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17화 (17/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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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궁에서

    옆에서 노려보는 인학을 무시한 아삼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면서 주변을 살폈다. 자신 또래의 아이들 모두가 두려운 눈빛을 띤 채 눈만 껌벅거릴 뿐 쥐 죽은 듯이 조용한 방안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의 숨소리만이 방 안에 가득할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회색빛을 띠는 긴 상의 위에 진한 감색의 짧은 겉옷을 걸치고 검정색 바지의 환관복을 입은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모두 일어서거라."

    환관 특유의 간들어지는 목소리로 말하던 사내의 음성에 모여 있던 아이들이 주춤거리면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굼뜬 아이들의 행동에 미간을 찌푸린 환관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빨리 빨리 못 하느냐?"

    그 호통에 놀란 아이들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방에 들어선 환관의 눈치를 보면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아이들을 향해 사내가 예의 그 간들어지는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말했다.

    "모두 아랫도리를 벗어라."

    갑작스런 명에 놀란 아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면 눈치만 보고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쉽게 움직일만한 명이 아니었다. 머뭇거리는 아이들의 행동에 다시 한 번 채근하는 환관이었다.

    "뭣들 하느냐?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게냐?"

    독기를 품은 환관의 눈빛에 중앙에 서 있던 아이 하나가 허리춤을 풀면서 바지를 내렸다. 그 아이의 모습에 다른 아이들도 주섬주섬 바지를 내리기 시작하자 흡족해하던 환관이 허옇게 까발려진 아이들의 하체를 보고 웃음을 지었다.

    "가끔씩 양물이 살아있는 놈들이 있지. 그 사실을 숨기고 들어오는 놈들을 직접 찾아내려 함이다."

    이유를 설명하던 환관이 뒤따라 들어오는 환관들과 함께 아이들의 아랫도리를 하나하나 검사하기 시작했고, 이내 모든 검사를 마친 그가 다시 가는 특유의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제 되었다. 다들 바지를 다시 올리거라. 그리고 지금부터 호명한 아이들은 앞으로 나오거라."

    "……."

    앞으로 나선 환관이 품에서 꺼낸 종이를 펼치면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송상호, 팽인학, 문아삼, 방태옥, 강하문, 고기현."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아삼과 인학, 그리고 처음 보는 아이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확인한 환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방문을 가리켰다.

    "너희들은 이 방을 나가서 가장 좌측에 있는 처소를 쓰도록 하여라."

    그들을 기점으로 여섯 명의 아이들이 한데 묶여서 불려졌고 그렇게 아삼은 이인학과 함께 다른 4명의 아이들과 같은 방을 내정받았다.

    중앙에 원형의 탁자와 좌우에 3개씩 각자 사용할 침상이 놓여 있는 간촐한 방이었다. 방에 들어선 아이들 각자가 침상을 배정받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가지고 온 짐을 풀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서 조금 전에 가장 먼저 바지를 내렸던 아이가 말했다.

    "난 방태옥이라고 해. 앞으로 같은 방을 쓰게 됐으니 서로 도와가며 잘 지내보자."

    방태옥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인학이 앞으로 나섰다. 눈치를 보면서 아이들의 행동을 살펴본 인학은 두어 명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말을 이어갔다.

    "난 팽인학이다."

    자신의 이름만을 강조한 이인학의 얼굴에 거만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이인학의 행동을 바라보던 방태옥의 얼굴에 찌푸려졌지만 이내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보기 좋은 미소를 흘렸다.

    "나는 송상호야.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들어오게 됐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 잘 지내보자."

    송상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듯이 말하자, 그 뒤를 이어서 강하문과 고기현도 자기소개를 하고 나섰다. 하지만 단 한사람 아삼만은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고 침묵하고 있었다.

    "너는 왜 말이 없어?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아무런 말도 없는 아삼을 빤히 바라보던 방태옥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하지만 아삼의 입은 열릴 생각이 없었다. 아니 말을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목을 다친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몰랐기 때문이다.

    "……."

    "후훗, 그놈의 이름은 아삼이야. 벙어리라서 말을 못 하지."

    코웃음을 치던 이인학이 아삼을 가리키면서 조롱하는 듯이 말을 했고 그 말을 듣던 방태옥은 몰래 눈을 빛내면서 벙어리라고 하던 아삼을 바라봤다.

    "너는 이 아이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드…… 들어오기 전에 인적사항이 적힌 것을 몰래 볼 수 있었다. 벙어리라는 아이가 있어서 유의깊게 본 것 뿐이야."

    얼버부리는 인학의 말에 방태옥이라던 아이도 그냥 넘기면서 아삼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우리 잘 지내보자."

    자신을 향해 방긋 웃는 방태옥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방태옥의 손을 잡는 아삼이었다. 조금 전에 자신을 보면서 번뜩이던 방태옥의 태도가 수상했지만 그 뜻을 모르니 우선은 손을 맞잡을 뿐이었다. 벌써부터 이상한 기류가 흘렀고 그것을 눈치 챈 아삼은 황궁에서의 삶이 생각했던 것 보다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

    "모두들 밖으로 나오거라."

    갑자기 바깥에서 들려오는 간들어지는 목소리에 아이들은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예의 그 환관이 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밖으로 나와서 모이는 아이들을 보인 그 환관은 아이들의 수를 확인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오늘부터 너희들을 훈육할 정훈이라고 한다. 너희들은 정태감님이라 부르면 된다. 자, 이제부터 나를 따르거라."

    앞장 선 정태감의 뒤를 수많은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환관 특유의 걸음걸이로 앞장서던 정태감의 발걸음이 내서당(內書堂)이라고 써진 방 앞에 멈춰섰다.

    내서당은 환관의 훈육을 담당하던 곳으로 앞으로 어린 환관들이 배워야할 일련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이곳에서 교육을 받을 것이다. 황제 폐하를 모시기 위한 훈육이니 배움에 있어 한 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아이들을 보면서 엄숙하게 말하던  정태감이 내서당 안으로 들어섰고 그런 정태감을 따라서 아이들도 내서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서당 안에는 정태감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방 안을 두르듯이 아무런 표정도 없이 서있는 환관들이 들어서는 아이를 반겼다. 아마도 그들의 교육을 도울 환관이었지만 그 덩치가 상당했고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은 긴장하듯이 쭈뼛대면서 서 있을 뿐이었다.

    긴장한 모습을 보이면서 서 있는 아이들을 향해 정태감이 말했다.

    "환관의 기본은 내뱉는 소리와 걸음걸이에서 부터 나온다. 오늘은 그것들에 관해서 교육하도록 하겠다. 궁에 있는 동안 유지해야 할 몸짓들이니 유념해서 잘 보도록 하거라. 우선 환관의 걸음걸이는 이렇게 상반신을 약간 구부리고 종종걸음으로 걸어야 한다. 이후에 이런 걸음걸이를 소홀히 하는 아이들은 경을 칠 것이니 그렇게 알거라."

    정태감이 상반신을 구부리면서 종종걸음으로 걷는 시늉을 보였다. 조금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였지만 누구도 웃는 아이들이 없었다. 그만큼 무거운 분위기였고 도끼눈을 번뜩이면서 옆에 서 있는 환관들의 눈빛은 어린 아이들이 두려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다들 보았느냐? 그럼 한 번 자세를 잡아 보거라. 옆에 있는 환관들이 도움을 줄 것이다."

    정태감의 말이 끝나자 아이들이 걸음걸이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들 하나하나를 살피며 정태감과 옆에 서 있던 다른 환관들이 아이들의 자세를 고쳐줬다.

    "허리를 더 구부리거라. 넌 왜 이리 촐싹 맞는 것이냐? 좀 더 숙이거라. 과도하게 무릎을 굽히면 안 된다 하지 않았더냐!"

    아이들의 자세를 고쳐주던 정태감이 한 아이의 앞에 멈춰섰다. 유독 따라하지 못 하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그 아이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린 그였다.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는 아이를 본 정태감이 엄한 표정으로 그 아이를 바라봤다.

    "내 말을 이해하긴 한 것이냐? 어찌 이리 못하느냐? 그 표정은 무엇이고?"

    엄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태감의 모습에 당황한 아이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애써 표정을 감추려고 했지만 한 번 드러난 표정은 쉬이 감출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해 보겠습니다."

    그런 아이들 매섭게 노려보던 정태감이 아이의 뺨을 세게 갈겼다.

    짜악.

    "다시 한 번 지껄여 보거라."

    갑작스런 정태감의 행동에 멍해있던 아이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이전에 내뱉은 말을 생각해 냈다.

    "송구합니다. 다시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짜악.

    "다시 한 번 지껄여 보거라."

    "송구……하옵니다. 다시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짜악.

    다시 한 번 아이의 얼굴에 불똥이 튀었다. 힘껏 돌아간 얼굴과 함께 코에서는 붉은 코피가 흘러내렸고 한껏 부풀어버린 볼을 부여잡으면서 울먹거리던 아이의 모습에 정태감의 호통이 이어졌다.

    "이 놈, 네놈은 내 말을 허투루 들은 것이더냐? 어찌 그런 거칠고 굵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더냐? 다시 한 번 말해 보거라."

    "송구하옵니다. 저는……"

    하지만 이번에도 맘에 들지 않았는지 정태감의 손이 아이의 뺨을 향했다.

    "다시 해 보거라. 다시!"

    어느새 아이의 두 눈에 맺혔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제서야 얼어있는 아이들을 둘러 본 정태감이 훈계하듯이 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무릇 환관이란 가늘고 나긋한 목소리를 내야 하는 법이다. 명심, 또 명심해라. 너희들은 이제 무식하고 상스러웠던 사내아이가 아니다. 이제부터 목소리 하나하나 걸음걸이 하나하나 신중히 해야 할 것이야. 알아들었느냐?"

    "예."

    "이놈들이 그 말을 듣고도 그런 목소리를 내뱉는 것이더냐? 진정 경을 쳐야 알아먹을 것이더냐?"

    "아…… 아니옵니다."

    가녀린 목소리로 대꾸를 하는 아이의 소리에 고개를 돌린 정태감이 그 아이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급히 눈을 깔면서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본 정태감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선을 돌렸다. 답을 한 아이는 바로 이인학이었다.

    이인학을 주의 깊게 보던 정태감이 모든 아이들을 향해서 다시 한 번 당부의 말을 건냈다. 그리고는 맨 앞에 선 아이들 향해 다가갔다.

    "너부터 해 보거라."

    정태감의 명령에 따라 아이들이 제각기 얇은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그런 아이들을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꼼꼼하게 가르치는 정태감이었다.

    "이번에는 네 차례다. 어디 한번 해 보거라."

    어느새 정태감이 아삼의 앞에 멈춰섰다. 하지만 말을 하지 못하는 아삼이 소리를 낼 리가 만무했다.

    "……."

    "무엇 하는 게냐? 지금 내 말이 안 들리는 게냐?"

    난처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어대는 아삼이었지만 되려 반항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줄 알던 정태감은 아삼의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런 정태감의 앞을 방태옥이 급히 막아섰다.

    "네놈은 뭐냐? 이게 무슨 짓이냐?"

    정태감이 방태옥을 노려보면서 노한 듯이 소리쳤다. 정태감의 앞을 막아서던 방태옥이 가로막던 손을 내리면서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조아리면서 읍을 했다. 천천히 들어올리는 그의 눈이 정태감을 바라봤고 그 아이의 시선을 맞이한 정태감의 몸이 움찔거렸다.

    "태감어른, 이 아이는 말을 하지 못하옵니다. 벙어리로 알고 있습니다."

    정중한 태도로 머리를 구부린 방태옥의 말에 당황한 정태감이 기색을 숨기면서 말을 이어갔다.

    "벙…… 벙어리더냐?"

    새삼 놀랍다는 듯이 아삼을 바라보는 정태감이었다. 그의 시선을 접한 아삼은 고개를 조아리면서 그의 말에 수긍을 했다.

    "흠흠…… 알았다. 그럼 네가 해 보거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아삼을 지나친 정태감은 다시 옆에 서 있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다시 훈육을 시작했다.

    '젠장, 엄한 일로 곤란해 질 줄이야. 말을 못 하는 게 이렇게 답답한 일이었던가?…… 아니지 저런 목소리를 내느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미비하게 인상을 찌푸리던 아삼은 자기 자리로 되돌아간 방태옥의 시선을 느끼면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두 아이의 눈빛 부딪쳤고 자신을 보면서 웃고 있는 방태옥의 모습에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를 건네는 아삼이었다.

    '저 놈은 뭐지? 분명히 정태감이라는 자와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는데…… 지금까지 강압적이던 정태감이 저 아이를 보고 움찔한 이유는 뭘까? 벌써부터 시작된 건가? 암투라는 것이?'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듯한 방태옥이라는 아이와 그 아이와 아는 듯한 정태감의 행동에 의심을 품은 아삼이었다.

    자신이 들어선 곳이 궁이라는 곳을 알고 더욱 신중을 기하려고 노력하는 그였다. 이전의 기억에서도 그렇고 지금 상황에서도 그렇고 황궁이라는 곳은 쉬이 마음을 놓을만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다.

    그렇게 황궁에서의 첫 날은 지나갔다. 그 흉흉한 겉모습을 조금 확인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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