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26화 (26/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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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궁무고

    자신의 눈앞에서 규화보전을 필사하는 사마택의 모습은 아삼의 정신을 그곳으로 쏠리게 만들었다. 자꾸만 필사를 하는 사마택만 힐끗거리게 되는 아삼이었다. 신경 쓰지 않아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본능적으로 향하는 눈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규화보전'이라는 네 글자가 주는 마력은 그의 머리에 깊이 새겨졌고, 머릿속을 떠도는 단어는 좀처럼 집중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내서당에서의 교육도 그렇고 필사를 하면서 외우려던 비급들도 그렇고 어느 것 하나 집중이 되지 않았다.

    "에잇."

    필사를 해나가던 사마택이 붓을 내던지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아삼이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네놈은 네 할 일이나 하거라."

    사마택의 호통에 아삼이 얼른 고개를 숙이면서 다시 붓을 들었다. 하지만 앞에서 씩씩대는 사마택의 숨소리와 그 앞에 놓인 비급 때문에 좀처럼 집중을 할 수 없는 아삼이었다.

    붓을 놓은 사마택은 이마를 괴면서 지금 처한 상황에 고심해야만 했다.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지만 그 일들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여기에 앉아서 이런 짓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그렇지 않아도 곧 돌아오실 정화태감을 맞이하려면 준비하고 처리할 시간도 촉박한데……  익히지도 못할 비급에 왜 호기심이 동하셨는지…… 한동안 저 어린놈의 필체만 봐서 그런지 내 글은 못 봐주겠군. 저 놈의 필체가 워낙 좋아서 그런지 오늘따라 내 필체는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 같구나.'

    어느새 아삼이 필사해 놓은 종이에 절로 시선이 가는 것을 확인한 사마택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다른 환관들의 세력을 견제하기도 모자란 마당에 지금 여기에서 한가하게 필사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무리 황제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다던 정화태감이었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이었다.

    지금 다른 놈들을 키워놓으면 그 나중이 더 위험해 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사마택은 앞에서 열심히 붓을 놀리고 있는 아삼을 바라봤다.

    '저 놈에게 한 번 맡겨 볼까? 필사만 하는 놈이 이런 난해한 무공을 배울 수는 없겠지. 그것도 입문하기가 까다로운 조건이니……'

    한참을 고민하던 사마택은 다시 한 번 아삼을 바라봤다.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자질과 드러내지 않는 속내를 떠올린 그가 곰곰이 가능성을 점쳤다. 만약 규화보전의 필사를 맡긴다면 촉박했던 시간을 벌 수 있었지만 문제는 유출이었다.

    '벙어리라 그 조건은 좋은데…… 만에 하나라도 이 비급을 익힌다면?'

    만약 필사를 맡긴다면 아삼이라는 존재는 지워야만 했다. 그렇게 하기에는 앉아있는 아이의 재능이 아까웠다. 벙어리에 필체가 좋은, 그것도 환관이 된 아이는 쉽게 얻을 만한 인재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저놈의 필체가 보기에도 좋을 듯한데…… 지금껏 필사를 맡겼지만 딱히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고 저 놈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할까?'

    한참을 고심한 끝에 결국 결심을 굳힌 사마택이 굳은 얼굴로 아삼을 불렀다.

    "오늘부터 이 책을 필사하도록 하거라. 한꺼번에 다 필사하지 말고 내가 정해주는 곳 까지 나눠서 필사하도록 하거라. 황자마마께 드릴 것이니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비급의 존재는 머릿속에서 지워야 할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살기를 흘리면서 단호하게 묻는 사마택의 말에 아삼의 고개가 크게 숙여졌다. 이대로 몸이 찢겨질 듯한 느낌에 절로 식은땀이 흘렀고 바들바들 떠는 아삼을 본 사마택은 조심스럽게 비급을 건내면서 아직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삼을 바라봤다.

    '이 정도의 살기에 노출됐으면 내 말을 허투루 듣지는 않았을 테지.'

    아삼을 보던 사마택이 천장 위의 복면인을 바라봤다. 서로 눈빛을 확인한 두 사람이 미비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고개를 돌린 사마택이 아삼을 바라봤다.

    "게으름 피울 생각 말거라. 그리고 한 자 한 자 정성껏 써야한다. 마지막으로 절대 비급의 내용을 기억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만에 하나 비급의 존재라도 밖으로 새어나가는 날에는 그날이 네놈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마지막 엄포를 잊지 않던 사마택이 무고를 나섰다. 자신의 시야에서 사마택이 사라지자 입술을 앙다물고 있던 아삼의 얼굴에 안도감이 내비쳤다.

    '살기라는 것인가?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려오다니…… 그만큼 규화보전이라는 놈의 가치는 대단한 것일 테지?'

    사마택의 엄포에 되려 확신을 갖게 된 아삼이었다. 평범한 아이 같았으면 그의 말을 따랐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삼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드디어 갈망하던 힘을 갖게 될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설레는 표정이 얼굴에 나타날까봐 입술을 깨물면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아삼이었다. 아직까지 천장에 있을 또 다른 감시자를 생각한 그가 두근대는 가슴을 억누르려고 노력했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고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던 아삼이 조심스럽게 놓여진 규화보전의 첫 장을 넘겼다.

    무림칭웅 휘검자궁(武林稱雄 揮劍自宮)이라는 글자가 맨 처음 눈에 들어왔다.

    '무림에서 영웅이라 칭하고 싶다면 검을 들어 먼저 자신의 성기를 베어라.' 환관이 지은 책이라더니 이 비급을 익히기 위해서는 우선 거세를 해야 하는 것 같았다. 이미 그 조건을 충족한 아삼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익힐 수 있는 게 아닐까? 라는 기대감에 더 정성껏 다음 구절을 적어나가는 아삼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기대감은 산산이 부서졌다. 규화보전을 익힐 수 있는 조건은 하나가 아니었다.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만큼 익힐 수 있는 제약도 심했다.

    다 같은 환관이라고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만들어지고 300년 동안 익힌 사람이 없는 이유가 있었다. 입문하는 조건 중에 하나가 최소한 50년의 동정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적혀있었다.

    거세된 자가 최소 50년은 동정을 유지해야만 이 비급을 익힐 수 있는 것이었다.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고 하더라도 50살이 넘어가면 이미 원로의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날 때부터 무공을 익힐 수도 없으니 50은 더 넘기는 나이에야만 비로소 입문할 수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동정을 유지하기도 힘들 뿐더러 거세까지 해야 되는 상황이라면 쉬이 익힐 수 없는 무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명이 자자한 이유는 순전히 그 위력 때문이었다.

    지금은 익힐 수 없는 그림의 떡이었지만 이 규화보전을 자신의 머릿속에 새겨두어야만 했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도 몰랐기 때문에 나중을 위해서라도 볼 수 있을 때 확실히 새겨두어야 했기 때문에 조금의 실망을 했지만 붓을 놀리는 아삼의 눈빛은 반짝거렸다.

    며칠 후, 필사를 끝낸 아삼이 조용히 사마택을 향해 종이를 내밀었다. 헛기침을 하면서 살펴보던 사마택의 얼굴에 만족한 듯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럼 다음 장을 필사하도록 하여라."

    사마택의 하명에 아삼이 길게 읍하면서 상으로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본 사마택이 필사된 종이를 옆구리에 끼고 조심스럽게 무고를 나섰다. 기다리고 있을 주고희를 향해 가는 것이라고 확신한 아삼은 다시 필사를 하면서 남은 구절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으려고 노력했다.

    잠시 후, 무고로 돌아온 사마택이 필사하고 있던 아삼을 불렀다.

    "지금부터 나를 따르거라. 황자마마께서 너를 보자고 하시는구나. 어차피 말을 하지 못하니 말실수를 하지는 않을 테지만 행동 하나 하나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아삼이 길게 읍하며 사마택의 뒤를 조심히 따랐다. 갑자기 황자가 자신을 왜 보자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서야만 했다.

    '혹여 필사한 게 잘못되기라도 한 건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아삼의 가슴이 방망이질을 해대는 것처럼 쿵쾅거리면서 떨려왔다.

    "황자마마, 소신 사마택이옵니다. 하명하신대로 그 아이를 데리고 왔사옵니다."

    "안으로 들라."

    사마택이 다시 한 번 아삼을 돌아보며 신신당부를 했다. 그리고 앞장서서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긴장한 아삼이 종종걸음으로 뒤따랐다.

    "사태감은 이만 가 보시게. 내 이 아이와 할 일이 있으니."

    뜻밖의 하명에 사마택과 아삼의 눈이 커다래졌다.

    '갑자기 이 아이를 부른 것도 의아했는데 아삼만 놔두고 가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지?'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어찌 한낱 환관이 황자의 하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사마택이 길게 읍하고는 처소를 나섰고 돌아서는 사마택의 눈과 아삼의 눈이 부딪쳤다. 자신을 매섭게 바라보는 사마태의 눈빛에 더 긴장한 아삼이 두 손을 굳게 쥐었다.

    "형님들 제가 말한 아이가 바로 저 아이입니다. 저 아이의 필체를 보시면 아마 제 말 뜻을 이해하실 것이옵니다."

    주고희가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아삼을 내려봤다. 그리고 그런 주고희를 따라서 한왕 주고후와 조간왕 주고수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아삼을 바라봤다. 갑작스런 시선에 몸 둘 바를 모른 듯 멍하니 서 있는 아삼을 향해 주고희가 나직하게 말했다.

    "내 너의 필체를 형님들께 보이고 싶어 부른 것이니 그리 긴장할 필요는 없다. 자, 여기 지필묵이 있으니 너의 필체를 한 번 드러내 보거라."

    주고희의 하명에 아삼이 조심스레 붓을 들었다. 일필휘지로 글자를 써내려가기 시작했고 그런 아삼의 필체에 한왕 주고후와 조간왕 주고수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어허, 그 놈 필체 한 번 멋지구나. 조금만 더 가다듬는다면 명필이라고 칭해도 될 수준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아우 덕에 간만에 눈이 즐거웠습니다."

    아삼의 필체를 감상한 세 황자의 얼굴에 만족한 듯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에 잔뜩 긴장했던 아삼의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아삼을 눈여겨보던 주고희와의 만남은 그렇게 지나갔다.

    몇 달 후, 내서당에 시립해 있던 아이들의 눈이 또 다시 반짝거렸다. 정태감의 뒤를 따라 낯선 사내 하나가 내서당으로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람한 덩치에 험한 인상의 사내가 두 눈을 부라리며 아이들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주눅이 든 듯 아이들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정태감의 눈짓에 사내가 아이들 앞으로 나서서 소리쳤다. 어찌나 우렁찬지 내서당이 다 울릴 정도였다.

    "오늘부터 너희들에게 고문(拷問)을 가르칠 금의위 정육품직의 백호(百戶) 위수창이다. 많은 말은 하지 않겠다. 행동으로 보여줄 터이니 두 눈 똑똑히 뜨고 잘 보도록 하거라."

    위수창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두려운 눈빛의 한 남자가 훈육 환관들에게 붙들린 채 내서당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남자의 뒤를 따라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기구들이 들어왔다.

    훈육 환관들에 의해 의자에 앉혀진 남자가 두려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남자의 앞에 다가간 위수창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릴 정도로 선명하게 들려왔다.

    "여기 눈앞에 있는 죄인은 폐주(廢主)의 잔당으로 의심되는 자들 중에 한 명이다. 너희들의 교육을 위해! 심문과정을 이곳에서 보이도록 하겠다. 똑똑히 봐두거라."

    말을 마친 위수창이 뒤에 걸린 도구들을 훑으면서 눈을 빛냈다. 그리고 그 눈빛을 접한 아이들의 팔뚝에 소름이 돋아났다.

    계속되는 위수창의 잔인한 행동에 내서당에 있던 아이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도저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행태였고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마음대로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고문하는 방법 하나하나를 친절히 설명까지 곁들여서 자행하는 위수창의 모습에 보고 있는 아이들의 몸이 움찔 거렸다.

    개중에는 그 잔인한 모습을 참지 못하고 토악질을 해대는 아이들도 존재했지만 이어지는 훈육 교관들의 으름장에 다시 고개를 들어서 그 모습을 바라봐야만 했다.

    "나중에 네놈들이 해야 할 일들이다. 토설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것보다 더한 것들도 서슴지 않고 해야 할 것이야!"

    계속되는 고문에 앉아있던 낯선 자의 몸은 넝마가 되었다. 살인지 넝마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고 바닥도 피로 흥건했다. 저렇게 많은 피를 흘리고도 죽지 않는 것을 보면 위수창이라는 자의 실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의 반증이었다.

    계속해서 입을 다물고 있던 남자의 입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이미 터져버린 입술에는 걸레가 된 것처럼 찢어져 있었지만 그 자의 눈빛은 이미 체념한 듯이 보였다.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눈빛에 바라보던 아이들의 눈에 동정의 빛이 흘렀다.

    "네놈의 뒤를 봐주고 있는 자들을 토설해 보거라."

    "으으으."

    죽어버린 눈빛의 사내를 바라보는 위수창의 눈이 다시 번뜩였다. 그 눈빛을 본 남자가 경기를 일으키듯이 몸을 떨면서 급히 알고 있는 내용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건문제. 폐주의 연호가 거론된 것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잘 알려진 단체의 이름도 그자의 입을 통해서 거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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