나를 막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어.
나는 눈을 내리깔고 한쪽 무릎을 꿇어서, 예를 표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제르미나 님."
"상관없다.
너를 안뜰로 부른 것은 내 의지다. 최근 소곤소곤 무언가 하는 모양이던데……."
눈치채고 있었나.
"네가 어차피 나를 찾아오리라는 것은 어린아이도 예상할 수 있는 일.
내게 뭘 준비해올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있었노라."
……그래.
지금껏 동기라고는 없었던 남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레시아를 빼앗긴 것을 계기로.
그렇다면, 제르미나 입장에서 언젠가는 자기를 찾아올 거라는 건 예상하기 쉬운 일.
무엇이든 해볼 테면 해봐라.
……그게 바로 강자의 여유였다.
실제로, 이 순간이 오기까지 나는 제르미나를 현신시킬 어떠한 방법도 갖추지 못한 상태로 왔다.
최면을 걸 수는 없다.
최소한의 거래만 성립시켰을 뿐.
"시아를 돌려받으러 왔습니다."
"호오."
눈을 돌리지 않는다.
시아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너무나 궁금했지만.
나는 지금, 제르미나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대화에 방해가 끼어들 것 같아서, 사전에 공작해둔 점 사죄드립니다."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일레시아를 내놓으라고? 너는 대신에 무엇을 내놓을 수 있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저는 위계 4급부터 8급에 있는 182명의 여신을 제 편으로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신들은 지금, 저의 권능으로.
제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경우 어떠한 행동을 취하게 되어 있습니다."
"후후후. 하하하!"
제르미나는 유쾌한 듯 웃어젖혔다.
"그것이 어쨌단 말이지?
감히 나를 협박하려 들다니. 재미있기는 하구나. 이런 경험은 신이 되고서 처음이다.
그래, 그 182명의 '하급 신'들로 뭘 어쩌겠다는 것이지? 일제히 나를, 내 세계를 공격하기라도 하겠단 말이냐?"
"……."
설마. 누름돌로는 부족했나.
그럴 리 없다. 조화계에 있는 신의 수는 다 합해봐야 오백을 넘지 못해.
그중 대부분은 제르미나가 말하는 하급 신에 속한다.
단순한 허세인가? 속이 탄다.
"나름대로 계산은 하고 왔구나.
그 신들을 미끼로 삼으면, 마물 쪽 신들과 대적하고 있는 나와 조화계 신들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으리라
생각했겠지."
"……."
대답할 수도 없다.
내 뜻을 상대에게 밝히는 것도 불리하다.
나는 제르미나가 가만히 다 말하기를 기다렸다.
"너는 두 가지 점에 있어서 어리석었다.
하나는 전쟁을 인간의 관점으로 본 것.
다른 하나는 고작 백 명이 넘는 신들을 나와 저울질할 수 있을 줄 안 것이다."
핫…….
나는 황당한 나머지 웃음이 나왔다.
"이 정도 전력을 가지고도.
제르미나 님에게는 못 미친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파괴의 권능 앞에서는 어떤 권능도 무의미하다.
마물 쪽 신들과의 힘겨루기에 있어서 너희들의 존재는 티끌만도 못하다.
2급 신, 3급 신이 도착하기 전에 시간 벌이나 해냈다면 그것으로 족한 목숨이지."
"뭐…….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무릎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잡다한 신들을 아무리 끌어모아 봐야, 제르미나 님께 미치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단순한 역량 살상을 놓고 본다면 모든 신을 합쳐도 제르미나 님의 공격력을 따라갈 수는 없겠죠."
"……."
이번에는 제르미나가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은 것 같다.
그렇다.
"제르미나 님.
저는 한 번도, 당신을 공격하라는 암시를 걸었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뭐야?"
제르미나의 풀이는 정답에 가깝다.
힘만 센 게 아니라 나보다 훨씬 똑똑하다.
그녀도 일레시아와 마찬가지로, 성실하고, 배움을 즐기는, 인재였겠지.
신의 권태로 나를 안뜰에 들이고 놀 때조차 제르미나의 지성을 느낄 수 있다.
멍청한 내가 말싸움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하지만…….
그 풀이에는 단 한 가지 오답이 있다.
최면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는, 어떤 신도 나를 앞지를 수 없다.
제르미나가 착각한 것은 암시의 내용.
"지금쯤이면 됐겠죠.
모든 여신이 제가 지정한 위치로 갔습니다."
"지정한 위치……?"
"각자 자신이 맡은 세계라고 해둘까요. 자, 제가 무슨 암시를 걸었을 것 같습니까."
"……!"
제르미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파괴신을 하얗게 질리게 만든 것은, 아마도 내가 처음이 아닐까.
"네 녀석, 설마……!!"
"그래. 나는 내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모든 신이 세계를 파괴하도록 일렀다."
"제, 제정신이냐. 네 녀석!"
"제가 반대로 돌려드리죠. 당신은 인간의 관점으로 전쟁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실수를 한 겁니다.
꼭 전쟁에서 이기는 법이,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내가 인질로 잡은 182 세계……. 및, 제르미나 님이 중재에 들어가도 최소한 파괴할 500 세계 이상의 인간들.
추정 인구수는 5,000,000,000,000……. 뭐. 세보지는 않았습니다. 어림잡아 별처럼 많은 수는 되겠죠."
"제정신이냐고 물었다! 이것은 신의 심판 정도가 아니다. 어떤 신에게도 그런 일은 허락되지 않았어!"
"내 알 바 아냐!"
이런 짓을, 누가 좋아서 하겠어.
전혀 즐겁지 않다. 내 방식도 아니다. 어마어마한 희생자를 낳을 수도 있다.
이것은 나의 신조를 깬 최면이다.
처음부터 이것밖에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를 잠깐이라도 넘어서려면.
제르미나는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봤다.
"내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이 정도 보험은 들어줘야지.
제르미나, 너에게는 보잘것없는 신이라도 인간에게는 하늘 같은 신.
조화계가 쑥대밭이 되면, 니뮤엘 님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
"할 말은 끝났다.
내 여자를 내놔."
"내가…… 네놈 따위가 시키는 대로 할 것 같으냐?"
"육백 팔십 이의 세계와 일레시아 하나.
이 저울질은 이쪽에 승산이 있다. 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비록 너를 얹고 저울추를 기울일 방법을 찾아내지 못해, 그 몸을 범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
제르미나 하나를 포기하고 일레시아를 얻는다면 값진 결과다.
"약속해줘야겠어.
일레시아를 돌려주고, 앞으로 우리한테 어떤 관여도 하지 말 것.
이것을 금제로 하여 자신의 목에 걸어라!"
"내 권능으로. 나 자신을 속박하라고?"
"그래."
전대미문의 파괴를 막을 수 있는 건 파괴의 신뿐이다.
말장난처럼 우습군.
하지만 작전은 잘 먹혔다.
제르미나는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 분에 겨워 어깨를 떨고 있었다.
"네 녀석……. 네 녀석……!!
그런 잔머리로 나를 이겼다고 말할 셈이냐. 내가 세계의 파괴를 용인한다면.
이 파괴의 신이, 모든 세계의 파괴를 이해한다고 하면. 그것으로 너의 죽음은 개죽음이 된다!"
"아니, 그럴 리 없지."
"……!"
"말끝마다 니뮤엘 님. 니뮤엘 님.
네가 니뮤엘에게 마음 주고 있다는 것은 첫 만남 때부터 알고 있었어.
너를 징벌할 수 있는 유일한 신. 지고한 신. 이 세계에 날 때부터 신이라는 존재로 있었던 두 명의 여신.
네가 그 고결함을 동경하고 있다는 것은 신들 사이에 유명한 이야기였다."
"……."
"제르미나. 단념해라.
너는 세계의 파괴를 지켜보고, 니뮤엘 님의 눈 밖에 날 자신이 없어.
그렇기 때문에 이 제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모두 끝났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개 숙인 신들 사이로 걸어 나온 제르미나는, 내 앞에 똑바로 서서 날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