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16화 (16/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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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정

    가주의 공표가 있고 난 이후에 세 아이들에게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준비할 시간이 주어졌다. 고단한 무예 수련도 머리 아픈 글공부도 없이 오롯이 자신만의 시간이 주어졌지만 정작 아삼은 이런 시간이 더욱 고달펐다.

    '환관이라고? 그것도 황궁에서 생활을 한다니……'

    황궁에서의 생활이 그리 녹록치는 않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였다. 모든 권력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고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암투와 술수가 넘쳐날 것인지는 굳이 겪어보지 않았어도 쉬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삶이 자신의 앞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답답해져 오던 아삼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홀로 방에 앉아서 긴 한숨을 내쉬던 그 앞에 갑자기 복면을 쓴 사내가 나타났다.

    "소가주께서 찾으신다. 뒤따르거라."

    다짜고짜 나타나서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내의 모습에 깜짝 놀란 아삼이었지만 소가주가 찾는다는 말에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들어오너라."

    자신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짓는 팽명민을 향해 아삼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낮게 숙이는 자신의 모습이 익숙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속으로 쓴 웃음을 삼킬 때, 환하게 웃던 팽명민이 자리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거기 앉거라."

    "……."

    "팽가의 양자가 되지 못해서 많이 서운했느냐?"

    팽명민의 물음에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젖는 아삼이었다. 딱히 그 자리에 욕심은 없었다. 다만 그 교육을 다 받고도 자신의 뜻대로 못 움직인 다는 사실이 떨떠름할 뿐이었다.

    "혹여 내게 바라는 것이 있느냐? 있다면 여기에 적어 보거라."

    종이와 붓을 내미는 팽명민의 행동에 조용히 그를 바라보던 아삼은 잠깐동안 고민을 했다. 자신에게 뭔가 바라는 듯한 태도였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일지 한번 생각을 해봐야 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아삼의 태도에 쓴 웃음을 짓던 팽명민은 슬쩍 눈을 감으면서 당돌하다면 당돌할 아삼의 태도에 실소를 터뜨렸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꽤나 재밌는 아이였다. 도저히 10살남짓의 아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며칠 후면 이 아이는 황궁으로 들어갈 것이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이 아이의 마음을 얻어야만 하는데……'

    팽명민은 솔직히 아삼이라는 아이에게는 아무런 사심없이 다가서고 싶었다. 황세웅과 마찬가지로 그저 사나이 대 사나이로 통하고 싶다는 맘이 더 컸다. 그래서 이렇게 고심하면서 다가가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아삼은 일필휘지로 내려 쓴 종이를 팽명민에게 내밀었다. 그 종이에는 단 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無"

    종이를 받아든 팽명민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스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 아이라면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미소를 지으면서 아삼을 바라봤다.

    "없다라. 좋다. 너는 없다고 했으나 그래도 팽가와의 조그마한 인연이 이어졌으니 이대로 끝맺기에는 내가 너무 아쉽구나. 듣자하니 가난한 집안 때문에 이곳까지 들어왔다고 하더구나. 내가 너를 대신해서 네 가족들을 돌봐주겠다. ……황궁으로 들어간다면 아마도 어렵고 힘든 일들도 많이 겪게 될 것이다. 혹여 나중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팽가를 찾아오너라. 내 너를 모른 척 하지 않을 것이다."

    아삼은 호의 섞인 팽명민의 말에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에게 뭔가를 바라고 있다. 뭐지? 소가주라는 자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까닭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아삼의 얼굴에 팽명민의 입가가 미비하게 떨렸다. 다른 사람은 혹할 조건을 너무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너무 이질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저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이렇게 호의를 배풀었는데도 미동조차 없다니……"

    고심하는 아삼을 바라보던 팽명민이 품에 있던 명패를 꺼내면서 그에거 건네줬다.

    "이걸 받거라. 나중에 힘든 일이 있다면 그 명패를 가지고 팽가를 찾아 오거라. 별다른 일이 없다면 어려운 일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단 그 명패를 가지는 대신에 네가 이인학을 아니, 팽인학을 도와야 할 것이다. 인학을 돕고 팽가에 득이 되는 행동을 보인다면 우리 팽가도 너를 져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너와 네 가족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마."

    "……."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아삼은 그제야 자신을 부른 의중을 깨닫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바뀔 수 없는 운명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얻어내고 나중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팽명민이 돕는다고 하니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은 없었다. 어떻게 보면 호의를 가지고 대하는 팽명민의 모습이 좋게 느껴지는 그였다.

    "너는 황궁으로 이동하기 따로 이틀 전에 다른 곳으로 갈 것이다. ……너와 팽가는 아무런 연관도 없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은 한낱 꿈이었을 뿐이다. 먼 친척되는 사람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여태껏 병석에 있다가 환관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알아듣겠느냐?"

    이전과는 다르게 차갑게 변한 팽명민의 태도에 고개를 조아리면서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하는 아삼이었다. 자신과의 교착점을 없애는 팽가의 태도가 의아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자신은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되었다. 이만 나가 보거라."

    아삼이 다시 한 번 팽명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돌아서 나가는 아삼을 바라보던 팽명민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렵구나. 어려워. 조금만 틈을 보였다면 저 아이가 내 동생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워하던 팽명민이 다시 한 번 허공을 바라보면서 예의 그 복면인을 불렀다.

    "거기 있느냐?"

    팽명민의 부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사내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면서 그의 명을 기다렸다.

    "가서 이인학을 데려 오너라."

    잠시 후, 방으로 들어선 이인학이 팽명민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래 황궁에 들어갈 채비는 잘 하고 있느냐?"

    "예. 잘 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소가주께 감사드립니다."

    이인학이 팽명민을 향해서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런 이인학의 모습을 보고 딱딱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팽명민이었지만 품에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낸 후, 그것을 이인학에게 내밀었다.

    "소공단이다. 내공의 증진을 도와주는 팽가만의 비전이다. 황제의 명으로 내공심법을 가르치진 못했지만 황궁으로 들어가게 되면 아마도 심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 소공단이 네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소가주님."

    이인학이 공손히 단약을 받아들면서 소중하게 품에 갈무리했다.

    팽가의 양자가 됐다고 공포했을 때만 해도 그저 복수의 첫발을 내딛었다는 기쁜 마음뿐이었는데, 이렇게 자신을 챙겨 주는 것을 보니 진정 팽가의 아들이 된 것 같다는 생각에 괜히 뿌듯해지는 것 같았다. 어느새 이인학의 얼굴에 거만한 미소가 흘렀고 그 미소를 놓치지 않고 바라보던 팽명민의 얼굴은 못 마땅한 듯이 찌푸려졌다.

    "이제 너도 엄연한 우리 팽가의 사람이다. 허니 우리 가문의 명성에 누가 될 일은 발도 들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말을 똑똑히 기억해내야 할 것이야."

    기세를 뿜어내는 팽명민의 딱딱한 말투에 급히 웃음을 감춘 이인학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 모습을 본 팽명민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을 내뱉었다.

    "팽가를 위해서 힘쓴다면 우리 팽가도 너를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황궁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 단약은 몇 차례 더 지급될 것이다. 정진해서 힘이 되거라."

    "뼛속 깊이 새기겠습니다."

    깊이 읍을 하던 이인학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제야 자신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첫 단추를 잘 끼웠으니 이대로만 흘러만 간다면 마지막 단추도 수월하게 끼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10살 남짓 사내아이의 몸에 깃들어 있는 아삼의 정신연령은 37살이었다. 그리고 서른일곱 해를 살아오면서 가슴 깊이 새긴 것들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람을 쉽게 믿지 말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삶은 혼자서 헤쳐나가는 것이었다. 이명철의 삶에서도 그랬고 앞으로 아삼의 삶도 그럴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팽가를 상징하는 명패를 건네받았으나 그만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위험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황궁이라는 위험천만한 곳에서 팽가라는 거대한 세가와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세력들의 틈에 끼일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지는 고민을 해봐야 할 사안이었다.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삼의 고개가 돌아갔다. 언제 왔는지 팽설연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저 아이를 만나 것이 바로 이 정원이었다. 혹여 그때처럼 귀찮은 일에 엮일 것 같다는 생각에 자리를 뜨려던 아삼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붙잡는 고사리 같은 손에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환관의 신분으로 황궁으로 들어간다면서?"

    어린 여아의 말에 아삼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수련에서는 너한테 졌……지만 다음에 만났을 때는 꼭 네놈을 이겨보일 거야. 그때까지 다치지 말고 몸 성히 버텨. 다시 볼 때면 네놈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줄 테니까!"

    뜬금없는 팽설연의 말에 당황한 아삼이 멍하니 어린 여아를 바라봤다.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삼의 눈빛에 어린 여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가슴이 콩닥콩닥 빨리 뛰는 것을 느낀 팽설연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붉어진 얼굴과 빠르게 뛰는 심장에 그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급히 자리를 뜨는 팽설연이었다. 멀어지는 그 아이를 보던 아삼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린 아이의 행동이 귀여우면서도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급히 자리를 벗어나는 팽설연은 갑자기 변해버린 자신의 감정에 당황스러워 했다. 자신을 무시한 꼬마 놈에게 각오하라는 말을 남기려고 했었지만 되려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본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과묵한 아삼의 얼굴을 떠올린 팽설연은 고개를 흔들면서 급히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며칠 후, 여러 대의 가마와 마차가 자금성의 오문으로 들어섰다.

    덜컹거리는 마차 바퀴 소리만 들릴 뿐 사방이 천으로 드리워진 마차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어디로 가고있는지도 알지 못했지만 이전의 말들을 추측해보면 아마도 마지막으로 향하는 곳은 황제가 있다던 자금성이라는 곳이 분명했다.

    멈춰선 마차와 함께 근처로 다가온 환관복의 한 사내가 내려선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는 나를 따르거라."

    앞장 선 사내의 뒤를 이인학과 아삼 그리고 또래의 여러 아이들이 조용히 따라갔다.

    "여기에서 기다리거라."

    사내가 이인학과 아삼 그리고 다른 아이들의 처소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곳에는 자신들 또래의 다른 아이들이 두 눈을 반짝이면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치를 살피던 아삼이 그들의 곁에 앉자 이인학과 다른 아이들도 그를 따라 앉으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 아삼의 옆에 앉아있던 이인학이 조용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귓속말을 건냈다.

    "이제부터 너는 내 말을 잘 따라야 해. 너도 알다시피 너는 나를 도와주라는 명을 받았으니까."

    자신을 내려보는 듯한 이인학의 눈빛에 기분이 상한 아삼이었다. 그런 이인학을 무시한 아삼이 방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가구 하나 없는 방에는 딱히 눈길을 끌만한 것이 없었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만 가득 들어차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대꾸도 없이 주변을 둘러보는 아삼의 행동에 이인학의 얼굴이 굳어졌다. 머리라도 끄덕이면서 미동이라도 보여야 할 아이가 철저하게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아삼을 노려보는 이인학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감히 팽가의 양자인 나를 무시해? 아삼 네 놈이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두고 보마. 분명히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천한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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