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8화 (8/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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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북팽가

    몸을 회복하고 어느 정도 거동이 가능해지자 새로운 한 명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황세웅이라던 아이의 소개로 자신과 비슷한 덩치를 가진 아이를 볼 수 있었는데 차가운 그 태도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아삼이었다.

    표정을 드러내지 않던 아삼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보고 아무런 말도 없이 아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아이는 '짝'하는 소리와 함께 손을 쳐내면서 고개를 돌렸다.

    '어린놈이 성질이 보통이 아니네.'

    생각보다 버릇이 없는 아이의 행동에 씁쓸해하던 아삼에게 옆에 있던 황세웅이 어깨동무를 해오면서 그를 달랬다.

    "하하하. 너무 신경쓰지마. 얼음땡이 저놈이 성격은 더러워도 우리와 같은 처지니까. 스스로 자궁을 결정했다는데…… 참 독한 놈 같지만. 그래도 같은 처지잖아. 서로 도우면서 사는 거지. 하하하."

    "……."

    "크흠. 저놈 이름이…… 이인학이었던가? 11살이니까 너랑은 어떻게 되나? 네 나이가 어떻게 되지?"

    황세웅의 대답에 손가락을 쫙 펴면서 10을 만들던 아삼은 세 번 앞으로 내밀고 다시 손가락을 접으면서 일곱을 만들려고 했지만 그 사이에 열이라는 것만 보던 황세웅은 그의 행동을 막으면서 웃어보였다.

    "그럼. 네가 가장 막내구나? 열 살이라. 하하하. 잘 지내보자구. 막내야."

    당황해하던 아삼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황세웅이었다. 그의 태도에 황당함을 느낀 아삼이었지만 이미 들어간 그를 다시 불러세울 수도 없었다. 어차피 말은 할 수 없었고 지금 보여 지는 겉모습은 10살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의사소통이 불편하구나. 글을 먼저 배워야 할까? 글을 배울 수는 있을까?'

    아삼과 이인학이라는 아이는 비슷한 시기에 움직일 수 있었다. 팽설연의 구타와 거세하는 과정에서 몸을 정양해야만 했던 둘이었다. 덩치도 상대적으로 왜소했던 둘은 비슷한 시기에 일어설 수 있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팽가는 남은 세 명을 불러들였다.

    내원의 심처에 위치한 전각은 그 화려한 위용을 자랑했다.

    지금 오대세가에서도 상석을 차지하고 있는 팽가였고 그만큼의 위세는 건물에서 잘 드러나 있었다.

    고풍스러운 건물과 함께 그 화려함에 압도된 두 아이들은 굳은 채로 가주전을 들어섰다. 하지만 아삼의 얼굴에는 긴장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평소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그는 그냥 화려한 외관에 조금 놀랐을 뿐이었다.

    서울에 살면서 이런 건물보다 훨씬 크고 높은 건물을 접했던 그인지라 그저 옛 건물에서 보이는 고풍스러움만 느끼는 그였다. 화려함도 엿보였다고 하지만 이미 여러 매체들을 통해서 그러한 것들을 접했던 그였기에 짧은 감탄으로만 끝난 것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세 사람이 그들을 맞이했다.

    가주전의 주인인 팽가의 가주 팽문호와 그의 아들인 팽명민이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고, 남은 한 사람은 아삼이 들어왔을 때, 한 번 만났던 총관이었다.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 중에서 저 세 아이만 남았다는 것이냐?"

    "예. 그중에서 한 아이는 자진해서 자궁을 택했고, 남은 두 아이는 올 때부터, 거세가 되어진 상태였습니다."

    "자진을 했다?"

    "가운데에 있는 아이입니다. 이인학이라고 11세 되는 아이로 그 조부되는 사람이 바로 유명한……"

    "됐다. 나머지는 내가 하문해 볼 터이니, 너는 나가서 볼 일을 보거라."

    "허나 형님! 크흠. 가주께서는 자세한……"

    "이미 다 알고 있다. 문성이 너는 그만 나가서 일을 보거라."

    "예. 알겠습니다."

    총관이라는 자가 가주전을 나가자 적막함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말을 꺼내는 사람도 없었고 팽문호와 그의 아들은 앞에 있는 세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인학과 황세웅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굳은 채로 서있었고, 아삼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가주전의 내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돌한 그의 행동에 당황한 것은 팽명민이었다. 아무리 무지한 아이라고 하지만 저렇게 분위기를 못 읽는 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물며 지금 있는 곳은 다름아닌 가주전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나서려고 할 때, 뒤에서 아삼을 바라보던 팽문호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로 보건데 전혀 긴장하지 않는 태도였다. 그도 자신의 아들과 마찬가지로 의아하게 여겼지만 긴장하지 않는 그 모습은 사뭇 신선하게 다가왔다.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건가? 재밌는 아이로군. 눈치가 없거나.'

    나서려는 아들을 막아선 그는 미소를 지우면서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얼핏 미소를 발견한 팽명민은 놀란 표정으로 아삼을 보다가 자리에 앉았고 계속해서 조용할 것 같던 가주전에 팽문호의 중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희 세 명이 가주전으로 불려온 이유를 알고 있더냐?"

    "……."

    "나는 너희들 중에서 한 명을 양자로 들일 생각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팽가라는 성을 물려받고 황궁으로 보내질 것이다."

    이제서야 스스로가 팽가로 들어오게 된 이유를 알게 된 아삼이었다. 옆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두 아이를 보니 그들도 처음 듣는 모양이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떨리는 듯한 두 아이의 몸에 씁쓸하게 웃던 그는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을 했다.

    "양자가 되지 못한 두 아이들도 그냥 내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팽가에서 품을 것이니 그렇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무턱대고 너희들을 받아들일 수 는 없을 터이니 지금부터 팽가의 성을 물려받을 만한 소양을 쌓아야겠다."

    팽문호의 말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이인학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면서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에 팽문호가 손을 들어 올리면서 말을 하라는 손짓을 하자 그제서야 입을 떼는 이인학이었다.

    "허면 어떤 소양을 쌓는 것이옵니까? 무공을 배우는 것이옵니까?"

    "기본적인 무공과 함께 문도 익힐 것이다. 배웠던 모든 것을 종합해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한 명을 양자로 들일 것이야. 비록 말만 양자지만 베풀 수 있는 모든 것을 베풀 생각이다. 대외적으로 팽가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정진해야 할 것이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이만 물러가 보거라. 밖을 나서면 그 때 부터 너희들을 이끌어줄 사람들이 있을 터. 각자 상황에 맞는 것들을 익히면 되는 것이다."

    "물러가겠습니다."

    앉아있는 팽문호를 향해 읍을 하고 밖으로 나서는 세 사람이었다. 뒤에서 눈치를 보면서 뒤늦게 그들을 뒤따르는 아삼이었고 그런 아삼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팽문호였다.

    "재미있는 놈이구나."

    "어떤 아이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흐음. 명민이 너는 저 아이들 중에서 누가 네 동생으로 어울릴 것 같더냐."

    "소자는…… 잘 모르겠습니다."

    "가주전을 나가게 되면, 네가 저 아이들을 관리해 보거라."

    "소자가 말이옵니까?"

    "너도 언젠가는 가문의 일들을 처리할 때가 올게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지.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우선 저 세 명의 아이들을 네가 품어보도록 하거라.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많을 게다. 너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게야."

    "저 아이들을 제 사람으로 만들라는 말씀이십니까?"

    "허허허. 그럴 수도 있겠구나. 헌데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게다."

    "……."

    "우선, 이인학이라는 아이는 전각대학사(殿閣大學士)를 지냈던 이인후 대감의 손이다. 황제폐하께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인후 대감이었지만 그 대쪽 같은 성격이 문제였지. 다행히 참수는 면했지만 변방으로 귀양을 갔고, 꼬장꼬장했던 성격으로 폐하뿐만 아니라 궁에는 다른 적들도 많았지."

    "허면 그 아이는……"

    "적대적인 자들에 의해서 가문이 갈가리 찢겨졌다. 그리고 그 아이는 그 복수를 하기 위해서 이곳까지 와서 자궁을 택한 거겠지."

    "……."

    "황세웅이라는 아이는 본래 황보세웅이다."

    "황보세웅? 황보가의 사람이란 말입니까?"

    "천출이다. 황보가의 핏줄을 타고나서 골격이 장대하지만 어미가 천한 기생출신이다. 그 치부를 덮기 위해서 황보가가 나선 것 같구나. 차마 핏줄을 이어받은 아이를 내칠 수는 없었지만 그 안주인 때문에 들일 수도 없었지. 안주인이 당가 사람이니 그 성정이 오죽 하겠느냐?"

    "허면 남성을 잃었다는 이유가?"

    "안주인의 짓이지. 그래서 그 아이도 복수 때문에 우리 가문으로 들어온 것 같구나."

    "평범한 내력을 가진 아이들이 없군요."

    팽문호의 말을 듣던 명민은 침음을 삼켰다. 생각보다 기구한 삶을 살아오던 아이들이었다. 그만큼 자신이 보듬어야 할 부분이 늘었고 큰 부담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저런 사연을 가진 아이들인 만큼 네게 귀중한 경험으로 돌아올 것이야."

    "하오나 아버님! 아삼이라는 아이는 어떻습니까? 조금 전에 그 아이의 행동을 보시고……"

    "흐음. 꽤나 흥미로운 아이더구나."

    "흥미라 하심은."

    "대 팽가의 가주전이다. 그곳에 들어서서 가장 여유로운 아이였다. 셋 중에서 가장 평범한 아이인데 가주전에 들어서서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신기하지 않느냐? 팽가의 가주전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중압감과 설사 그것을 모르더라도 당최 화려하질 않더냐? 그것을 이겨내는 촌아이라…… 신기했을 뿐이다. 아마도 네가 가장 마음을 얻기 힘든 아이가 그 아삼이라는 아이일 듯 싶구나."

    "……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촌아이가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느냐? 허허허. 일단 부딪쳐보면 될 일이다. 이제 그만 나가 보거라."

    "…… 예."

    팽문호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말을 건네실 분이 아니었다. 특히 팽가라는 거대한 가문과 황실에서 아무런 변고 없이 줄타기를 해오던 아버지였기 때문에 그 말이 가지는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팽명민이었다.

    '아삼이라…… 그 아이의 마음을 얻기가 가장 힘들 거라고?'

    당돌하던 그 모습을 떠올리던 팽명민의 얼굴에 굳은 각오가 서렸다. 반드시 세 아이를 얻겠다고 다짐하던 그가 그렇게 가주전을 벗어났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팽문호는 쓰게 웃었다.

    황제의 명으로 시작해서 아이들을 모은 그였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득이 된 사람은 자신일 지도 몰랐다. 소가주인 아들을 더 크게 이끌어줄 경험과 함께 가문을 지켜낼 숨겨진 패가 손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저 남은 세 아이들이 어떤 마음을 품을지는 온전히 그의 아들의 몫이었고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았던 지난날의 모습처럼 기대에 부응하리라고 굳게 믿는 그였다.

    '황실에서도 무림에서도 우리 가문은 그 위세를 이어나갈 수 있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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