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75화 (75/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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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투

    중화전으로 향하는 팽문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황제가 자신을 은밀히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지만 누군가 자신의 발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방관하고 있었던 거야. 그 후궁이 폐주의 잔당이라니…… 황제를 해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 하아. 하늘이 우리 팽가를 버리는 것인가?'

    생각에 잠겨 걷던 팽문호가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자신을 부르면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어린 환관의 모습에 의아해하던 그가 어린 환관의 말에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동지 어르신? 동지 어르신? 중화전은 저쪽입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그제서야 자신이 중화전을 지나쳤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팽문호였다. 멋쩍은 듯 씁쓸하게 웃던 팽문호가 어린 환관을 앞세우며 말했다.

    "알았다. 어서 가자꾸나."

    조금씩 타들어가는 입술을 축이며 팽문호가 중화전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따라 위엄있게 앉아 있는 영락제가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조용히 황제의 눈치를 살피던 그가 고개를 숙이면서 예를 보였다.

    "폐하, 부르셨사옵니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는 팽문호를 향해 영락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영락제의 모습에 무릎을 꿇은 팽문호가 굳은 얼굴로 납작 엎드리며 죄를 청했다.

    "폐하,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소신의 가문이 크나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그 죄 달게 받겠사옵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죄를 청하는 팽문호였다. 그리고 그런 팽문호의 모습을 그저 바라만보는 영락제였다. 넓은 중화전에 두 사람만이 있었고 그런 중화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이 태산보다 더 크고 무겁게 느껴지는 팽문호였다.

    '왜 아무런 말씀도 없으신 거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고 있는 것인가? 폐주의 잔당과 연관이 있다는 걸 아시면서도 우리 팽가를 그들과 엮지 않으신 걸 보면 뭔가 따로 생각하시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지금껏 영락제를 가까운 곳에서 보필하면서 그 누구보다 그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는 팽문호였다. 팽가가 이번 일에서 거론되지 않는 것을 봤을 때에는 황제가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자신에게 아니, 팽가에게 황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는 팽문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때, 침묵을 깨고 영락제가 위엄있는 목소리로 앞에 있는 팽문호에게 말했다.

    "이미 그 일은 잊은지 오래네. 자네도 그만 잊어버리게. 당연히 자네의 뜻이 아니었음을 잘 아네. 그러니 그리 죄를 청할 필요도 없네."

    "황공하옵니다. 폐하."

    황제의 말에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리는 팽문호였다. 그런 팽문호를 보던 영락제가 예의 그 위엄있는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년에 친히 몽고로 원정을 떠날 것이네. 허나, 넓은 초원에 말을 타고 움직이는 몽고의 기마병들을 우리 명의 대군이 대적하기에는 그 한계가 있네. 몽고의 지리에 밝지도 않거니와 기마에 능한 몽고 놈들인지라 매번 애를 먹고 있지 않던가? 우리 명의 대군을 보면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서 숨는 놈들을 쉽게 잡을 수 없지 않았던가?"

    미간을 찌푸리는 영락제의 모습에 팽문호의 두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아무래도 자신의 가문에 죄를 묻지 않은 이유가 몽고 원정과 관련이 있는 듯싶었다. 초조하게 영락제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마른 입술을 깨무는 팽문호였다.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이번 원정에는 고수가 필요할 것 같네. 정형화된 훈련에 익숙한 명의 군보다는 무공에 능한 고수라면 종잡을 수 없는 몽고의 기마병들을 능히 대적할 수 있지 않겠나?"

    그제서야 영락제의 의중을 파악한 듯 팽문호가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야 자신들의 가문이 그 일에 엮이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몽고원정에 무공의 고수를 원하는 거였구나. 우리 가문을 살린 이유는……'

    "폐하, 미천하나마 소신의 가문에 고수들이 몇 있사옵니다. 그들이 이번 원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신 팽문호 능히 그들을 폐하께 바치겠사옵니다."

    황제의 의중을 읽은 그가 선수를 치며 나섰고 그런 팽문호의 말에 황제 역시 만족한 듯 얼굴 가득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게 해 주겠나? 내 자네의 충심은 잘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먼저 나서주니 참 든든하네. 이번 친정에서 자네 가문의 고수들이 세운 공은 온전히 팽가의 것으로 돌아갈 것이네. "

    "아니옵니다. 폐하. 응당 소신이 먼저 청했어야 할 일이옵니다."

    "하하하, 그렇게 생각해 주다니 고맙군. 내 자네의 충정이야 알고 있었지만 쉽지 않은 일임에도 이렇게 결단을 내릴 줄이야. 내 팽가의 충심을 잊지 않을 것이네.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해 주게."

    "화…… 황공하옵니다. 폐하.

    "참, 폐주의 잔당과 관련된 일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 것이네. 아니 처음부터 자네의 가문은 엮이지 않은 일이네. 알겠는가?"

    "예,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팽문호가 고개를 숙이며 길게 읍을 했고, 그런 팽문호를 바라보는 황제의 두 눈이 빛났다. 그리고 그 눈빛을 받은 팽문호가 다시 한 번 읍을 하면서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황제의 의중이 이미 그쪽으로 쏠린 상황이었다. 드넓은 늪에 양발이 빠져든 상황이었다. 여기에서 발버둥 쳐봤자, 더 깊숙이 가라앉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였다.

    '내 불찰이다. 내 실수로 팽가의 고수들이 전장으로 내몰리게 되었구나. 하아.'

    중화전을 나서는 팽문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결국 이런 것이었구나. 여전히 무서운 분이시다. 황제는…… 아직은 우리 가문이 쓸모가 있다고 판단한 건가? 처음부터 황궁과 엮이지 말아야 했어. 내 불찰이야.'

    팽문호가 긴 한숨과 함께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화전을 돌아봤다. 내키지 않았지만 황제의 명을 따라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오늘따라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되돌아가는 팽문호의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중화전을 빠져 나오는 팽문호를 멀리서 보게 된 가영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팽문호? 저자가 중화전에는 무슨 일이지? 따로 폐하를 접견하고 나오는 것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멀어지는 팽문호를 바라보던 가영호의 두 눈에 불안함이 어렸다. 일전에 마교의 분타를 습격했을 때의 일로 가진 기반을 모두 잃다시피한 그였기 때문이다.

    무당파 출신인 가영호.

    무당파 출신의 인사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그였지만 점점 권력을 탐하기 시작했다.

    영락제를 등에 업은 가영호 덕분에 무당파는 많은 도관을 세울 수 있었고 재정적으로 커다란 어려움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 도움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도관의 규모는 이전보다 훨씬 커졌지만 무림에서 무당파를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무림과 관은 서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뜨린 무당이었기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시선이었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무당의 장문인은 더 이상 황제의 비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관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상 무림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직에 매여있는 가용호와 대외적인 연을 끊으면서 무림에서의 위용을 세우려 노력했다. 물론 가영호와의 연을 완전히 끊은 것은 아니었다.

    가영호 역시 내년에 있을 몽고 원정에 고수가 필요하다는 황제의 명을 받아 문파에 고수를 파견해달라고 청했지만 더 이상 관부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장문인의 서찰과 몇몇 무인만 지원을 받은 상태였다.

    '고작 구색을 맞추는 이 인원으로 뭘 한단 말인가? 이대로 이 금의위를 팽문호에게 빼앗기는 것은 아니겠지? 젠장. 무당이 어찌 나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생각보다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인원에 실망한 가용호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지금의 무당파가 이런 성세를 누리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의 희생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서 자신을 모른 체하는 그들의 행태에 적잖은 실망을 느끼는 가영호였다.

    ***

    궁으로 돌아온 아삼의 일상은 다시 이전과 비슷하게 돌아갔다. 첫날 여기저기 끌려다니면서 그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진술을 해야 했지만 은연중에 떠도는 소문과 함께 그의 처지가 확연하게 달라져버렸다.

    더 이상 자신의 행적과 마교의 여인에 관해서 의문을 제가하는 자들이 없었고 이전부터 자신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던 세력들의 움직임도 멈췄다.

    정화가 관심을 보이는 사람.

    아삼이라는 이름보다 그 말이 제일 먼저 붙었고 그런 호칭 덕에 껄끄러운 일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잡스럽고 번잡한 일은 더 이상 그의 몫이 아니었다. 궁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삼의 눈치를 보는지 귀찮은 일들은 다른 요원들에게 돌아갔고 그와 같은 위치에 있던 아이들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화라는 후광의 효과인가?'

    이전보다 늘어난 자유로운 시간에 씁쓸하게 웃던 아삼은 주어진 시간을 활용하기로 마음 었다. 근래에 들어서 그에게 걱정스럽게 다가오는 일들이 몇 가지 생겼고, 이를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했다.

    그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바로 내기였다. 규화보전의 내기가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전과 같이 폭발적으로 몸집을 불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미미한 양만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동자공으로 내기를 쌓을 때보다 더 느려진 그 속도는 그를 조급하게 만들었고, 차라리 동자공의 내기를 채우자고 마음을 먹었지만 동자공의 구결로 내공심법을 수련해도 차오르는 것은 미미한 음기뿐이었다.

    스스로 그런 현상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아삼은 불안해했지만 누군가에게 쉽게 털어놓을만한 성질의 것들이 아니었다. 그저 다시 규화보전의 구결대로 내기를 움직이면서 차오르는 기운을 갈무리 할 뿐이었다.

    미미하게 쌓인 그 기운은 커다랗게 변한 아삼의 단전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모자랐지만 그 성질만은 이전에 느꼈던 규화보전의 그 강렬한 기운과 다를 것이 없었다. 빠른 속도와 맹렬한 기운. 거기에 아삼의 의지대로 발현되는 극음의 기운.

    '음기를 표출할 수 있는 것은 내 의지대로라지만 이렇게 쌓이는 내력이 미미해서야…… 이전에는 감당할 수 없는 내력이 걱정이었고, 이제는 턱없이 모자란 내력이 걱정이라니. 하아. 쉬운 길이 없구나.'

    자신이 지금 규화보전을 제대로 익히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길로 돌아가는지 그런 사실들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이전에 사마택이 줬던 그 책에서도 지금 자신과 비슷한 현상을 보였던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송화'라는 환관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그 무공을 익혔다는 사람에 관해서 쓰인 내용은 없었다.

    앞으로 아삼이 겪을 규화보전에 관한 일들은 모두가 생소하고 처음 겪는 일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이겨낼 수 밖에 없었다.

    규화보전에 관한 무공과 함께 일전에 만났던 마교의 여인에 관한 궁금증도 그에게 고민을 가져다주었다. 그 여인을 접했을 때 느꼈던 익숙한 느낌과 함께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몸의 떨림들.

    분명히 그 친숙한 느낌을 가진 여인이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난 이후에 정확히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 뒤에 부딪쳤던 빙마후라 불리는 여인의 음한 장력.

    자신의 이름을 불렀던 여인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빙마후라는 여인이 쏘아낸 장력의 힘을 흩트리려고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아삼이었다.

    '분명히 마지막에…… 그 힘을 줄이려는 것 같았어. 위력을 줄인 장력이 그 정도일 줄이야.'

    침음을 삼키던 아삼이 아직까지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아희의 얼굴을 기억하며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여인의 모습은 본능적으로 끌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딱히 말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반드시 그 여인을 찾아야만 할 것 같았다.

    은밀하게 그 사실을 조사하고 싶었지만 자신에게는 황궁을 벗어날 수도, 그럴 시간도 없었다. 기회가 되면 그 여인에 관해서 한번 알아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아삼의 눈이 허공을 향했다.

    '아호, 아영……'

    갑자기 떠오른 어린 동생들의 모습이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마음에 걸리는 두 아이의 모습에 지필묵을 찾아든 아삼이 정성스럽게 글을 적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코멘트 감사합니다.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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