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9화 (9/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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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쟁

    가주전을 빠져나온 세 아이들은 밖에 대기하고 있던 무인들을 따라서 각기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모두가 자신들이 필요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서 옮겨졌는데 이인학의 경우에는 무(武)를, 황세웅의 경우에는 문(文)을 배우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아삼은 천자문부터 배워야만 했다.

    기본적인 한자도 제대로 모르는 그였다. 까막눈이라고 할 수 있을 테지만 이전의 생에서 간간이 눈대중으로 익힌 몇 자를 제외하고는 까만 것은 글씨고 하얀 것은 종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아삼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내심 무공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지만 글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없던 그였기에 배움의 기회가 주어진 것 자체로도 고맙게 생각했다.

    처음 천자문을 접한 아삼은 그 글의 음과 뜻보다도 이 글이 생기게 된 배경과 모양이 왜 이러하게 됐는지 그 숨은 뜻이 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머리가 아파져왔다.

    한자의 형성 과정을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눠서 육서(六書)라고 불렸다는 것을 이전 세상에서 배웠었기 때문이었다. 상형, 지사, 회의, 형성, 전주, 가차 등을 대충 넘겼던 그였기에  그딴 것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긋해 보이는 연세의 노인은 전형적인 문사차림의 모습이었다. 꼬장꼬장해 보이는 인상의 노인이 한 획, 한 획 그어가면서 설명을 하면, 하품을 참아가면서 경청하던 아삼이었다.

    '이건 너무한데? 좀 더 빨리 배울 수는 없을까?'

    말을 할 수 없는 그로서는 노인을 채근할 방법이 없었다. 그가 채근한다고 해도 이 노인이 그 말을 들어줄 지도 의문이었다. 빨리 이 노인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은 아삼은 자는 시간까지 쪼개가면서 가지고 있는 책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전생의 경험이 도움이 됐는지 꽤 빠른 시간에 천자문을 익힌 아삼이었다. 대입을 위해서 노력했던 부분이 큰 도움이 되었다. 수월하게 익힌 천자문과 함께 그 이상의 글들도 배우게 되었는데 아삼을 가르치던 노인의 놀람은 커져만 갔다. 지금 가르치고 있는 아이가 생각보다 잘 따라오는, 아니 자신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오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새로운 혼이 들어오면서 정신적으로 많이 성숙해진 아삼이었다. 비록 말을 할 수 없어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10살이 가지고 있을 만한 집중력이 아니었고 생각하는 것도 그 이상이었다.

    아직까지 낯선 환경에 잘 적응을 하지 못해서 말도 안 되는 행동도 내보였지만 그런 것들은 차차 바뀌게 될 것이었다.

    "네 오성이 뛰어남은 잘 알겠다. 허나, 이런 악필은 내 어언 칠십 평생에 처음 보는구나."

    "……."

    "지금부터 하루에 한 시진씩 필체를 다듬을 수 있도록 정진 하거라."

    "……."

    "알아들었느냐? 왜 대꾸가 없는…… 크흠. 되었다. 그만 나가 보거라. 기본적인 한자는 떼었으니 같은 시간에 찾아와서 필체만 확인하면 되겠구나."

    노인의 말을 들은 아삼은 길게 읍을 하고 물러났다. 한참을 걸릴 것 같던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자 그 때 부터는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매일 천자문을 되뇌이면서 한 시진씩 바닥에 한자를 써내려갔고 그런 시간이 늘어갈 수록 악필이었던 필체가 조금씩 고쳐져 갔다. 행여라도 알아먹지 못할 필체가 나온다면 예의 그 노인의 꾸중을 감내해야만 했기 때문에 더욱 악착같이 매달리는 아삼이었다.

    "모든 무공이 그렇듯이 처음의 기초가 가장 중요하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체력이다. 체력."

    "……."

    "지금부터 연무장 주변을 돌아라 계속해서 돌다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체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속 도는 겁니까?"

    "그래 쓰러질 때까지 돌아 보거라. 나는 여기서 지켜보고 있으마."

    교두로 붙여준 무인의 말에 쭈뼛대던 세 아이들은 연무장 주변을 뛰기 시작했다. 거대한 세가인 팽가의 명성만큼 넓다란 연무장은 성인이 된 자들도 한 바퀴를 돌면 숨이 가빠 올 정도로 넓었다. 하물며 이제 10살을 넘긴 아이들이 뛰기에는 더욱 벅차보였다.

    이를 악 물면서 뛰었지만 가장 먼저 뒤로 쳐지는 사람은 이인학이었다. 그 뒤로 아삼의 몸도 조금씩 지쳐갔고 그나마 셋 중에서 가장 쌩쌩한 놈이 바로 황세웅이었다.

    한 식경이 지날 때 까지 계속 뛰고 있는 사람은 이내 둘로 줄어있었다. 연무장에는 '헉헉'대면서 가뿐 숨을 몰아쉬는 소리만 들려왔고 비틀거리면서도 포기하지 않던 아삼이 황세웅의 뒤를 걷듯이 쫓아가고 있었다.

    분명히 뛰는 모습이었지만 빠르게 걷는 것 보다 속도가 더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생각보다 끈기가 있는 놈이군. 비슷해 보이는 이인학이라는 놈보다 정신력이 더 강한 건가?'

    비틀대면서 걷고 있는 아삼은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등만 쫓았다. 황세웅도 많이 지쳤는지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고 덜덜 떨리는 다리를 이끄는 아삼은 결국 황세웅을 따라잡았다.

    "허억. 허억. 독한 자식!"

    자신을 스쳐서 걷고 있는 아삼의 모습에 혀를 내두른 황세웅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멈춰서면서 그대로 숨을 골랐다. 가슴이 찢어질 듯이 부풀어 올랐고 어느새 다리에도 감각이 없었다.

    계속해서 뛰던 아삼은 자신의 행동에 의문을 가졌다.

    '무엇 때문에? 나는 왜 뛰고 있는 거지?'

    처음에는 이인학이라는 재수 없는 낯짝이 싫었다. 너만은 이겨주리라고 마음을 먹고 계속 달리다보니 어느새 떨어져나간 이인학을 볼 수 있었고 멈춰선 황세웅을 지나쳐나갔다. 그리고 그 의문이 들기가 무섭게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와 찢어질 듯한 폐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는 그대로 주저앉으면서 숨을 고르려고 했다. 힘든 몸과 함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이 그를 괴롭혔다.

    '나는 왜 그렇게 악착같이 뛰었던 거지?'

    스스로 의문을 던졌지만 찾을 수는 없었다. 이전 생에 대한 아쉬움의 표출인지 그저 어린 아이들에 대한 경쟁의식인지 스스로도 답을 찾을 수 없던 상황에서 그렇게 정신은 흐릿해져갔다.

    다시 정신을 차리자 온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특히 경련을 일으키는 다리와 함께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깨어났구나. 독한 녀석."

    "어어어."

    "어떻게 된 거냐고? 네가 나까지 젖히고 나서 쓰러졌잖아. 아무튼 넌 참 신기한 놈인 것 같아. 깨어났으니 이만 가봐야겠다. 금일 남은 일정은 모두 없어졌어. 명일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하니까 몸조리 잘해라. 가자 얼음땡이."

    "누가 얼음땡이야! 흥. 이런 사소한 걸로 나를 이겼다고 착각하지 마!"

    자신을 호적수로 여기면서 나가는 이인학의 모습에 어이없어하는 아삼이었지만 아직 애라고 생각하고 그러려니 했다. 지금은 이인학의 질투보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이유가 먼저였다.

    '내가 그렇게 승부욕이 강했던 놈이었나? 아니면 이 몸의 주인이 원래 그런 성격인가?'

    한참을 고민하면서 답을 찾으려고 할 때,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왔다. 하얀색 백삼을 입은 중년인이었는데 손에 든 물건을 꺼내자 그자가 의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흐음. 어디 한번 보자. 꽤나 무리를 한 모양이구나? 들었던 것보다 더 심각한 것 같은데…… 일단 이 환약을 집어서 삼키거라. 그리고 침을 좀 놔야겠구나."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들이미는 환약을 얼떨결에 삼키는 아삼은 갑자기 이불을 걷어내는 의원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기다란 장침을 꺼내들면서 퉁퉁 부어오른 다리에 침을 놓던 의원이 아삼의 얼굴을 보면서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귀한 아이는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공을 들이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군."

    "……."

    "소공자에게 고마워해라. 너를 꽤 챙기는 것 같으니."

    '소공자라고? 전에 가주전에서 봤던?'

    의원이 아삼에게 온 이유는 팽명민의 요청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주시하고 있었던 아삼이었고 가장 마음을 얻기 힘들 거라던 아버지의 말에 더욱 호기심이 동하던 아이였다. 특히 황세웅을 이기면서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소리에 기특한 마음이 들었던 그가 의원을 보내온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소공자는 아삼이라는 아이에 대해서 아삼은 자신을 위해준 소공자라는 사내에 대해서.

    "너도 그 아이들과 함께 소양을 쌓고 싶다고?"

    "네. 소녀도 마냥 어리광만 피울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하옵니다."

    "허허허. 지금 네 행동은 어리광이 아니고 뭐라더냐?"

    "소녀도 이제 한 사람의 몫을 하고 싶사옵니다. 저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도 하는 일들은 저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옵니다."

    "…… 드디어 우리 연이가 철이 드는 것이냐? 힘든 수련을 마다하던 아이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구나."

    "치이. 아버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소녀의 가슴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것 같사옵니다."

    이전부터 무언가를 부탁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아양을 떨었던 딸아이였다. 일부러 어른스러워하는 말투에 미소를 짓던 팽문호는 딸아이의 의중을 되물었다. 아직까지 팽설연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그였다. 단지 아삼이라는 아이와 한 번 부딪쳤다는 사실과 팽명민의 중재가 있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 달라진 네 말투에 이 애비가 뭐라고 말이 안 나오는 구나. 갑자기 왜 이러느냐?"

    "소녀도…… 저도 그 아이들이랑 같이 수련을 받게 해주세요."

    "네가 그런 기초적인 수련을 받을 수 있겠느냐? 이미 따로 받고 있는 것들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그것도 힘들다고 하면서 그 아이들이 받는 것들을 함께하면 금새 지쳐서 울고불고 난리가 날 것이 뻔한데!"

    "아니라구요. 이번에는 기필코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까. 저도 그 아이들이랑 수련을 받을 수 있게 해주세요."

    "흐음. 생각해 보자꾸나."

    "아잉. 아버지. 이렇게 연이가 부탁하잖아요."

    "허허허. 원 녀석도. 그게 무슨 재밌는 일이라고."

    "허락해 주시는 거죠? 그렇죠?"

    "좋다. 한번 같이 해 보거라. 대신에 힘들다고 그 아이들에게 방해가 되면 아니 될 것이야."

    "당연하지요. 감사하옵니다. 그럼 소녀는 이만 물러가보겠사옵니다."

    "허허허. 별 일이 다 있구나."

    팽문호의 웃음을 들으면서 가주전을 나오는 팽설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드디어 그놈과 함께 할 수 있는 거야. 두고 봐! 꼭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 감히 대 팽가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인 나를 무시해? 천한 놈이!'

    아삼을 떠올리면서 아미를 찌푸린 팽설연은 각오를 다졌다. 지난 날 당했던 수모를 되갚아주기 위해서 일부러 그놈이 있는 곳을 찾아가려던 그녀였다.

    어린 여아의 눈에 독기가 흘러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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