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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17화 (17/121)
  • 17화. 하얀 죽음의 가면 (5)

    쭉 읽어보니 세 번의 죽음 모두 조금 부자연스러운 감이 없지 않기는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조금’이고 내 상식은 여전히 의료사고를 외치고 있었지만, 여긴 상식이 아니라 작법이 통하는 세계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 내가 느낀 것은, 이곳이 추리 어드벤처 게임 안이라는 걸 감안했을 때 곧장 수상함으로 치환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의 부자연스러움이었다.

    그러니 밀리엄이 그리젤다 벤슨의 시신에서 뭔가 쓸 만한 단서를 찾아낸다면 정말 좋겠는데…….

    나는 수첩을 덮자마자 곧장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선 밀리엄을 올려다보며 내심 기대의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그는 무슨 일이냐는 듯, 반짝이는 금색 눈을 조금 크게 뜬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살짝 기울어지는 고개에 맞춰 단정한 밀빛 머리칼이 스르륵 흔들렸다.

    그 모습이 또 제법 보기 좋았던 터라, 나는 잠시간 넋을 놓고 밀리엄 켄트우드의 인게임 일러스트 같은 미모를 감상하다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내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은 탓인지 결국 밀리엄이 질문을 던져왔다.

    “내 얼굴에 뭔가 묻었나요?”

    잘생김이 묻었지. 잘생김이.

    그러나 사람이 셋이나 죽은 사건에 대해 생각하다 별안간 당신 미모 따위에 넋을 놓았다고 고백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밀리엄은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좀 궁금해서요.”

    “글쎄요. 상식적으로는 의료사고나, 정말로 우연히 발생한 비극이 절묘하게 겹쳤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면도가 잘 된 말끔한 턱 끝을 매만지며, 밀리엄이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헤이즈 씨는, 정말로 사건 냄새를 귀신같이 잘 맡는 사람이라.”

    “요컨대 헤이즈 씨의 육감을 믿는다는 거군요.”

    “‘뭔가 있다’고 판단한 계기가 있기는 할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내일 다시 와서 물어봐야겠지만요.”

    환자 면회가 가능한 시간이 지나버린 터라 오늘은 더 이상 패트릭 헤이즈를 만날 수가 없었다.

    내일은 면회가 시작되는 아침 일찍 와서 패트릭 헤이즈에게 이 이상의 정보를 얻어내는 한편으로, 병원 이곳저곳을 잘 뒤지고 다녀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이 정도면 되겠지.

    깔끔한 결론이라 여기면서도 나는 불현듯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병원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그게 대체 무엇인지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

    나와 밀리엄은 아침 일찍 다시 성 조나단 병원을 찾았다.

    병원 앞에서 만난 밀리엄은 어제 귀가하면서 토머스 벤슨 씨를 방문했으며, 오늘 오후에 그리젤다 벤슨 부인의 시신을 함께 확인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사건 자체의 윤곽이 여전히 모호한 것은 문제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일은 그럭저럭 순조롭게 풀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래서 외려 조금 불안해지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서 밀리엄과 함께 204호 병실을 찾아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 2층 병동 입구에 다다랐을 때, 나는 어제와 달리 병동이 어딘가 몹시 소란스럽고 어수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 의사들, 간호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리는 소리.

    심지어 어수선함의 중심에는 우리의 목적지인 204호 병실이 있었다.

    영문 모를 불길한 예감이 선득하니 뇌리를 스치는 가운데, 나와 밀리엄은 열린 문 앞에 몰린 인파를 헤치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히끅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나는 목 뒤가 순식간에 싸해지는 기분을 맛보며 병실 안을 살펴보았다.

    제일 안쪽 침대 앞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소년이 몹시 낯익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이?”

    밀리엄이 먼저 소년의 이름을 부르며 내 옆을 스쳐 침대 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잠시간 멍하니 서 있다가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다. 침대 앞에 다다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케, 켄트우드 씨. 탐정님이….”

    “헤이즈 씨에게 무슨…….”

    나는 눈물범벅이 된 조이에게 말을 꺼내던 밀리엄의 고개가 침대 쪽으로 뻣뻣하게 돌아가는 것을 한 발자국 뒤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다 나 또한 침대 위로 시선을 옮겼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침대 위에는 패트릭 헤이즈가 옆으로 누워있었다.

    눈을 뜨고 입을 반쯤 벌린 채, 그러나 그 어떤 미동도 없이.

    환자복 바깥으로 드러난 얼굴과 손이 유난히 창백하다는 것까지 인지한 순간, 눈앞에 시스템 문구가 떠올랐다.

    [ ‘패트릭 헤이즈의 시체’를 발견했다. ]

    주춤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다 나와 부딪친 밀리엄이 나를 향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조이의 울음소리가 배경음악처럼 울리는 와중이었다. 망연한 시선으로 나와 눈을 맞춘 밀리엄이 별안간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병실 밖을 향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경찰을 불러요, 당장!”

    ***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병실 앞 의자에 앉아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옆에서는 아직도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조이가 무릎을 끌어안고 훌쩍이고 있었다.

    패트릭 헤이즈가 죽었다.

    손에서 얼굴을 든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병실 안쪽을 쏘아보고 있는 밀리엄을 한 번, 그 옆에서 불만스럽게 팔짱을 낀 채 혀를 차고 있는 병원장 베네딕트 홀터스를 한 번 일별했다.

    경찰이 도착한 이후 밀리엄은 급히 달려온 베네딕트 홀터스와 한바탕 실랑이를 벌였다.

    중년의 병원장은 병원에서 환자가 죽었을 뿐인데 다짜고짜 경찰을 부르는 법이 어디 있냐며 노발대발했다.

    ‘패트릭 헤이즈 씨가 사실 아주 멀쩡하고 건강한 상태였다’는 담당의 수잔 로이드의 양심고백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아마도 한참을 더 옥신각신해야 했을 것이다.

    곧이어 도착한 경찰도 수잔 로이드의 이야기를 듣고는 이것이 수사가 필요한 사건임을 인정했다.

    거기에 패트릭이 최근 이 병원에서 일어난 세 차례의 의문사 사건을 조사 중이었다는 조이의 증언이 더해져, 경찰에서는 결국 사건을 왕립수사국에 이관하기로 결정했고….

    그 결과 지금은 병실을 봉쇄한 채 담당 수사관의 출동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뗀 나는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은 듯한 병원장과, 그의 뒷모습을 몇 발자국 뒤에서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수잔 로이드를 발견했다.

    갱단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불쌍한 사립탐정을 도와주려다 병원장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히게 생긴, 204호 담당의.

    길고 곧은 금발을 하나로 질끈 묶은 여자의 도회적인 얼굴에는, 난처함이란 단어를 현실에 구현해내면 딱 저런 느낌이겠다 싶을 정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것과 꼭 같은 종류의 그림자가 내 얼굴에도 언뜻 내려앉아 있으리라고 반쯤 확신했다.

    그렇게 다시금 사실과 마주했다. 패트릭 헤이즈가 죽었다.

    나는 조금 전에야, 어제가 빅터 호젠이 사망한 날로부터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사망자들 사이에 어떤 규칙성도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솔직히 어제 눈치챘다 한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실이었겠지만.

    그저 누가 또 죽을지 알 수 없어 찜찜하기만 할 뿐이었겠지만.

    그러니까 패트릭 헤이즈가 죽은 건 그냥 스토리상 정해진 전개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그걸 이제야 떠올렸다는 데서는 어쩔 수 없는 자괴감이 몰려들었다.

    자괴감이 드는 한편으로, 내 예상이 보기 좋게 어긋나버렸다는 낭패감도 함께 찾아들었다.

    나는 사립탐정 패트릭 헤이즈가 제법 오래, 혹은 자주 나오게 될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이 병원에서의 사건이 해결되면 내 손에 예언서의 열쇠를 쥐여 줄 조력자일 가능성이 높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단 말이지….

    그렇다고 이제 와 이 사건을 무시하고 지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조사를 시작한 데다가, 패트릭 헤이즈는 밀리엄의 지인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패트릭 헤이즈의 추가적인 조력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지금, 우리는 사건 조사와 별개로 열쇠도 직접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 건가?

    혹은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열쇠를 손에 넣게 되는 구조일까?

    지금으로선 이 사건이 열쇠를 찾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차적 이벤트인지, 메인 스토리와 연결되는 ‘두 번째 사건’인지조차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무엇 하나 명확한 것이 없는 와중에, 태어나 처음 본 시신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계속해서 내 집중력을 흐트러트리는 밀리엄의 미모가 그렇듯이, 패트릭 헤이즈의 시신은 현실처럼 생생했다.

    생생하게 끔찍한 기억이 되었다.

    아예 토막이 나거나, 어디 한 군데 잘리거나, 하다 못해 피를 흘리는 모습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소름 끼치는 창백함과, 그 순간의 서늘함과,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욕지기와, 이곳의 모든 게 사실은 내 현실이 아니라는 자기최면조차 먹히지 않는 끔찍한 현실감과…….

    무엇을 떠올려도 불쾌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든 머릿속의 이미지를 지워보기 위해 열심히 도리질을 쳤다.

    그때 병실 쪽으로 가까워지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

    “멜리사?”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밀리엄이 말했다. 나는 덩달아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각 잡힌 검은색 케이프를 걸치고, 가슴팍에 은색 배지를 단 붉은 머리 여자가 동그란 안경알을 빛내며 빠른 걸음으로 가까워졌다.

    안경만큼이나 동그래진 눈이 밀리엄을 향해 있었다.

    “선배님이 왜 여기에 계십니까?”

    “헤이즈 씨에게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세상에, 사망자가 정말로 그 패트릭 헤이즈였던 겁니까? 저는 보고를 받고도 영락없이 동명이인인 줄만 알았는데.”

    “보고를 받았다니, 담당 수사관이 너야?”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저도 이제 사건을 맡을 짬밥 정도는 된다고요.”

    멜리사라고 불린, 아마도 밀리엄의 후배인 듯한 수사관이 짐짓 불만스레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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