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 이세계 최면물-113화 (113/414)
  • 대충 이세계 최면물 113편

    <--  -->

    우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어울리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을 향하고 있었다.

    오늘 본 끔찍한 것들. 아픈 일들.

    모두 따뜻한 물로 씻어버리고 침실로 나온다.

    "이건 다 어떻게 하지?"

    아바가 말했다.

    테이블 위에는, 마을 사람들이 선물로 준 음식과 마실 것이 쌓여 있었다.

    받는 족족 보관함에 넣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뒤풀이라도 할까?"

    "뒤풀이?"

    내가 뭐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

    아바는 내 말을 되풀이하면서,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봤다.

    "데칼. 잊어버린 거 아니지? 여자 방에는 디아나 씨가 있어."

    "물론, 알고 있지."

    "이런 시간에 문 두드렸다간, 칼 맞을걸?"

    "설마, 함께 사선을 넘은 동료를 쫓아내기야 하겠어? 허락받고 올 테니 기다려."

    나는 여자 방 앞으로 갔다.

    평범하게 노크를 해도 좋지만 여기서는 굳이 엿듣자.

    문에 바짝 다가가서 귀를 대고 소리에 집중한다.

    곤두선 청각이 미세한 소리를 잡아낸다.

    물소리, 떠드는 소리. 디아나와 카렌의 목소리다.

    두 사람, 어느새 아주 친해졌구나.

    나는 대담하게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못 들었나?

    다시 노크하려고 했을 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목소리가 들렸다.

    "데칼이야?"

    스티아의 목소리다.

    "문 열어 줘."

    "지금은 곤란해……. 이런 시간에 여자 방에 찾아오면 안 돼. 데칼."

    뭐야. 꽤 완강한데?

    아바 말대로, 밤에 찾아오는 건 대단히 실례되는 일이었던 것 같다.

    설마 문을 열어주지도 않는다니.

    하지만 이럴 줄 알고 술병을 가져왔지. 선물이라는 좋은 핑곗거리다.

    "문 좀 열어주면 안 될까?"

    "데칼, 곤란해……. 이러지 마. 아무리 다 같이 있는 방이라지만, 바, 방문을 열어준다는 건……."

    왜 저렇게 당황해?

    "마을 사람들에게 선물 받았어. 좀 나눠주고 싶었거든. 밤에 여자들끼리 얘기하면서 마시라고……."

    나는 최대한 아쉬운 척 말했다.

    왠지 이러면 스티아는 못 이기는 척 열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른 의미는 없는 거지?"

    "……."

    대답하지 않는다.

    문을 열면 얼굴을 마주 보고 교섭을 개시한다.

    "데칼……?"

    침묵을 지키자,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는지 스티아가 문을 열었다.

    나는 뻔뻔한 영업 사원처럼 발부터 넣어서 문을 닫지 못하게 한 다음,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아……!"

    오,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다.

    스티아는 목욕하고 나온 지 얼마 안 된 무방비한 모습이었다.

    가운을 몸에 두르고 중요 부위만 간신히 가렸다. 촉촉한 금발과 수분을 머금은 붉은 눈동자가 오늘따라 무척 예쁘게 보였다.

    세검을 들고 늠름하게 싸울 때 모습도 좋지만, 지금은 남한테 쉽게 보여주지 않는, 그런 릴랙스한 모습.

    절로 마음이 들뜬다.

    "안 돼…!"

    스티아는 문을 닫으려고 하지만, 나는 문고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자. 이거 받아야지."

    "……아."

    내가 술병을 눈앞에 흔들자, 스티아는 급한 마음에 얼른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손을 뻗었고.

    목욕 가운이 확 풀려서 떨어졌다.

    "앗……!"

    언젠가 갈아입는 모습을 훔쳐본 적 있던가.

    하지만 역시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는 것이 최고였다.

    나는 눈을 피하지도 않고, 노골적으로 스티아의 하얀 피부를 미끄러지듯 감상했다.

    눈처럼 하얀 피부는 보기만 해도 벌써 부드러운 느낌이다.

    소극적으로 난 음모와 예쁘게 뻗은 다리를 쭉 살피고…….

    머리에 제대로 새겼다.

    스티아는 확 주저앉았다.

    그러자 그녀의 뒤로, 귀신처럼 서 있는 디아나가 보였다.

    디아나 역시 카렌과 함께 목욕하고 나온 후로, 알몸에 가운만 감고 있는 상태였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바로 옆방인데."

    "그게 아니라. 이 시간에 왜 찾아왔어?"

    "뒤풀이하러."

    "미쳤어? 이 시간에 문 열어주는 여자가 어디에 있어. 초야를 허락했을 때나 가능한 거야. 그런 기본적인 매너도 몰라?"

    아, 그랬군.

    아바의 표정이 안 좋을 만도 했다.

    "디아나가 날 불렀을 때처럼 말이지?"

    디아나가 이쪽으로 손을 세웠다. 손끝에서 전류가 일어난다.

    "남길 말 있으면 들어줄게."

    디아나의 무영창 라이트닝 볼트가 나한테 일직선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배리어를 펼쳐서 막아냈다.

    적중 훈련 만점다운 정확한 조준이지만, 뭔가 잘못됐는데?

    "들어준다며?!"

    "듣기 싫어졌어! 죽어, 그냥!"

    "자, 잠깐만……."

    스티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가운을 주섬주섬 가슴팍에 끌어당기고 젖은 눈으로 말했다.

    "내가 실수한 거야. 데칼은 잘못하지 않았어."

    "……."

    이 국면에서 날 감싸주다니.

    감격스럽다.

    "큿……."

    디아나는 한풀 꺾인 듯, 아니, 사실은 꽤 피로를 느낀 듯 더는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손을 내렸다.

    나는 스티아에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켰다.

    "……."

    스티아는 손을 맞잡고,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깔았다.

    은은하게 좋은 향기가 났다.

    "미안해. 스티아."

    "아니야. 어쨌든 문을 열어준 건 나니까……."

    차분히 관찰한다.

    아슬아슬하게 가운 하나로 가려진 스티아의 맨살을.

    내 시선을 의식한 듯 스티아의 눈 깜빡임이 빨라지면서 긴 속눈썹이 떨렸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손을 빠져나간다.

    스티아는 뒤로 물러나, 옆머리를 쓱 뒤로 넘기며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데칼, 다음에 찾아와주면 안 될까.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까."

    카렌은 아쉬운 듯 말했다.

    "오빠랑 뒤풀이하는 거 좋은데……."

    "이래서 모험가 출신은."

    "왜 안 돼? 이대로 자기는 아깝잖아."

    우리 좆집. 잘한다.

    카렌의 순수한 질문에, 도리어 디아나가 말문이 막혔다.

    "그런 식으로 지조 없이 굴면 안 돼. 카렌. 당신은 안 그래도 그런 가슴……. 어흠. 매력적인 몸을 하고 있으니까. 몸가짐에 주의해야지."

    "나는 오빠랑 뒤풀이하고 싶은데."

    "나, 나도 싫다고는 안 했어. 밤의 마력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정신 차리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라고."

    디아나는 뼈 있는 말을 했다.

    "나, 슬슬 밖에 서 있는 것도 힘든데.

    오늘 정도는 풀어져도 되지 않겠어? 다들 힘든 하루였잖아. 그렇지?"

    "……뭐, 조금이라면 좋아."

    "디아나. 좋아해!"

    카렌이 디아나를 끌어안는다.

    "그러니까. 자꾸 그 가슴으로 껴안지 말란 말이야. 하으읏…!"

    디아나가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카렌의 품으로 녹아든다.

    카렌의 젖가슴은 어쩔 수 없지.

    "오빠, 금방 갈게!"

    "스티아도 괜찮지?"

    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 후보생 답게 품위를 지킨다면, 좋아."

    "별일 있겠어? 스티아가 있는데."

    "……신뢰해줘서 무척 고맙지만, 방금 데칼의 눈초리를 생각하면, 나는 걱정이 돼."

    "내 눈초리가 어땠는데?"

    "……."

    스티아는 차마 자기 입으로 말하지는 못하고, 침묵으로 항의했다.

    노골적으로 훔쳐본 게 들킨 것 같다.

    "붉은 영혼석에 대해 논의도 해야 하고, 듣고 싶은 얘기도 있으니까.

    방에 찾아갈게. 데칼."

    "그런 답답한 이야기는 됐어."

    "……."

    스티아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데칼. 만약 이 기회에 여자들을 어떻게 해볼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아.

    나는 검을 차고 갈 테니까."

    카렌이 디아나를 껴안으면서 헤헤 웃는다.

    "나는 오빠한테 엉망진창 당해도 좋은데……."

    "어, 어흠!"

    카렌의 노골적인 선언에, 스티아가 당황하며 말을 끊는다.

    "카렌……! 남자를 유혹하는 것 같은 발언은 하면 안 돼."

    사실 카렌이 내 좆집이라는 걸 알면 두 사람 다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나와 카렌은 눈을 마주치고 서로씩 웃는다.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스티아."

    "모, 모두를 기다리는 거겠지? 그런 오해를 살 법한 말투는 하지 마."

    잠시 후.

    여자들이 우리 방을 찾아왔다.

    "어떻게 설득한 거야……."

    아바는 기가 막힌 듯 말했다.

    "사실 디아나와 카렌은 내 여자거든."

    "……진짜야? 그거."

    다들 자기 전이라 얇게 입고 올 줄 알았는데, 스티아는 아예 지금부터 등교라도 하는 듯이 말끔한 제복 차림새로 왔다.

    블레이저코트까지 걸치고 단추도 채웠다. 예고한 대로 허리춤에는 세검까지 차고서.

    카렌과 디아나가 비교적 편한 복장으로 왔다는 걸 생각하면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누구랑 싸우러 왔어?"

    "……나에 대한 경고다. 젊은 남녀끼리 밤에 만나면 흐트러진다고, 어머니께서 주의하셨어."

    디아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꼴로 쳐들어가면 놀랄 거라고 말렸는데, 듣지도 않더라.

    품위라는 건 자연스레 몸에서 배어 나오는 것이야. 내가 데칼의 초대를 받았다고 해서, 들뜨기라도 한 것 같아?"

    "디아나,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속옷 고르고 있었잖아."

    카렌이 폭로하자, 디아나의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 편이야?"

    "오빠는 이런 거 속으로 되게 좋아해."

    "……."

    디아나가 나를 흘낏 보았다.

    왠지 기뻐해야 할 것 같다.

    "디아나가 날 위해 그런 고민을 하다니, 너무너무 고마운데?"

    "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신경 쓰는 게 숙녀야."

    "보여주면 더 좋을 텐데."

    "지금은 안 돼."

    "스티아가 찔러서?"

    디아나가 쿡쿡 웃었다.

    "맞아. 그러네. 무서운 선도부 님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셔."

    "음란한 것은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거기에, 애초에 나도 데칼이 골라준 속옷을 입고 왔는데……."

    "……너희들 사실은 나 유혹하러 왔지?"

    "유혹이라니, 그럴 생각은 결단코 없다. 단지, 골라준 걸 입으면 기뻐할까 생각했을 뿐이야…!"

    "난 유혹하러 왔어!"

    카렌이 나한테 안겼다.

    우옷. 카렌의 부드러운 젖탱이가, 꾹꾹 맞닿는다.

    카렌은 못된 장난을 떠올린 아이 같은 얼굴로, 상체를 살살 움직여 나한테 가슴을 비벼왔다.

    아아. 몸에서 힘이 빠지고, 그 힘이 모조리 하반신에 쏠리는 기분이었다.

    "카렌! 안 돼.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그런…!"

    스티아가 당황하며 카렌과 나를 떨어뜨려 놓았다.

    "오빠 품 기분 좋은데. 스티아도 시험해 볼래?"

    "안 돼. 아무튼, 안 돼. 두 사람 사이에는 내가 끼겠어…!"

    "아앗."

    스티아가 카렌을 견제하듯, 나를 등지고 딱 붙는다.

    "스티아가 내 옆에?"

    "그래. 내가 데칼을 감시하겠어."

    "오빠 옆이 좋은데……."

    수컷한테 교태 부리는 것 같은, 카렌의 포옹은.

    스티아한테 무척 자극적이었던 것 같다.

    귀까지 빨개져서 당황하는 모습이 귀엽다.

    "언제까지 손님을 서서 기다리게 할 생각이야?"

    디아나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아, 다들 편하게 앉아."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받은 선물들─주로 술이나 군것질거리─ 포장을 풀어서 테이블에 놓고 의자에 앉았다.

    디아나는 내 맞은편에, 스티아는 정말 카렌과 나 사이에 앉았다.

    등을 곧게 펴고 앉은 스티아를 훔쳐본다. 스티아는 시선을 의식한 듯 뻣뻣하게 긴장했다.

    "편하게 있어. 뒤풀이하러 온 거잖아?"

    "뒤풀이는 무슨. 우린 너한테 듣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거야."

    디아나가 말했다.

    "듣고 싶은 거?"

    "그 정신 나간 여자는 누구야? 다른 세계라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이고."

    "이런. 이거 내 청문회였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니까."

    스티아가 디아나의 말을 이어나갔다.

    "데칼. 우리는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상세하게 전달하지 않으면 안 돼.

    붉은 영혼석을 흡수한 도적단을 괴멸시킨 것은 우리가 아닌, 미치광이 살인귀라는 걸."

    "나와 박서연의 관계도?"

    "필요하다면 말해야 할 수도 있어. 하지만,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까.

    데칼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판단하려고 해."

    카렌은 무슨 얘긴지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일찍이 용사 학교에 오기 전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걸 밝혔으니까.

    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신경 쓰이겠지.

    "우선 한 잔씩 마시자."

    나는 모두에게 술을 돌렸다.

    디아나와 스티아 두 사람은 떨떠름한 얼굴로 잔을 보고 있었다.

    "음주는 좀 그런데."

    "……데칼, 술은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해."

    "맨정신으로 할 얘기도 아니잖아? 거기서 본 게 아른거리지 않아?"

    "……."

    다들 내 말을 듣고 마음이 변했는지, 술잔을 입에 댔다.

    "잘 마시네. 디아나, 취한 모습 보이기 싫어서 못 마실 줄 알았는데……."

    "나를 뭐로 보는 거야? 술 좀 취했다고 사람이 달라지거나 하지 않아."

    "과연 그럴까?"

    "……."

    한 모금만 마셨던 디아나가, 내 도발을 받고 꿀꺽꿀꺽 삼켰다.

    "됐어?"

    ……그걸 안주도 없이 빈속에 다 먹네.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군것질을 하면서 마셨다.

    "그 여자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몰라. 이 세계에 와서 처음 만났다고 해도 좋을 정도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