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67화 (67/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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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본(拔本)

    무릎을 꿇은 인학의 처절한 외침에 무표정하게 그를 내려다보던 아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뒤에 잡혀있던 신문하도 갑작스런 상황에 어리둥절한 채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비장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인학이 애원하기 시작했다.

    "살려다오. 저자를 잡은 공을 내게 넘겨다오. 내 그러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다."

    "……."

    "그 동안 너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이렇게 후회하고 있어. 정말 미안했다. 나는 저자가 꼭 필요하다. 내 목숨이 걸린 일이야. 아니, 우리 가문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저자가 꼭 필요하다. 제발! 제발 나를 좀 도와다오. 아삼!"

    무릎을 꿇은 채 애원하는 인학의 모습은 진심이 담겨있었다. 저 자존심 강하던 놈이 자신에게 비는 것을 보면 팽가에 얼마나 큰 위험이 비켜갔는지 새삼 깨닫게 된 아삼이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바라보는 아삼의 눈빛에 점점 다급해지는 사람은 바로 인학이었다.

    이내 큰 결심을 했는지 품안에 손을 집어넣은 그가 아삼의 앞에 공손히 무언가를 내밀면서 말을 이어갔다.

    "소…… 소공단이다. 팽가의 비전으로 만들어진 환약으로 내공 증진에 도움을 주는 영약이다. 이것을 주마. 저자를 내가 잡은 것으로 해다오."

    "……."

    "제발. 제발!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네가 어려움에 처할 때, 반드시 도울 것이야. 팽가의 이름을 걸고…… 아니, 내 조부의 존함을 걸고 맹세한다. 나 이인학! 네 은혜를 꼭 갚을 것이다. 천지신명 앞에 맹세를 한다. 도와다오. 아삼!"

    처절한 인학의 모습에 묶인 신문하를 바라보는 아삼이었다.

    '이자를 넘기면 앞에 있는 놈을 살릴 수 있을까? 황제는 이번 일에서 팽가를 제했지만 팽가 입장에서는 그것이 더 불안하겠지? 그리고 그 원흉이 된 놈은 인학. 저놈이 공을 세워서 내쳐지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더 이득일까? 적어도 당분간 팽가의 시선이 나를 향하지는 않겠지. 빚을 지운다라……'

    그가 잠깐 동안 고심을 하는 사이에 먼 곳에서 일련의 무리들이 빠른 속도로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기척을 느낀 인학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삼의 눈치를 살폈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삼의 앞을 가렸다.

    어쭙잖은 인학의 행태에 쓴웃음을 지은 아삼이 그의 손에 들린 소공단을 빼들면서 쥐고 있던 포승줄을 넘겼다. 그 행태에 고맙다는 눈짓을 보낸 인학이 줄을 끌면서 다가오는 사람을 맞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

    다가와서 되묻는 사람은 첩형인 금무정이었다. 다른 요원들을 대동하고 다가선 금무정이 주변을 살폈고 쓰러진 두 환관과 잡힌 신문하를 보면서 앞에 서있는 아삼과 인학을 바라봤다.

    "도망가던 자들을 잡았습니다. 환관 한 명은 목이 꿰뚫려 절명했고, 남은 자는 제 도격을 막고 떨어져나갔습니다. 잘만 하면 목숨을 살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보호하던 신문하라는 늙은 환관을…… 제가 잡았습니다."

    "흐음."

    인학의 보고에 그와 아삼을 바라보던 금무정의 눈이 빛났다. 이내 고개를 돌린 그가 뒤를 따르던 다른 요원들을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곳에서 궁을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을 수색해라. 오문을 중심으로 모두 뒤져야 할 것이다. 이자들과 동조한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라. 금의위의 협조를 얻어서 수상하다 싶은 자들은 모조리 추포하라."

    "예! 첩형."

    명을 받은 당두가 고개를 숙이면서 남겨진 자들을 대동하며 그곳을 벗어났다. 신문하를 잡고 있던 인학이 금무정의 눈치를 보면서 의중을 묻자, 그의 뒤에 있던 당두들이 신문하를 연행하면서 인학과 아삼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 때, 아삼의 귀로 금무정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 저 아이에게 네 공을 넘긴 것이더냐?

    갑작스런 전음에 뒤를 돌아보자 아삼을 직시하던 금무정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그 행동에 고개를 숙여서 읍을 한 아삼이 급히 다른 이들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금무정의 얼굴에 고소가 지어졌다.

    '무슨 생각에서 자신의 공을 넘긴 것이지? 욕심이 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릇이 크다는 것인가? 알 수 없는 놈이로구나.'

    아삼의 허리춤에 포승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챈 금무정은 붉게 충혈 된 인학의 눈과 더럽혀진 옷을 보고 대강의 상황을 눈치 챘다. 그리고 자신의 공을 돌린 아삼이라는 아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인가? 정 공공과 사 태감이 선택한 아이니 특별한 무언가가 있겠지.'

    그렇게 황제의 명을 수행하던 금무정은 황궁에 남아있는 건문제의 잔당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그 색출은 온전히 잡힌 자들의 문초에서 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새빨간 횃불이 일렁이고 비릿한 혈향과 역겨운 누린내가 진동한 어두침침한 방의 구석에 늙은 환관이 결박당한 채 의자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얼마나 고문을 당한 것인지 온 몸이 피범벅이었고 여기저기 살점이 뜯겨져 나가 있었다. 성한 곳은 찾아볼 수가 없던 그 늙은 환관은 아삼에게 잡혔던 신문하였다. 산발한 머리로 결박당한 채 앉아있던 그였지만 그의 두 눈만큼은 기세가 죽지 않은 듯 독한 빛을 띠고 있었다.

    "…… 모른다 하지 않았더냐? 있지도 않는 배후를 어찌 말한단 말이냐?"

    여전히 독기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가로 젓는 신문하였다. 그런 신문하를 바라보는 구영고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독한 놈이다. 늙은 환관의 인내심이 대단하구나. 이쯤하면 토설하고도 남을 터인데…… 어지간히 해서는 입을 열지 않겠구나.'

    "네 놈 뒤에 폐주의 잔당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네 놈이 아무리 입을 열지 않는다 해도 곧 밝혀질 것이니 그렇게 애쓸 필요는 없다. 네 놈도 잘 알지 않느냐? 네 놈이 입다문다하여 못 알아낼 우리가 아니란 것을."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구영고가 신문하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지만 이내 눈을 감고 굳게 입을 다무는 신문하의 표정에 얼굴을 구겼다. 이제는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확고한 신념을 가진 듯한 그 모습에 혀를 내두르려 할 때, 그곳으로 동창의 번역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서 귓속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 말을 듣던 구영고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거 어떡하지? 네 놈의 인내가 헛수고가 됐구나. 이미 다른 놈이 모두 토설했다는구나."

    구영고의 말에 신문하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 지독한 놈들. 연왕 네 놈이 한 짓으로 이 명은 망해갈 것이다.'

    지금까지 받은 고문을 떠올리던 신문하의 몸이 잘게 떨려왔고 그의 눈에는 허무함이 떠올랐다. 그렇게 영락제를 저주하던 신문하가 있던 곳에서는 계속되는 신음소리와 고통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고문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신문하의 행태에 그에게 그 화를 푸는 구영고였다.

    한편, 어두컴컴한 방 안에 초췌한 모습으로 멍하게 앉아 있는 왕소화의 앞으로 아삼과 인학 그리고 몇몇 동창요원들이 들어섰다. 모든 걸 포기한 듯 생기 없는 두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왕소화가 자신 앞에 선 인학을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건넸다. 쓸쓸해 보이는 왕소화의 그 미소가 가슴에 와 박힌 듯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는 인학이었다.

    "잠깐…… 다들 나가있어라."

    갑작스런 인학의 말에 모두가 주저하면서 서로를 바라봤다. 모두가 같은 시기에 동창에 들어섰지만 아직까지 직위가 높은 사람은 번역인 인학이었다. 그의 말에 어찌할 줄 몰라하며 쭈뼛대던 요원들이 아무 말 없이 방을 나서는 아삼의 모습에 덩달아 읍하고 따라 나섰다.

    "……괜찮으십니까?"

    요원들이 모두 나간 것을 확인한 인학이 나직이 물었고 그 물음에 씁쓸히 웃던 왕소화가 답을 했다.

    "네 눈에는 내가 괜찮아 보이느냐?"

    그녀의 되묻는 말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인학이었다. 그저 이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여인이라고 해서 예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인학이었지만 여기저기 생채기 난 왕소화의 얼굴을 차마 바로 볼 수 없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아렸기 때문이다.

    "그런 연민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 모두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니…… 다만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가는 내가 과연 문향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로구나."

    회한 가득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왕소화였다. 눅눅하고 습기가 올라오는 지하에서 받는 문초였지만 마치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그녀였다. 어느새 가늘게 떨리던 속눈썹과 함께 맺혀있던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인학이 조용히 침음을 삼켰다.

    "그나저나 나 때문에 네가 곤란하게 됐겠구나. 그래도 이리 무탈한 것을 보면 하북 팽가의 위세가 대단하긴 하구나."

    "송구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예를 올리는 인학을 바라보며 왕소화가 나직이 말했다.

    "됐다. 나한테 미안해 할 거 없다. 서로 필요에 의해서 이용했을 뿐이다. 내 너에게 마지막으로 충고 하나 하마. 이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절대로 다른 사람을 믿지 말거라. 네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믿지 말라는 말이다. 특히 이 궁에서는……"

    "명심하겠습니다. 마마."

    자신을 바라보며 쓸쓸히 웃는 왕소화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인학이었다. 마치 자신의 가슴에 아로새기듯 그렇게 왕소화의 얼굴을 정성스레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자신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여인이었고 처음으로 연정이라는 걸 알게 해준 여인이었다. 그 여인의 마지막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왕소화를 바라보는 인학의 두 눈에 연정과 함께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났다.

    잡아들인 잔당의 토설로 폐주의 잔당들이 '삼청객잔'이라는 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동창이었다. 곧이어 대대적인 추포령이 내려졌다. 이번에는 동창뿐만 아니라 관군과 금의위까지 동원되는 대규모의 추포령이었고 이번에야말로 폐주의 잔당을 뿌리 뽑겠다는 황제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제독."

    쳡형 금무정의 말에 동창의 제독으로 올라선 오건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어갔다.

    "알겠네. 지금 바로 출발하도록 하게."

    "예. 제독. 그럼 지금 관군과 금의위에 연통을 넣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네. 관군은 움직이되 금의위에는 따로 연통을 넣을 필요는 없네. 금의위에는 내가 따로 연통을 넣어서 시기를 조절하겠네."

    음흉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을 내려 보는 오건휘의 의도를 눈치 챈 금무정이 고개를 숙이면서 읍을 했다.

    금의위보다 뒤늦게 세워진 동창이었다. 그렇다고 두 무리가 서로 다른, 완전히 구분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서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알력을 부리는 두 집단이었다. 어떻게든 공을 세워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금의위보다 빠르게 움직여야만 했다. 특히 이런 중요한 일은 금의위보다 하루라도 먼저 출발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득으로 작용할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금무정도 오건휘의 의중을 짐작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검은색 관모에 검은색 목면 그리고 검은 휘장을 휘두른 동창 요원들이 넓은 공터에 시립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당당히 선 흰색 목면을 입고 있는 금무정이 그들을 내려다보면서 내공을 실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리고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그의 목소리에 시립해있던 요원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지금부터 폐주의 잔당들을 추포하러 갈 것이다. 이번 기회에 폐주의 잔당들을 뿌리 뽑으라는 폐하의 엄명이 계셨으니, 모두들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명심하거라.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날선 금무정의 말에 시립해 있던 동창 요원들이 고개를 숙이면서 짧게 답했다. 어느새 시립해 있는 동창 요원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자, 그럼 출발한다."

    말에 올라탄 동창요원들이 산서성을 향하여 내달렸다. 그들을 태운 말의 콧바람이 거세지고 숨소리가 거칠어질 때, 금무정의 지휘아래 달리던 말을 멈추고 다시 정렬하면서 시립하는 동창요원들이었다.

    이미 연통이 갔는지 산서성에 있던 관군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그들을 지휘하던 관리 한명이 금무정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런 관리와 함께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던 금무정의 고개가 연신 끄덕여졌고 무언가를 지시하기 시작했다. 이내 그가 시립한 동창의 요원들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지금부터 무리를 나눠서 움직인다. 이미 각 번역들에게 임무를 부여했으니 나머지 요원들은 번역의 통제에 잘 따라서 차질 없이 명을 이행토록 하거라."

    금무정의 하명에 동창요원들이 길게 읍하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자 나눠진 위치로 움직인 동창요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 작품 후기 ============================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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