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71화 (71/204)
  • 0071 / 0204 ----------------------------------------------

    조우

    몸에 있던 내기가 모조리 빠져나간 것 같았다. 느껴지는 기운이 하나도 없이 공허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로운 기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단전에 채워진 작은 기운은 이내 언덕에서 굴러내린 눈덩이 마냥 점점 커져만 갔고 급속도로 들어찬 그 기운에 이전의 부딪침으로 더욱 커진 단전을 가득 채웠다. 채워진 그 기운들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극음의 기운들이었다.

    규화보전의 그 지독한 음기. 그것들이 아삼의 단전을 가득 채워왔고 그 묵직한 느낌과 함께 아삼의 머릿속에 사마택이 건넸던 책의 내용이 떠올랐다.

    규화보전은 환관에 의해서 창시되고 300년 동안 익히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을 익히던 자들의 상태에 대해서 적힌 책에는 한 환관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쓰여 있었다.

    '송화'라던 환관은 뒤늦게 규화보전을 익힐 수 있었다. 마흔을 넘어서 쉰 가까이 되는 그가 규화보전을 익혔고 실제로 음기를 쌓는 과정까지는 성공을 했다.

    그렇게 쌓은 음기는 무서운 속도로 그의 단전을 채웠고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써도, 써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차올랐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황제의 명에 따라 무림이라는 곳을 정벌하러 떠났고 실제로 그와 맞선 자들은 하나같이 온몸이 얼어붙은 채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의 행태에 분한 무인들이 하나 둘 씩, 그를 찾아왔고 모두를 물리친 그의 위명은 높아져만 갔다.

    빠르고도 강력한 기운. 그리고 어지간한 무인은 대하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얼어붙을 지독한 음기.

    이를 바탕으로 그와 싸운 무인들은 모두 고혼이 됐고 그 당시에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무인들조차도 그와 대적하기를 꺼려했다. 그렇게 '천하제일'이라는 칭호가 그에게 붙으려고 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그런 대단한 실력자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온 몸이 얼어붙은 상태로.

    후에 그 상황을 의아해하던 무림인들이 그의 시체를 찾아서 그 원인을 찾았고, 그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낱낱이 밝혀졌다.

    그가 거세를 당한 상태였다는 점과 그의 무공이 규화보전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가 죽은 이유가 차오르는 음기를 감당하지 못 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최초로 규화보전을 온전히 익혔다고 생각되던 '송화'라는 자도 규화보전의 음기에 먹힌 것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아삼은 지금 자신의 상태가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몸 안에 급속도로 차오르는 음기와 함께 충만한 느낌들. 물론 더 이상 몸이 떨어져나갈 것 같은 한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모아진 그 기운이 자신을 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글을 읽었던 아삼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송화라고 불렸던 자와 내 상황이 다르지 않다. 결국에는 나도 그렇게 죽을 수 밖에 없다는 말인가?'

    죽을 고비는 넘긴 것 같았다. 천요희의 소수마공과 함께 깨어진 사마택의 봉인이 결국에는 위기를 만들었지만 전심어서를 익히기 위해서 수련한 상단전의 기운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 위기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차오르는 음기와 머릿속에 떠오른 송화라는 환관의 최후를 떠올린 아삼은 자신의 상황에 더욱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 때, 규화보전을 처음 넘기면서 필사했던 첫 구절을 떠올린 아삼의 입에 처음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무림칭웅 휘검자궁(武林稱雄 揮劍自宮).'

    무림에서 영웅이라 칭하고 싶다면 검을 들어 먼저 자신의 성기를 베어라.

    규화보전을 익히고 싶다면 남자로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자신의 분신을 베어라는 말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고 아삼에게는 그 구절의 뜻이 다르게 느껴졌다.

    '송화라는 자도 결국에는 온 몸이 언 상태로 목숨을 잃었다고 했어. 그 말은 몸에 극음의 기운이 쌓였고 그 기운을 다스리지 못했다는 말이겠지? ‘무림칭웅 휘검자웅.’ 자신의 성기를 버리라는 말은 남자로서 중요한 것을 버리라는 뜻. 무인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내공인가? 아니 내공이 정확하다. 차오르는 충만한 음기를 버린다면 당연히 그렇게 죽을 일은 없다!'

    떠오르는 생각에 확신을 갖은 아삼이 자신의 몸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부러진 두 팔은 단단하게 다시 붙은 상태였다. 제법 큰 상처였지만 손쉽게 붙어버린 것을 확인한 모습에 놀란 아삼이 자신의 목과 사타구니에 있는 상처를 살피려고 했지만 본능적으로 아직은 낫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부의 기운들이 두 팔로 몰렸고 부러진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에서 그 기운들이 모두 소모된 것이었다. 완벽한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몸에 남은 상처가 낫지 않았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린 아삼은 눈을 돌려서 자신의 단전과 혈맥들을 살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때,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이 나타났다. 아삼이 단전에 쌓인 기운을 느낄 때, 먼 곳에서 새로운 기척이 느껴졌고 그 기운이 그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커다란 기운을 가진 그 존재가 먼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면서 근처로 다가섰고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끈질기게 따라붙던 귀찮은 존재를 떼어 버리기 위해서 그자를 따돌리면서 빠른 속도로 이동하던 그의 기척에 먼 곳에서 커다란 기파가 잡혔고 갑작스런 상황에 의아해하면서 그곳으로 움직인 것이었다. 그리고 기파가 터져 나왔던 근처로 움직인 그자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마치 겨울이 온 것 같았다. 동장군이 일대를 습격한 것처럼 새하얗게 얼어붙은 주변이 10장 가까이 펼쳐져 있었고, 아직도 그 일대는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지독한…… 음기다.'

    그렇게 주변을 살피던 자의 눈에 얼어붙은 공간의 한 복판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앳돼 보이는 얼굴과 바스러진 상의 사이로 보이는 백옥 같은 피부.

    '이 일대를 이렇게 만든 자가…… 저자인가? 너무 어린데. 설마…… 반로환동의 고수?'

    아삼의 모습을 보던 낯선 인영이 놀라워하며 그를 주시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만난 고수들 중에서 저런 어린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천천히 그 모습을 주시하면서 상대가 반응하기만을 기다렸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 아삼의 모습에 결국 참지 못한 그가 크게 소리쳤다.

    "당신은 누구죠?"

    갑작스런 목소리에 관조에서 깨어난 아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냥 지나치기를 바랐지만 그러기에는 바뀐 경관이 너무나 눈길을 끌었다. 어차피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냥 무시하려 했지만 앞에 선 상대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지독한 음기로군요. 어떤 무공이죠? 설마…… 마공인가?"

    되묻는 그 음성이 싸늘하게 변했다. 여전히 무시하는 아삼의 행동에 결국 참지 못한 그자가 천천히 아삼을 향해 걸어갔다. 그 움직임을 눈치 챈 아삼의 눈이 떠지면서 시린 정광을 뿜어냈고 그 모습에 움찔한 상대가 걸음을 멈췄다.

    "당신은…… 누군가요?"

    다시 되물어오는 물음에 고민하던 아삼이 그를 바라봤다. 조금 전에 몸을 관조하면서 떠올린 생각은 바로 단전이 텅텅 비어버릴 때까지 내공을 버리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나타난 변화가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다.

    결국 자신의 궁금증도 풀 겸, 내공도 소모할 생각으로 앞선 자를 향해 몸을 돌린 아삼이었다.

    '가지고 있는 기운이 보통이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자들 중에서 가장 큰 기운을 품고 있는…… 여자다.'

    "사파나 마교 쪽 사람인가요?"

    - 남에 대해 묻기 전에 먼저 자신의 정체부터 밝히는 것이 예의 아닌가?

    "……."

    아삼의 전심어서에 당황한 듯한 상대가 머뭇거렸다. 마음속에 들리는 목소리로 봐서는 불문의 무공을 익힌 것 같았다. 흔히 알고 있는 ‘혜광심어’라고 판단이 들었지만 반경 10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무공은 생전 본 적도 없는 낯선 광경이었다.

    '이런 음기는 소수마공뿐인데…… 설마?'

    "내 이름은 당새아라고 해요. 당신은…… 마교 쪽 인사인가요? 아니면 황궁의 고수인가요?"

    자신의 정체를 되묻는 여인의 말에 놀란 아삼이 그녀를 바라봤다. 상의가 한기로 바스러진 상태에서 자신의 정체를 추정하는 그 모습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자 그 시선을 느낀 당새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당새아(唐賽兒).

    영락제 치하 말년이 되면서 징벌과 천재지변 때문에 곳곳에서 농민의 반란이 일어났다.

    영락 18년(1420) 2월, 청주 포대현(蒲臺縣) 출신 당새아(唐賽兒)라는 사람이 당시 중국 각지 농민층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 백련교(白蓮敎)라는 종교 조직에 기대어 반란을 선언했고, 당새아가 이끄는 반란군은 산동지방을 중심으로 맹위를 떨쳤다. 조정에서는 진압에 나섰으나 번번이 패전하다가 겨우 반란을 가라앉혔지만 그 주모자인 당새아를 잡지는 못했다.

    이에 영락제는 '삭발하고 중이 되었거나 여도사(女道士) 무리에 당새아가 숨어 있을지 모르니 산동과 북경의 비구니들과 출가한 부녀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조칙을 내렸고 그렇게 해서 붙잡힌 여자만도 수만 명에 달했다. 그러고도 결국 당새아는 잡지 못 했다.

    그런 당새아가 아삼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두 자루 검을 등에 맨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모습과 함께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에 마음을 다잡은 아삼이 그녀를 노려봤다.

    - 내 내력은 왜 묻는 거지?

    "내가 알기로는 ……이런 음기는 소수마공 아니면 규화보전 밖에 없죠. 반로환동을 한 것인가요?"

    반로환동이라는 말을 듣던 아삼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어린 아이의 몸에 들어간 자신을 생각하면 반로환동이라는 말이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씁쓸한 아삼의 표정에 당새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내 다짐을 한 듯 등에 매인 검을 한 자루 꺼내든 당새아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두 무공 중, 하나만 무림에 나와도 피바람이 불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행동에 고통을 받을 사람들은 바로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난을 주도했던, 스스로 불모라 칭했던 당새아는 자신이 앞에 있는 자를 막아서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검을 꺼내서 겨누는 당새아의 행동에 미간을 찌푸리던 아삼도 이내 마음을 다잡고 그녀를 바라봤다. 달라진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치면서 주변의 분위기가 가라앉았고 서로의 빈틈을 노리던 순간, 당새아가 들고 있던 검으로 바닥을 뒹구는 돌을 날렸다.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돌을 보고 슬쩍 옆으로 피한 아삼의 몸이 당새아의 시야를 벗어났다. 절정을 넘어서서 새로운 경지에 들어선 자신의 눈을 피하는 아삼의 속도에 그녀가 놀란 눈으로 주위를 살피자 원래 있던 곳에서 3장을 벗어난 위치에 아삼의 모습이 나타났다.

    엄청난 경신술에 놀란 당새아가 그를 바라봤고 자신의 움직임에 당황한 아삼이 자신이 서있었던 장소를 바라봤다.

    '이런…… 빠르기라니.'

    분뢰공의 묘를 더한 무영보법에 규화보전의 음기가 섞이자 마치 공간을 격하고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순식간에 위치가 바뀌는 모습에 아삼 본인조차 적응을 할 수 없었다.

    '엄청난 고수다. 나조차 저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었어. 어디에서 저런 고수가 나타났을까?'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는 아삼의 모습을 지켜보는 당새아가 침음을 삼켰다. 이대로 자신이 저자를 막아설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이미 공격을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저자가 이대로 돌아갈지도 의문이었다.

    그런 당새아의 의문을 풀어주려는지 먼 곳에 서있던 아삼이 바닥을 박찼다. 최대한 기운을 자제하려고 무영보법만을 펼치는 그였지만, 이전의 내공으로 분뢰공의 묘를 더한 무영보법을 극성으로 펼치는 것보다 더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극음과 극쾌. 괜히 규화보전이 최강의 무공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아니구나.'

    충만한 내력뿐만 아니라 그 기운의 성질 또한 아삼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당황한 당새아가 뽑아든 검을 휘둘렀고 적절한 그 공격에 뒤로 물러선 아삼의 몸이 잔상도 남기지 않고 다시 뒤로 물러섰다.

    '나를 농락하는 것인가!'

    자신을 놀리는 듯한 아삼의 행태에 당새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생각보다 절묘한 검술에 급히 뒤로 물러선 아삼은 다급한 마음에 분뢰공을 시전한 자신을 탓해야만 했다. 분뢰공이 섞인 무영보법은 순식간에 그를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고 허공을 향해 휘두른 자신의 공격에 민망해하던 당새아가 본격적으로 기운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퍼져 나오는 당새아의 기파에 쉽게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 아삼도 본격적으로 기운을 끌어올렸다. 몇 번의 움직임으로 바닥을 박차면서 거리를 조절한 아삼의 손이 허공을 격했다.

    충만한 단전에서 빠르게 뻗어 나온 기운이 아삼의 장심을 통해서 빠져나갔다. 평소라면 행할 수 없는 장력이 뻗어나가기 시작했고 그 기운의 끝에는 당새아가 서 있었다.

    극음의 기운이 뻗어나가면서 주변의 공기를 얼렸다.

    파츠츠츠.

    순식간에 얼어붙은 공기가 얼음 조각을 만들었고 날카로운 얼음 기둥이 아삼의 장심에서부터 당새아를 향해 떨어졌다. 황당한 그 공격은 수많은 실전을 겪었던 당새아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극음의 기운이 쏟아지자 주변을 얼리기 시작했고, 기다랗고 날카로운 얼음기둥이 자신을 향해 쏟아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장력이라는 건가?'

    어마어마한 그 위력에 당황한 그녀가 날아드는 장력의 한복판에 들고 있던 검을 찔러 넣었다. 푸른빛이 넘실대는 그녀의 검첨에서 진한 실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면서 기운들이 뭉쳐졌고 다가오는 장력과 부딪쳤다.

    쿠구궁.

    푸른빛이 어린 당새아의 검과 얼음기둥으로 변해서 그녀를 덮치는 아삼의 장력이 부딪쳤다. 터져나가는 얼음과 함께 당새아의 검이 기둥을 헤치면서 아삼을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다가오는 검을 본 아삼의 장심에서 더욱 강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 작품 후기 ============================

    코멘트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