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76화 (76/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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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투

    쪽빛의 무복을 입은 사내 몇 명이 자금성의 오문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막 약관을 넘어서는 듯 한 모습의 사내들은 딱 벌어진 어깨와 단단해 보이는 몸으로 보아 무인으로 추정되었고 그런 그들 앞에 금의위 복장의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복장을 입은 사내는 바로 가영호였다.

    "사숙께 인사드립니다."

    자신을 향해 포권을 올리는 사내들을 바라보던 가영호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사내들을 훑던 가영호가 개중에 앞에 선 사내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이대 제자인 왕호라 합니다."

    "여기 있는 아이들이 전부인 것이냐?"

    가영호의 물음에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왕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고 그 모습에 다시 미간을 찌푸린 가영호가 퉁명스럽게 다시 물었다.

    "지금 서 있는 너희들이 전부냐고 물었다. 이번에 본산에서 보낸 인원들은 너희들을 제외하고 더 없냐고 묻는 것이다."

    그제서야 가영호의 말이 이해가 된 듯 왕호라는 사내가 고개를 숙이면서 답했다.

    "예, 장문인께서 저희 이대 제자들만 보내셨습니다. 가 숙부의 명을 들으라는 말씀과 함께 실전을 겪으라고 명하셨습니다."

    "……."

    왕호의 말에 가영호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자신의 사숙뻘인 장문인의 생각이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지원도 아닐 뿐더러, 저 아이들의 경험까지 고려하고 살려서 보내라는 속뜻에 그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아무리 관과 연을 끊는다 했다고 했지만 이건 너무 하지 않는가? 그간 누구 덕에 무당이 이렇게 성세를 이어갈 수 있었는지 잊었단 말인가? 내 공이 적지 않거늘…… 이거야 원, 겨우 구색만 맞춰 보내다니. 그것도 이대 제자들을 보내다니…… 이래서야 궁에서 내 입지를 어떻게 세운단 말인가? 하아.'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못 미친 무당의 처사에 속으로 한 숨을 내쉬는 가영호였다. 그렇다고 대놓고 불만을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좋든 싫든 그에게 아직까지는 무당이라는 배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비록 관과 연을 끊는다고 공표한 무당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가영호와의 관계를 단호하게 끊을 수는 없었다. 그간 가영호가 무당에 기여한 공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가영호에게 끌려갈 수도 없어서 나름 구색을 맞추어 보낸 것이었다. 전투를 통해 경험도 쌓을 겸, 가영호의 면도 세워줄 겸 보낸 것인데 자신의 기반을 모두 잃어버리다시피 한 가영호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붉어진 얼굴로 씩씩대는 가영호의 모습에 사내들이 어찌할 바를 모른 체 눈치만 보며 서 있었다. 최대한 분을 삭이는 그였지만 생각할수록 무당의 처사가 섭섭하게 느껴졌다.

    "무당의 고수를 보내 달라 했더니 겨우 후기지수라니…… 그것도 다섯 명의 아이들이라…… 도대체 내 면을 생각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참지 못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가영호의 말에 그의 앞에 서있던 사내들의 얼굴도 점점 굳어갔다. 비록 이대 제자라고는 하지만 무당이라는 이름이 가볍지는 않았다. 그런 자신들을 보고 면전에서 무시를 하는 가영호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간 가영호가 본 파에 공헌한 점을 알고 있는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가영호는 배분상이라도 자신들의 사숙뻘이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지. 나를 따라 오거라."

    차가운 표정으로 사내들을 향해 말을 내뱉은 가영호가 앞장서서 오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굳은 얼굴의 사내들이 그런 가영호의 뒤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금의위의 처소로 발길을 돌리던 가영호의 눈에 저 멀리 동창요원들과 함께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만태산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동창 소속의 환관들을 마주하자 더 기분이 상한 가영호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들은 누구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동창의 요원들을 바라보던 무당파 사내 하나가 왕호의 곁에 바짝 붙으며 물었다. 그러자 왕호가 가영호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하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동창이라는 놈들이다. 너희들은 곧 금의위로 배속될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겉모습은 그럴듯해 보이나 속이 부실한 자들이다. 사내로 가장 중한 것이 없으니 가까이 하지도 말거라."

    "……."

    이죽거리며 답하는 가영호의 말에 뒤따르던 사내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만태산의 얼굴은 붉게 변했다. 일부러 도발하는 듯한 가영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도 않을 뿐더러, 이전에 자신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려 했던 금의위가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태산도 지지 않고 이죽거리면서 대거리를 했다.

    "훗, 부실한 동창의 칼에도 이렇게 날이 서 있거늘 하물며 금의위 칼이 그리 무뎌서야. 쯧쯧쯧. 몰살이라는 단어는 책에서나 들어봤지 실제로 접할 줄이야. 너희들도 저들의 모습을 잘 보고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도록 하거라."

    동창요원들을 향해 큰소리로 당부하는 만태산이었다. 그 모습에 결국 분을 참지 못한 가영호가 만태산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반면교사(反面敎師)? 반면교사라니!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계집처럼 공을 탐하려고 뒤늦게 소식을 알리려다 폐주의 잔당을 놓친 너희들이 할 말이 있더냐?"

    "계……계집? 하! 그 대단한 금의위는 조그마한 장원에 숨어있던 마교 놈들의 분타에 모두 몰살을 당했다지? 참 대단한 금의위구나? 적어도 우리 동창은 그런 놈들에게 몰살이라는 수모를 당하지는 않았지.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구나. 나 같았으면 고개도 들지 못했을 텐데, 참으로 뻔뻔한 놈들이구나. 금의위는 그런 놈들만 따로 뽑아대는 것이더냐?"

    "이…… 이놈!"

    가영호와 만태산이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며 날선 눈빛을 주고받았다. 한참을 노려보던 두 사람이 분을 참지 못하고 내기를 끌어올렸다. 서로를 향해 날리는 무형의 기운에 주변의 기운이 싸늘하게 식었고 그 상태에서 이를 드러내는 가영호였다.

    "네 놈들이 한 가지만 없는 줄 알았더니 이제보니 사리분간도 못하는 반푼이였구나. 감히 동창 따위가 어디 금의위와 맞먹으려 하는 것이냐?"

    "몰살이나 당하던 놈들이 대단한 자부심이구나. 길고 짧은 것은 대보면 알겠지.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한번 붙어보겠느냐? 이번에 네 놈들 이름 앞에 '몰살'이라는 단어 말고 '패배'라는 단어도 붙여주마."

    "하하하. 뭐라? 붙어보자? 좋다. 네놈이 내뱉은 그 말!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지고 나서 계집애처럼 징징대지나 말거라. 동창 놈인지, 년인지 질질 짜는 꼴을 보려니 벌써부터 웃음이 나오는구나."

    서로 지지 않고 이죽거리는 두 사람이었다. 그런 둘의 기 싸움에 금의위의 단원과 동창요원들이 맞붙게 되었다.

    각자의 처소로 돌아간 만태산과 가영호의 행동이 분주해졌다. 이미 판은 벌어졌으니 어떻게든 자신이 속한 세력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는 쓸만한, 무공이 강한 자들을 뽑아야만 했다.

    '정육품직의 백호와 번역들 중에서 나설 자들을 골라야 한다라. 상한을 정한 이유가 따로 있나? 어차피 절정이상의 고수가 부족한 우리에게는 유리한 상황인데…… 가영호, 따로 생각이 있는 건가?'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신중하게 인원을 차출해야만 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고심을 하던 만태산의 미간에 내천 자가 아로 새겨졌다. 이 상태에서 금의위에게 진다면 그 책임은 모두 자신이 지게 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대전은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 만약 저들에게 지기라도 한다면 우리 동창은 끝까지 반푼이로 기억될 것이야. 누구를 뽑아야할까?'

    만태산이 동창 요원들의 이름이 새겨진 명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무공 실력이 뛰어나다 평가되는 세 명의 인원과 함께 팽인학 또한 그들과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있었다. 비록 팽가의 사람이라고 하지만 지금껏 보여줬던 팽인학의 실력이라면 능히 금의위에 맞서서 좋은 결과를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만태산이었다.

    '신문하를 잡을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지? 팽가에서 심은 아이인 만큼 허술하지는 않겠지.'

    지금은 누구의 사람이냐가 중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금의위를 눌러야만 했고 그들과의 대결에 나설 인물도 신중하게 뽑아야만 했다. 그렇게 명부를 훑던 만태산의 눈에 아삼의 이름이 들어왔다.

    '아삼? 이 아이의 무공실력은 앞서 뽑은 자들에 비해서 모자란데…… 어차피 한번쯤은 진다고 해도 상관없겠지. 정화 태감이 아끼는 아이가 납작하게 깨지는 꼴을 보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겠군. 하하하. 이것이 일석이조(一石二鳥)라는 것인가?'

    어느새 만태산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자신이 뽑아놓은 인원이 마음에 드는 듯 흡족하게 바라보던 만태산이 정해진 인원을 불러 들였다.

    가영호에게 불려간 황세웅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그런 황세웅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가영호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뒤에 동창 놈들과 인원을 차출하여 대련을 하기로 했으니 너도 준비하고 있거라."

    갑작스런 하명에 당황한 황세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대련이라니요?"

    "무슨 잔말이 그리 많으냐? 하라면 하면 될 것을. 내 너에게 일일이 설명해 주어야 한단 말이냐?"

    "아닙니다. 준비하겠습니다."

    퉁명스럽게 내지르는 가영호의 말에 황세웅이 고개를 숙이며 읍했다. 상명하복으로 어쩔 수 없이 응한 황세웅이었지만 그 뒤가 찝찝한 것은 사실이었다. 팽가의 사람이라고 알려진 자신을 가영호가 끌어들인다는 점이 내키지 않았다. 그의 윗선에 보고를 하고 싶었지만 가영호를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팽문호는 지금 가문의 고수를 추리느라고 바빠서 팽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황세웅이었지만 그래도 만약을 위해서 윗선에 보고를 올리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돌아나가는 황세웅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가영호의 얼굴이 미소가 어렸다.

    '금의위의 일이니 당연히 팽가도 함께 해야 하겠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일이 잘못돼도 나 혼자만의 책임은 아닐 터. 그 구실이라도 만들어 놔야겠지.'

    자신의 사람으로만 채운 상태로 행해진 마교 분타의 습격으로 큰 타격을 받은 가영호였다. 그리고 그 책임을 자신에게 미루고 능구렁이처럼 빠져 나간 팽문호는 양자의 일로 흔들리던 입지를 바로 잡으려고 분주했다. 이번에는 그가 혼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대비를 하는 가영호였다.

    ***

    황궁의 드넓은 연무장에 수많은 인원이 열과 오를 맞춰서 시립해 있었다. 그 앞으로 금무정과 만태산이 단위에 자리해 있었고 그 옆에 가영호가 그들과 똑같이 앉은 채로 전방을 주시했다.

    서로 다른 복장을 하고 있는 자들 앞으로 열 명의 인원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끼어있는 아삼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도대체 나는 왜 이들 사이에 끼어있는 거지?'

    곁눈질로 주변을 바라보던 아삼은 대표로 나선 다섯 사람들 사이에 속한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차출된 남은 네 명은 번역들 중에서 무공이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자들이었고 대외적으로 자신은 이들보다 실력이 미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교지를 받고 번역이 된 아삼이었지만 자신이 이곳에 나오게 된 이유가 만태산의 치졸한 복수라는 것을 알지는 못 했다.

    '이미 내 실력을 알고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주변을 둘러보는 아삼이었지만 적개심 어린 눈빛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자신의 실력을 드러낼지 고심하는 아삼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아주 느린 속도로 차오르는 규화보전의 내력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내력의 삼할 정도밖에 차오르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그 위력은 비교도 할 수 없었지만 문제는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드러내느냐는 것이었다.

    뜻밖의 상황으로 몰린 아삼의 머릿속은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복잡해졌고 이내 그 시작을 알리는 듯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삼의 순번은 네 번째였다. 상대는 노란색 비단 옷에 칼을 비껴 찬 자로 비어복과 비슷한 형태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특이한 점은 그가 찬 칼이 다른 자들과는 다르다는 점이었다. 그 이외에도 앞으로 나선 두 사람이 같은 형태의 칼을 차고 있었다. 그것은 칼이 아니라 검이었다.

    송문고검.

    도를 사용하는 다른 금의위들과는 다르게 검을 비껴 찬 자들이 입고 있던 의복이 어색한 듯 경직된 표정으로 서있었다. 이전에 가영호를 따라서 궁으로 들어선 무당의 이대 제자들이 그들이었다. 그 중에 세 명이 금의위의 대표로 그곳에 나간 상태였다.

    어디선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왕호가 고개를 돌려서 옆을 바라봤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몸을 훑는 아삼과 눈이 마주쳤다.

    긴장한 듯 딱딱하게 굳은 아삼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 왕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경직된 몸을 이완시키면서 조금 전에 가영호가 한 말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놈들에게 밀려서는 안 된다라? 어차피 관에 속한 자들의 실력이야…… 우리 무당의 발끝에도 못 미칠 터. 황궁에 오래 있었는지 사숙이라는 자의 판단도 많이 흐려진 것 같군. 대외적으로는 우리 무당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일 테지만.'

    가영호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는 왕호의 얼굴이 이내 진지하게 바뀌어갔다. 자신들을 무시했던 가영호에게 자신들의 실력을 보일 차례였다. 관부의 나부랭이들과는 격이 다른 진정한 무인의 모습을 보일 생각에 더 없이 진중하게 변한 왕호였다.

    ============================ 작품 후기 ============================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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