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201화 (20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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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목의 변(土木之變)

    그들의 위쪽으로 움직인 아삼이었지만 아무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 했다.

    왕진뿐만 아니라 왕진이 대동한 무인들도 그가 움직인 것을 알지 못 했고 오이라트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그의 보법은 기척도 흘리지 않을 정도로 은밀하고도 신묘했다.

    먼 거리를 뛰어오른 아삼의 몸이 그대로 공중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그 상태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보던 그가 기운을 끌어올렸다.

    순식간에 넓은 혈맥을 내달리는 거력들이 양손에 몰려들었고 그 기운을 머금은 손을 아래로 향하자 강력한 섬광이 뻗어나갔다.

    콰아앙.

    마치 낙뢰가 치듯 환한 빛이 주변을 가득 채웠고 폭음이 터져 나왔다. 강력한 화기가 폭발하듯 아삼의 장력이 부딪친 곳에서 강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섬광의 영향력에 있던 왕진의 호위와 오이라트의 병사들은 그대로 까맣게 재로 변한 채 무너져 내렸다.

    새까맣게 타버린 수십 구의 시체들이 바닥을 뒹굴었고, 뒤늦게 살이 탄 누린내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이……이게 무슨!"

    갑작스런 참상에 경악한 왕진이 채 말을 잇지 못 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처럼 섬광이 번쩍였고, 승기를 잡아가던 자신의 숨은 호위들이 그대로 까맣게 탄 채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비단 왕진뿐만 아니라 남은 오이라트의 병사들도 멍한 표정으로 그 참상을 바라봤다. 그렇게 섬광이 떨어져 내린 곳의 진원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고개를 드는 순간, 다시 한 번 아삼의 장력이 쏟아졌다.

    이번에는 이전과 다른 기운을 가진 장력이었다. 시린 한기가 주변을 덮쳤고 그 기운에 휩쓸린 자들이 그대로 얼어붙으면서 목숨을 잃었다. 지독한 한기에 얼어붙은 그들은 미처 도망갈 생각도 갖지 못한 채 움직임을 멈춰야만 했다.

    도망을 가도 싶어도 갈 수 없었다. 이미 그들은 다리가 풀려버렸기 때문이다.

    꿀꺽.

    갑작스런 고수의 등장과 함께 남은 자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싸늘한 적막이 내려앉은 그곳에 온전히 움직이는 사람은 아삼 혼자였다. 간신히 그 공격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그를 바라봤지만 어느새 풀려버린 다리에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닥으로 주저앉아야만 했다.

    그 용맹하다던 오이라트의 병사들이 겁에 질린 것이다.

    그렇게 경악하는 사람들 사이에 왕진도 끼어있었다. 하지만 나타난 고수의 복장을 확인하던 그의 눈에 반가움이 묻어났다. 그가 입고 있는 복장은 한족이 입는 의복이었기 때문이다.

    '명의 백성인가? 무인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황실의 위엄을 알 터. 저자를 끌어들이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음이다. 내 목숨은 살릴 수 있다!'

    "무림에 적을 둔 분이오? 저는 황궁에 적을 둔 환관이오. 지금 대명의 관리가 위기에 처해 있으니…… 허억. 너…… 너는!"

    뒤돌아서 있는 고수의 모습에 미소를 보이던 왕진이 그를 향해 입을 열었지만 자신의 말에 뒤돌아보는 아삼의 얼굴을 확인한 왕진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자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결코 이곳에 있을 수 없을 사람이 나타났고 놀란 표정으로 아삼을 바라보는 왕진이었다.

    - 오랜만이군.

    "…… 네가 어떻게?"

    - 사례감이라는 놈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이냐? 황제 폐하를 보필하기 위해서 같이 떠난 것이 아니더냐?

    "……."

    - 네놈이 주청을 드렸다지? 직접 군을 이끄시라고.

    "뭐…… 뭔가 오해가 생긴 것 같습니다. 공공."

    싸늘한 아삼의 목소리에 이상함을 느낀 왕진이 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존대를 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삼의 얼굴에는 비릿한 웃음이 지어졌다. 끝까지 자신을 기만하려는 그 모습과 바로 바뀌는 표정에 고소를 짓던 아삼이 대뜸 손을 뻗었다.

    그와 함께 빠르게 날아가던 지풍이 호각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병사의 이마를 꿰뚫었다.

    간단한 손짓에 투구를 쓴 병사가 머리가 뚫린 채 그대로 쓰러졌고 그 모습에 더욱 고개를 조아리는 왕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싸늘한 눈빛을 거두지 않는 아삼이었다. 아직 남아있는 장수와 병사 몇 명의 혈을 제압한 그가 움직이지 못 하는 그들을 향해 전심어서로 물었다.

    - 한어를 할 수 있는 자가 있는가?

    "……."

    - 아무도 없는 것인가?

    "……."

    아삼의 물음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그들이고 그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는 아삼이었다. 그런 아삼의 표정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챈 장수 한 명이 조심스럽게 눈짓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조금 할 수 있소."

    - 좋군. 그게 네 목숨을 살렸다.

    "그게 무슨…… 흐읍."

    아삼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던 병사였지만 이어지는 섬광과 함께 그대로 무너지는 동료들의 기척을 느끼며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왕진이 의아해하며 아삼의 눈치를 살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저놈을 따로 살린 이유가 있나?'

    눈치를 살피는 왕진을 뒤로하고 한어를 할 수 있는 장수를 바라보던 아삼이 그에게만 전심어서로 은밀히 물었다.

    - 저기 있는 저놈이 너희 부족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그…… 그것이……"

    - 진실을 말해라. 그저 확인하려 함이다. 진실을 말하면 내가 너를 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

    아삼의 물음에 그의 뒤에 있는 왕진을 바라보던 병사가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굳히며 다시 아삼을 바라봤고, 그 눈빛을 확인한 왕진은 불현듯 드는 이상한 느낌에 향해 바닥에 나뒹구는 검을 차올렸다.

    '무슨 말이 오가는 것인가? 뭔가 토설하기 전에 저놈을 죽여야 한다!'

    차올린 검에 내력을 더하며 후려치자, 힘을 얻은 검이 주춤거리던 장수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빠르게 날아오는 검에 굳어버린 그였다.

    정확히 앞에 있는 장수를 향해 쏜살처럼 날아가는 검이었지만 왕진의 의도는 성공할 수 없었다. 아삼의 손짓과 함께 그가 날린 검이 간단하게 튕겨져 나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노려보는 아삼의 살기 어린 눈빛에 침음을 삼킨 왕진은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 다시 한 번 네놈 마음대로 움직이면 그때는 그 팔을 잘라주마.

    "소……송구합니다."

    아삼의 경고에 고개를 조아리는 왕진이었고 그를 뒤로한 채 다시 장수를 채근하는 아삼이었다.

    - 아직 내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다. 저놈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이냐?

    "…… 그렇습니다. 저자는 우리 오이라트 족과 연이 있는 자로, 옛 제국의 부흥을 꿈꿨던…… 끄으윽."

    아삼의 물음에 말을 이어가던 그였지만, 어느새 나타난 검은 복면인의 기습으로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삼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지어졌다.

    이미 숨어있던 기척을 느낀 아삼이었지만 일부러 방관했다. 아직 황제를 찾지도 못 했기 때문에 굳이 그자를 살려서 위험을 감내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한 약조를 지켰지만 씁쓸해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아삼을 향해 달려들며 소리치는 복면인이었다.

    "공공, 피하십시오!"

    뒤에 있는 왕진을 향해 다급히 소리치며 들이치는 복면인이었다. 그런 복면인의 외침과 함께 그곳을 벗어나려는 왕진이었지만 섬뜩한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굴러야만 했다. 어느새 쏘아낸 아삼의 지풍이 그의 허벅지를 꿰뚫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꿰뚫린 허벅지와 허공을 격하고 쏘아진 기운이 그의 혈을 점했다. 그렇게 몸이 뻣뻣하게 굳은 왕진은 바닥을 굴렀고 아삼을 향해 들이친 복면인이 피 묻은 검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그 검은 간단히 아삼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단지 두 손가락으로 가볍게 검첨을 잡은 아삼의 모습에 경악하는 복면인이었다.

    '점창의 쾌검술을 이렇게 간단히 막다니?'

    경악하는 그 표정과 함께 싸늘한 한기가 파고드는 것을 느끼고 급히 손을 떼며 물러서는 복면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움직임도 이어지는 아삼의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차가운 한기와 함께 검신이 산산조각 나듯 부서졌고 날카로운 조각이 그를 향해 쏟아졌기 때문이다.

    규화보전의 음기를 흘려 넣고 검신을 후려치자 단단한 강철이 조각나며 부서졌다. 그리고 공중에 비산하는 조각을 향해 가볍게 손을 털자, 그것들이 암기로 변해서 복면인을 향해 날아갔다.

    투두두둑.

    전신에 빼곡하게 박힌 부서진 검신 조각에 그대로 절명을 하는 복면인이었다. 그런 그를 뒤로하고 아삼은 바닥에 쓰러진 왕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끄으윽. 아삼! 네 이놈!"

    - 네가 우리가 찾았던 그놈들의 수장이더냐?

    "그래. 내가 바로 네놈이 찾던 그들의 수장이다. 이제 속이 후련하더냐!"

    - 내겐 그저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너희들이 날뛰든 황실을 뒤엎든 크게 상관은 없었다. 다만…… 나까지 개입해야 하는 것이 귀찮았을 뿐이다. 그래서 너희들을 찾으려고 했던 거지.

    "……."

    - 황제께서는 어디 있느냐?

    "…… 내가 그것을 말할 것 같더냐?"

    - 쓸데없는 고집이군. 네놈이 빠져나온 것을 보면 이미 늦은 걸지도 모르지. 평생 그렇게 입을 다물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게 무슨 망발이냐?"

    아삼의 전심어서에 놀라서 되묻는 왕진이었지만 자신을 향해 손을 쓰는 아삼의 행동에 그게 무슨 뜻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끄으아아악!"

    그의 몸 안으로 파고드는 이질적인 두 기운에 고통스러워하는 왕진이었다. 얼어버릴 것 같은 시린 기운과 몸을 녹여버릴 것 같은 뜨거운 기운이 그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 고통에 힘겨워하는 그의 입에서는 죽여달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런 그를 가만히 두고 보는 아삼이었다.

    점점 파고드는 상반되는 두 기운에 목청이 찢어져라 비명을 토해내는 왕진이었다. 이미 혈도가 점한 몸은 움직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발버둥 칠 수도 없었다. 이마에 선 핏줄과 붉게 충혈된 눈은 그 고통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고 붉게 물든 한쪽 몸과 하얗게 서리가 낀 몸은 서로 다른 기운이 그의 몸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울부짖는 왕진을 뒤로하고 그곳을 벗어나는 아삼이었다. 이미 그가 살아날 수 없다고 확신을 하는 그였다.

    '네놈의 잘못된 판단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갔으니…… 편한 죽음을 줄 수는 없다. 고통 속에서 참회하거라.'

    지독한 고통 속에서 그동안 해왔던 자신의 일을 반성하라는 의미로 기운을 불어 넣은 것이었다. 다시 주변의 기척을 살피며 바쁘게 움직이는 아삼이었지만 토목보를 향해 달려가는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

    "어떻게 이런 치욕을 겪게 만든 단 말이냐! 짐을 능멸하려는 처사가 아닌가? 북경에 있는 신료들은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이냐!"

    "……."

    황제의 분기 어린 말에 싸늘한 적막이 흘렀다. 명 건국 이래 처음으로 황제가 사로잡힌 것이었다. 더군다나 50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이런 치욕을 당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화를 낸다는 것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황세웅이었다. 모두가 자업자득이었기 때문이다.

    황제를 보필하기 위해서 함께 출정한 그였다. 계속해서 간언하는 무장들의 명을 무시한 채, 왕진이라는 환관의 말만 귀담아듣던 황제의 어리석음을 바로 옆에서 겪었지만 그는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

    마지막까지 황제의 옆에 남아서 그를 보필했지만 황제의 옆에 있던 왕진은 이미 도망 간지 오래였고, 다른 환관들도 매한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황제를 지킨 황세웅은 죽음을 결심했지만 죽을 줄 알았던 그를 살린 것은 에센이라는 오이라트의 족장이었다.

    끝까지 남아서 대항하는 그 모습을 높이 산 에센이었고, 내공을 제압당한 채 황제를 시중하는 역을 맡게 된 황세웅이었다.

    '무슨 속셈일까? 황제 폐하를 살린 이유가……'

    생각보다 강했던 오이라트 족의 병사들이었다. 명의 정예병과 버금갈 정도로 훈련이 잘 된 그들이었지만 결정적으로 황제의 아둔함이 이번 전쟁을 패배로 몰아갔다.

    계속해서 불만을 토로하는 황제였고 그런 황제의 옆에서 묵묵히 그 불만을 받아내는 황세웅이었다. 무장도 해제 당한지 오래였고, 내공도 묶였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의 본분을 다하리라 마음먹은 그였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아삼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받은 은혜도 다 갚지 못 했거늘……'

    별다른 말도 없이 사라진 아삼이었고, 이 상황에서 그가 있었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거라고 여기는 황세웅이었다. 그렇게 씁쓸해 하는 그가 제풀에 지친 황제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익숙한 말이 들려왔다.

    - 무슨 한숨을 그리 크게 쉬는 건가?

    "……."

    뜬금없는 울림에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한 황세웅이었다. 그런 그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런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환청이라고 생각한 그가 고개를 흔들 때, 그의 앞에 낯익은 뒷모습이 가득 들어왔다.

    "아…… 아삼! 아니, 제독 태감!"

    - 오랜만이군.

    "……."

    반기는 아삼의 목소리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하는 황세웅이었다. 그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황세웅의 경악스런 외침에 지쳐서 눈을 감고 앉아있던 황제가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앞에 보이는 익숙한 모습에 놀란 듯 그를 바라봤다.

    -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소신이 너무 늦었사옵니다.

    "제…… 제독! 여기는 어떻게…… 혹, 짐을 구하러 온 것인가? 그놈들을 몰아낸 건가? 군은 어디 있는가? 왕진이 그대들을 불러온 것이군. 그래. 왕진이 해냈음이야!"

    아삼을 바라보며 밝은 표정을 지어보이는 황제였다. 그리고 그런 황제를 바라보던 아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예전의 그 총기는 모두 사라진 것인가?'

    변한 황제의 모습이 낯선 듯 침음을 삼키는 아삼이었지만, 그런 아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왕진을 찾는 황제였다.

    절망하고 좌절해 있던 황제가 다시 이전의 모습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런 황제의 행동에 한숨을 내쉬는 아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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