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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16화 (16/121)
  • 16화. 하얀 죽음의 가면 (4)

    “수사국 연수생 생활을 함께했습니다.”

    “아, 그럼 헤이즈 씨도 수사관 출신이신 건가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연수를 도중에 그만두고 나가더니 탐정 사무소를 차렸거든요.”

    다들 미쳤다고 했죠. 밀리엄은 다시 생각해도 황당한 일이었다는 듯 실소를 머금은 채 덧붙였다.

    황당할 만도 했다. 그렇게 뛰쳐나가서는 한다는 일이 결국 탐정. 요컨대 딱히 궤가 다른 진로를 찾은 것도 아니면서 앞길이 창창한 엘리트 코스를 걷어찬 셈이므로.

    “그래도 지금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수사국은 여러 가지로 보수적인 조직이니까요. 실상 본업과 별 상관도 없는 관례니 원칙이니 하는 것에 이리저리 구애받아야 하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죠. 어쨌든 사건 냄새를 귀신같이 잘 맡는 사람이라 수사관 시절에도 마주칠 일이 제법 많았고….”

    밀리엄이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한번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금은 그쪽에서 동업 제의를 하면 내가 열심히 거절하는 정도의 관계입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매정한 사람이라고 했군. 하기야 밀리엄 정도면 여기저기서 탐낼 만한 인재이긴 하지…….

    그러나 왜 그렇게 열심히 거절하느냐는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갔으니까.

    밀리엄이 <레드 헤링>의 결말에서 수사국을 떠난 것은 진실을 알면서도 외면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이런 일을 할 자격이 없다’는 마음에서 던진 사표였던 셈인데, 탐정 일은 뭐 할 수 있겠다 싶었겠는가.

    어쩌면 <레드 헤링>에서의 사건 이후로, 진실을 밝히고 마주하는 일이 그에게는 거대한 트라우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남았던 혈육의 납득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다시 한번 진실을 파헤쳐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토록 거절해가며 외면했던 곳으로 끝내 되돌아와 활약하게 된 셈이니, 과연 차기작으로 컴백한 전작 주인공다운 행보라 하겠다.

    그렇게 혼자 납득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내게 밀리엄이 불현듯 질문을 던져왔다.

    “나에 대해 궁금한 건 그게 전부입니까?”

    “일단은… 그런데요.”

    “의심 사지 않고 연인 행세를 하려면 이참에 더 많이 알아두는 게 좋지 않겠어요?”

    보기 좋게 휘어진 눈매와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눈길을 확 사로잡았다.

    이 인간이 남의 속도 모르고….

    “천천히 알아가는 사이이고 싶어서요. 오늘은 이만하면 될 것 같네요.”

    내가 은근히 눈을 흘기며 대답하자 밀리엄은 기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음 질문을 기대하죠.”

    정말 유쾌해서 웃는 건지 유쾌한 척을 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 얼굴이다.

    박살 난 과거 생각을 하니 마음이 쓰여서 자꾸 눈이 가고,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 괜히 또 눈이 가고, 쓸데없이 잘생겨서 한 번 더 눈이 가는 그런 얼굴…….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낭패감에 사로잡힌 나는 ‘그러시든가요.’ 하며 이를 악물고서 치맛자락 위로 허벅지를 꼬집었다.

    어쩌면 이럴 줄 알아서 아까 그렇게 후회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생긴 게임 캐릭터와 연인 행세라니, 대체 어쩌자고 앞뒤 생각 없이 그런 폭탄을 던져버렸던 걸까. 상상만 했을 뿐인데 현실감각 무너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그러니 더더욱 진정하고 끊임없이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었다.

    보다 목표지향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필요도 있겠지.

    일단 패트릭에게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열쇠라는 사실을 알려둔 상태이긴 했다.

    그러나 게임이 내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연속 의문사 사건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열쇠를 손에 넣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집중하자. 집중.

    나는 조이가 건네고 간 종이를 들고 있는 밀리엄의 팔을 슬쩍 내 쪽으로 끌어내렸다.

    그러자 내 뜻을 이해한 것인지, 밀리엄이 고맙게도 종이의 위치를 내 시야에 맞춰주었다.

    나는 별로 크지 않은 종이를 함께 보느라 밀리엄과의 거리가 한껏 가까워져 버렸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종이 위의 활자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사망자. 로라 히스.

    22세. 직업은 가수. 체커 스트리트 거주. 폐렴으로 입원. 증세 호전 중 돌연 사망.

    두 번째 사망자. 그리젤다 벤슨.

    45세. 리들러 스트리트 거주. 마차사고로 입원. 수술을 하긴 했지만 심각한 수준의 부상은 아니었고, 생명에 지장이 없으리란 진단도 받았는데 다음날 사망.

    세 번째 사망자. 빅터 호젠.

    36세. 벨로어 스트리트에서 푸줏간을 운영. 일하던 중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가 났고, 성공적인 봉합수술 후 퇴원을 하루 앞두고 역시 돌연사….

    “으음…….”

    솔직히 말하자면, ‘사건성이 없다’는 수사국의 판단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나이대도 직업도 제각각이고, 성별이 다 같은 것도 아니고, 입원 사유에서도 연관성을 찾을 수가 없다.

    입원했던 병실도 전부 다르고 담당했던 의사와 간호사 중에도 겹치는 사람이 없다.

    사흘 간격을 두고 사망한 것은 조금 수상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여긴 시내의 종합병원이다.

    그저 매일 생기는 사망자 가운데서 사흘 간격을 두고 죽은 세 명을 골라냈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다는 소리다.

    약간 더 수상한 공통점이라고는 세 명 모두 호전 중 돌연사했다는 정황뿐.

    이건 누군가의 고의에 의해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는….

    “그냥 개별적인 의료과실 같은데.”

    밀리엄이 중얼거렸고 나는 깊이 공감했다.

    아니 뭐, 그래. 사건일 수는 있지.

    사흘 간격으로 세 번이나, 각각 다른 의사가 실수를 저질러서 사람이 죽어 나갔는데 병원이 그걸 은폐한 거라면 그건 물론 사건이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사건이라면 탐정이 아니라 변호사에게 의뢰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여간에 곤란한 일이었다.

    키워드가 추가된 것도 그렇고, 패트릭 헤이즈와 상부상조하게 된 전개만 봐도 이게 ‘해결해야 할 사건’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추리 게임 플레이어 입장에서, 의사들의 실수를 병원이 은폐했다는 진상은 조금 허무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뭔가 다른 내막이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사망자들의 신상정보만 봐서는 도통 감이 오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 동안 종이를 째려보며 머리를 굴리던 나는 이내 조이가 주고 간 수첩을 다시 펼쳐보았다.

    수첩이 종이보다 훨씬 작았던 탓에 밀리엄이 조금 더 몸을 붙여왔다.

    나는 고개를 돌리면 얼굴이 스칠 만큼 가까워질 대로 가까워진 거리를 의식하며 잠시 아찔한 기분을 맛보았다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대로 수첩에 시선을 박았다.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사용한 모양인지, 수첩 안에는 아무렇게나 흘려 쓴 글씨와 단정하게 꾹꾹 눌러 쓴 글씨가 공존하고 있었다.

    밀리엄이 ‘여전한 악필’이라며 한숨을 내쉬는 걸 보면, 흘려 쓴 쪽이 패트릭 헤이즈의 글씨인 듯했다.

    조사 내용은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패트릭 헤이즈가 그리젤다 벤슨의 유족으로부터 사건을 의뢰받은 건 11월 4일.

    위장 입원을 감행한 것은 6일. 이날 저녁 빅터 호젠이 사망했다.

    하지만 패트릭은 다음 날인 7일이 되어서야 빅터 호젠의 사망에 의구심을 품은 모양이라, 당연히 시신에 대한 조사는 이뤄지지 못했다.

    그리젤다 벤슨의 남편 토머스 벤슨이 경찰까지 불러가며 ‘누군가 내 아내를 죽였다’고 주장했던 것과 달리, 빅터 호젠의 유족들은 갑작스러운 감염증으로 사망했다는 의사의 소견을 믿었기 때문에 시신은 이미 화장된 상태.

    수습할 유족이 없는 로라 히스의 시신 또한 화장되었고.

    그리젤다 벤슨의 시신만이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는데, 토머스 벤슨의 강력한 부검 요청을 수사국에서는 거부….

    절충안으로 제시된 병원에서의 부검은 토머스 벤슨이 믿을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모양이다.

    “밀리엄.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혹시 부검….”

    “그 정도까지 유능한 인간으로 상상해준 건 고맙지만, 당연히 할 줄 모릅니다.”

    “하긴 그렇겠죠.”

    “민간인 신분으로 허가 없이 해선 안 될 일이기도 하고요.”

    “그것도 그렇네요….”

    밀리엄의 상식적인 발언에 나는 소심하게 말끝을 흐렸다.

    아니, 뭐. 나라고 시신을 빼돌려서 부검을 해보자고 말하려던 건 아니다.

    그냥 잠깐 희망적인 망상을 해본 거지. 망상이 죄는 아니잖아.

    막말로 솔직히 여기 적힌 내용대로라면 이제 조사할 수 있는 시신이라곤 그리젤다 벤슨의 것 하나만 남은 셈인데 이걸 그냥 넘기는 건 너무 아까운….

    “하지만 육안으로 사인을 추측해보는 정도라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나이스!

    나는 수첩을 들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며 내심 쾌재를 불렀다.

    역시 내 파트너는 유능했다.

    겉으로만 봐서 수상한 죽음의 흔적이 발견되리란 보장이 없기는 하지만 이게 어디냐.

    “토머스 벤슨 씨는 진상이 규명되길 바라시니까, 그분 협조를 받으면 시신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겠죠. 시신 확인은 유족의 고유한 권한이니까요.”

    밀리엄은 그렇게 말하며 오늘 돌아가는 길에 자신이 벤슨 씨에게 들러 부탁해보겠다고 덧붙였다.

    시신 조사 건을 밀리엄이 맡기로 무언의 합의를 본 후 우리는 다시 수첩의 남은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젤다 벤슨이 정말로, 의심할 여지 없이 건강해졌었다는 간호사 마리아 블루벨의 증언.

    빅터 호젠을 수술한 의사 그레고리 디안이 수십 년간의 외과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환자를 살리는 데 실패한 적 없는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이야기.

    로라 히스의 병은 사실 폐렴이 아니라 조금 독한 감기였는데, 담당의가 입원환자를 늘려 실적을 올리기 위해 진단을 조작한 것 같다는 정황 등이 줄지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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