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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62화 (62/121)
  • 62화. 붉은 벽돌성의 새벽 (13)

    쨍그랑!

    갑작스러운 소리에 나와 밀리엄이 동시에 고개를 휙 돌렸다.

    찻주전자와 찻잔들이 든 쟁반을 바닥에 떨어트린 채 새하얗게 질려 있는 프랭크 딜린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두 분 거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그는 멋대로 집을 뒤졌다는 사실에 분노한 집주인이라기보다 살인현장을 들킨 범인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나는 가여울 정도로 파들파들 떨고 있는 프랭크를 한 번, 그리고 프랭크가 나타난 뒤에도 커튼을 잡아 들고 있는 손을 내리지 않는 밀리엄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이 상황을 어떻게 끌고 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기실 고민이라고 해볼 것도 없이 답이 정해진 문제이기는 했다.

    못 본 척하기엔 늦어도 한참 늦어버렸으니, 여기서는 아예 이게 대체 뭐냐고 고자세로 추궁하고 나서야 맞는 처사겠지.

    그러나 퀴니 딜린저의 일을 전해 듣고 난 뒤인 까닭인지 좀체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누명을 쓰거나 모함을 당하는 것은 물론 작은 의심을 받는 일에조차 트라우마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아닌가?

    이 순간의 프랭크는 정말이지 가까스로 희미하게 화난 집주인의 시늉을 하고 있을 뿐, 나나 밀리엄이 이 장소의 존재이유에 대해 운을 떼기라도 하면 그대로 까무러칠 것 같은 상태였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번민하는 사이, 냉정하다면 냉정하게도 밀리엄이 결국 말을 꺼냈다.

    “글쎄요. 지금은 우리가 무얼 하는지보다, 무엇을 발견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시점인 것 같군요. 딜린저 씨. 이 벽은 대체 뭡니까?”

    “그, 그건…….”

    “왕립수사국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모양인데요. 비단 누님분의 사건뿐만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할까. 훨씬 더 전반적인 관점에서 말입니다.”

    밀리엄은 커튼을 잡고 있지 않은 손을 뻗어, 벽에 핀으로 고정된 신문조각 하나를 툭 뜯어냈다.

    꽂혀 있던 위치나 종이의 빛이 바랜 정도로 보아 가장 최근에 꽂아두었던 것으로 보이는 조각이었다.

    나는 프랭크의 떨리는 시선이 종이 위의 기사에 닿는 것을 확인한 뒤 덩달아 기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캠벨 남작 일가의 사망사건 수사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음을 건조한 논조로 알리는 플레밍턴 타임즈의 기사였다.

    작성한 기자는 오늘 신랄한 비판 기사로 왕립수사국과 소속 수사관들에게 가차 없는 팩트 폭력을 선사했던 앤서니 롭.

    상단에는 마찬가지로 ‘친애하는 딜린저 씨에게’라는 번진 글귀가 적혀 있었다.

    밀리엄이 들이민 기사를 한참 동안 불안한 눈빛으로 응시하던 프랭크가 깊은 한숨과 함께 천천히 마른세수를 하더니, 별안간 이쪽으로 한 발 다가왔다.

    표현하기에 따라서는 거한이라고 수식해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는 체구의 소유자가 급작스럽게 내디딘 걸음에 지레 위기감을 느낀 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한 발 멀어진 나를 보고 조금 억울한 낯을 한 프랭크 딜린저는 이내 일체의 흔들림 없이 본래의 자리에 서 있는 밀리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괜한 죄책감을 느끼며 그가 밀리엄에게 꺼낼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기사들은 제가 모은 게 아닙니다. 정말로요. 전부 익명의 발신인에게서 받은 것들이에요. 물론 기사를 접할수록 화가 치밀어서, 차마 버리지 못하고 벽에 꽂아둘 수밖에 없었지만 정말 그뿐입니다. 이런 말이 통할 상황이 아니란 건 압니다. 그래도 제발 믿어주세요. 절 믿어주실 분은 켄트우드 수사관님밖에…….”

    “저는 증거가 말해주는 퀴니 딜린저 양의 결백을 믿은 겁니다. 돌아가신 분의 억울함을 딜린저 씨의 방패로 삼으려 하지 마세요. 단지 누님분께 일어난 일이 부당했다는 이유로 이런 상황에, 증거조차 없이 딜린저 씨를 믿어드릴 수는 없습니다.”

    밀리엄은 구구절절 틀리지 않은 말로 프랭크 딜린저를 몰아붙였다.

    나는 그가 누나의 억울함을 방패로 이용하려 하고 있다는 대목에서부터 급격하게 가빠지기 시작한 프랭크의 숨소리와 그 사색이 된 얼굴을 괜스레 손에 땀까지 쥐어가며 지켜보았다.

    곁에 선 밀리엄이 무어라 더 말하려는 듯한 기색을 보인 것은 그때였다. 나는 급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곤 '베로니카?’하고 물어오는 밀리엄의 팔을 두드리며 어색하게 웃어 보인 뒤, 프랭크를 향해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 딜린저 씨. 방금 전에 익명의 발신인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서 계속 편지를 받아오셨단 건가요?”

    “예, 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수사국에서 발표한 결론이 미심쩍은 사건들의 기사를 계속해서 보내왔어요. 누나나 저와 비슷하게 억울한 일을 겪은 사람들이 더 있다고 위로해주려는 것처럼… 아, 아니. 이게 아니라 제 말은….”

    “나쁜 건 누님분이나 딜린저 씨가 아니라 부패한 수사관들이라고 말해주려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말씀이죠?”

    “네! 바로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선지 수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저렇게….”

    프랭크 딜린저는 날카롭게 그를 몰아붙인 밀리엄 대신 내게서 이 상황을 타계할 어떤 희망을 느낀 듯 열과 성을 다해 내 질문에 답변해주었고, 나는 그가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최대한 조심해서 대화를 이어갔다.

    딱히 여기는 나에게 맡기라는 말을 할 만큼 자신감에 차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대화를 밀리엄에게 일임하면 어째 가까운 미래에 멀쩡한 사람이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장면을 보게 될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럼 딜린저 씨, 혹시 그 사람에 대한 단서 같은 건 없을까요?”

    내 물음에 프랭크가 ‘어…….’하고 말을 더듬으며 덜덜 다리를 떨었다.

    보아하니 내 질문에 쓸 만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면 다시 밀리엄의 추궁을 듣게 되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는가 싶던 프랭크는 이내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한 듯 암담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모, 모르겠습니다. 플레밍턴 타임즈의 기사만 보내주기에 그곳 관계자가 아닌가 생각하긴 했습니다만….”

    “신문은 꼭 관계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살 수 있잖아요.”

    “신문배달부보다도 빠르게 그날 신문을 잘라 보내줘서요. 무, 물론 그냥 그렇게 추측을 해본 거라 단서라기엔.”

    “아니, 아니에요. 대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딜린저 씨.”

    나는 끝까지 친절한 미소를 유지하며 감사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다시 밀리엄에게로 시선을 올려 눈을 가늘게 뜬 채 미약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장 다시 프랭크 딜린저를 추궁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밀리엄은 이제 그것이 프랭크를 대하기에 썩 효과적인 방법이 아님을 인정한 모양인지, 이내 생각에 잠긴 듯 눈길을 아래로 내렸다.

    당일 신문의 특정기사를 잘라 손글씨까지 써서 보내면서 신문배달부보다 빨리 도착하게 했다면 확실히 인쇄본을 일찍 받아보는 인물 중 하나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우체국에 맡기는 대신 본인이 직접 집 앞에 놓아두고 갔으리란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랭크 딜린저에게 기사들을 보내온 이는 대체 누구일까.

    필적이 말해주는 대로 플레밍턴 타임즈의 기자인 카일리 돌턴일까?

    프랭크가 범인일 가능성도 분명 있지만, 일단은 플레밍턴 타임즈에도 방문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

    이후 계속 입을 닫은 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싶던 밀리엄은 프랭크 딜린저에게 조만간 수사국에서 출두명령이 갈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나와 함께 그의 집을 나섰다.

    그는 끝까지 자신을 ‘수사관님’이라 부르는 프랭크의 말을 굳이 고쳐주거나, 자신이 수사관을 관뒀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러는 편이 프랭크의 협조를 얻는 데 더 효과적이리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프랭크 딜린저와의 만남을 마치고 귀가하기에 앞서 잠시 수사국으로 돌아온 우리가 마주한 것은, 어딘지 모르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수사관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밀리엄을 힐끔거리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바빴다.

    내용을 제대로 알 수는 없었지만 드문드문 멜리사의 이름이 들리는 듯했고,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어조에서 묘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다른 무엇보다, 그렇게 위화감이 풀풀 풍기는 광경을 앞에 두고 의아해하는 나와 밀리엄에게 다가온 이가 해리엇이 아니라는 점도 이상했다.

    프랭크 딜린저의 집에 다녀오는 동안 아까 발견한 서류들을 다시 확인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다던 해리엇 블레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를 않았다.

    대신 진작 그녀에게 우리를 떠맡겼을 터인 딜런 와이즈가 성큼성큼 걸어 나와 밀리엄의 앞에 섰다.

    그런 딜런 와이즈를 싸늘한 눈으로 말없이 내려다보던 밀리엄이 미간을 왈칵 찌푸리며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우리에게 설명할 것이 있는 상황인 것 같은데, 와이즈 수사관.”

    “있기야 하지. 이제 와서 이걸 설명이라고 말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공식적으로 수사에 협력해준 만큼.”

    “협력해주었다니 이상한 표현이군. 갑자기 나와 남작님을 수사에서 배제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오, 그럴 리가. 켄트우드.”

    나는 딜런 와이즈의 과장된 어조에 수사관들 사이 어디에선가 나지막한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을 잡아냈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수사관들의 분위기는 정말이지 묘하기 그지없었다.

    몇몇은 그럭저럭 안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몇몇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고개를 기울인 순간 딜런 와이즈의 싸늘한 목소리가 허공을 타고 이어졌다.

    “그렇지만 이 이상 협력해줄 필요가 없어진 것도 사실이야. 수사를 이만 종결하기로 했거든.”

    그간의 협력에 감사드립니다, 캠벨 남작님.

    곧장 이어진 나직한 인사는, 앞서 떨어진 폭탄에 묻혀 완전히 그 존재감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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