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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71화 (71/76)
  • #71화. 오몽 (2)

    이신은 지금,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꽤 오랜 시간 동안 지켜본 이독경이라는 상사는 비록 한 여자 앞에서는 팔불출로 변신하지만, 공사 구분만큼은 누구보다 확실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약속은 어찌나 철저하게 지키는지 여태껏 단 한 번도 출근이나 회의 시각을 어긴 적이 없었다.

    나름 이 바닥에서 철두철미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녀도 그 앞에서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독경이 아무런 언질도 없이 사흘째 연락을 받지도, 출근을 하지도 않았다.

    이신은 상사의 사생활을 간섭할 마음도 그럴 권리도 없다고 늘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해 왔지만, 이번만큼은 펜트하우스로 직접 찾아갈 요량이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이신이 이런저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익숙한 건물 안으로 막 들어서는데, 누군가가 몹시도 발랄한 음성으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

    “어? 이 비서님! 어쩐 일이세요?”

    그녀가 뒤를 돌아보니, 편안해 보이는 트레이닝복에 운동화를 신은 선하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신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차림의 그가 낯설었던 탓이었다.

    “선하 씬, 일 있어서 왔어요?”

    “아니요. 저 휴가예요. 주인 누님이 당분간은 공식 일정 없다고 쉬라고 하셨거든요.”

    “현 상무님이요?”

    처음 듣는 지시 사항에 이신이 더욱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의문이 눈덩이처럼 점점 불었다.

    “휴가 중인데, 여긴 왜...?”

    “아, 갑자기 휴가를 얻으니까 갈 데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여기서 빈둥대고 있었어요.”

    선하가 멋쩍게 머리를 긁으며 실실 웃었다. 기대보다 한심한 답변에 이신은 긴장이 탁 풀렸으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그럼 혹시 어제, 오늘 김주환 본부장님은 뵀어요?”

    “아니요. 근데 왜요?”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이내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였다. 명색이 비서씩이나 되는 사람이 다른 이에게 제 상사의 안부를 묻는 모양새가 영 수상쩍었던 것이다.

    그녀가 안경을 고쳐 쓰며 깐깐한 목소리로 의문을 풀어 주었다.

    “그제, 어제 연락도 없이 출근을 안 하셨어요.”

    “네?? 독경 형님이요??”

    선하가 빽 고함을 내질렀다. 그 반응에 이신은 심증을 굳혔다. 아무리 보수적으로 생각해도 기묘한 상황이 확실했다.

    두 사람은 평소 같지 않은 독경의 행동에 의문을 품으며 맨 위층으로 향했다.

    이신이 만일을 대비해 소지한 여분의 카드키로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살벌한 집 안 풍경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물건이며 가구가 성한 곳 없이 부서지고 뜯긴 채 바닥에 엉망으로 나뒹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무슨....”

    이신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말끝을 흐리는 사이, 선하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거실 한구석으로 달려갔다.

    “독경 형님!!”

    이신이 그가 내달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벽에 기댄 채 철퍼덕 주저앉아 있는 독경이 있었다. 선하가 무릎을 꿇고 앉으며 다급히 질문을 던졌다.

    “형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러자 아래로 푹 수그려 있던 얼굴이 서서히 들리더니, 분노로 핏발이 잔뜩 오른 탁한 눈이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이신과 선하가 이지를 잃은 채, 난폭한 본능만 남은 흉흉한 기세에 눌려 흠칫 몸을 떨었다. 그때, 독경의 메마른 입에서 발작적인 웃음이 튀어나왔다.

    “하, 하하....”

    초점 없는 새카만 눈이 환영을 쫓듯 허공을 더듬어 가는 것을, 그녀는 두려움 속에서도 똑똑히 목격했다.

    ***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고 난 뒤, 독경은 깨달았다. 주인이 제 곁을 떠났다는 사실을 말이다.

    문득, 공포감이 엄습했다.

    현주인이라는 여자는 그저 자신이 꾼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기이한 집착이 만들어 낸 환상 따위는 아니었을까?

    그도 아니라면 어쩌면 그녀는 이미 죽었고, 자신은 이승을 떠도는 유령을 붙든 채 함께 살았던 것은 아닐까?

    그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온 집 안을 뒤집어엎었다. 그녀가 이곳에 실재했었다는 흔적을 찾아야만 했다. 자신이 미친 것이 아니라는 확인이 필요했다.

    하지만 주인은 늘 그렇듯 머리카락 한 올도 남기지 않은 채, 깨끗이 증발해 버렸다.

    마치 이곳에 스스로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이라는 사람이 기억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독경이 다급히 휴대 전화를 찾아 통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새로 구매한 그녀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미처, 위치 추적 앱을 깔아 놓을 틈도 없었다.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한 그가 전화기를 유리창에 집어 던졌다. 퍽 하는 충격음과 함께, 유리창에 금이 가며 휴대 전화가 산산이 부서졌다.

    주인과 연결될 수 없는 기계 따위는, 독경에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렇게 또다시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있던 그는 불현듯 기묘한 생각에 사로잡힌 채 두 눈을 끔뻑거렸다.

    느닷없이 독경이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이미 한번 뒤졌던 서재를 다시 찾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책들을 거침없이 헤치고 책상 앞까지 당도한 그가, 조심스럽게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가지런히 정렬된 필기구와 더불어, 작은 반지 상자가 있었다. 힘줄이 불뚝 솟은 두툼한 손이 상자를 확 낚아챘다.

    만약 주인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한 쌍의 반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터였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상자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을 확인한 순간, 막힌 숨이 팍 터졌다.

    “하!”

    오래된 상자 안에는 남자 손가락만 한 크기의 반지 하나만 덩그러니 담겨 있었다. 그토록 낡고 투박한 반지를 애지중지 여기던 그녀는 딱 그 물건 하나만, 제 것인 양 가져갔다.

    그것은 일종의 선언이었다. 오로지 그 마음 하나만 받겠다는, 다른 것은 무엇도 필요치 않다는....

    그러니 너도 나를 찾지 말라는, 잔인하고 냉혹한 선포.

    “윽....”

    독경의 가로로 긴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말라붙은 입술 사이로 짐승의 울음이 꺽꺽거리며 샜다.

    그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은 전부를 다 내어 준 것과 같다는 사실을, 그녀는 왜 모를까?

    분하고, 미웠다. 하지만 그 마음보다도 더, 보고 싶었다. 고작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도, 아주 오랜 시간 혼자였던 것 같은 고독감이 밀려왔다.

    독경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작은 상자를 끌어안고는,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어느새 창밖에서 하나둘 빛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거실 한쪽 벽에 기대앉아 밝아 오는 하늘을 물끄러미 보며, 그는 마지막 순간을 곱씹었다.

    어딘가 쓸쓸해 보이던 눈빛도, 애달프게 사랑을 속삭이던 입술도, 밤새 제 왼쪽 어깨를 다정히 어루만지던 따스한 손길도....

    너무나 많은 신호가 자신에게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미련한 개새끼는 달콤한 말에 취해, 아름다운 얼굴에 홀려, 뜨겁게 달아오른 욕망에 허덕인 채 모든 단서를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그런 독경을 방심하게 한 이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가 철저하게 간과한 것이 있었다.

    자신이 기만한 그 남자는 설령 아무것도 내주지 않을지언정, 마음만을 주는 법은 없다는 사실을. 그의 마음을 가졌다면, 원하지 않더라도 모든 것을 가져야만 했다.

    그리고 남자의 가장 큰 미덕은 인내와 끈기였다.

    독경은 설령 그곳이 지옥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주인을 찾아갈 것이며, 기어이 그 하얀 손에 펄떡이는 붉은 심장을 쥐여 줄 것이었다.

    그것을 씹어 먹든 내던지든, 선택은 그녀의 몫이었다.

    “현주인... 주인아....”

    그가 고요한 허공에 대고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그러고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허탈과 희열이 공존하는 기이한 웃음이었다.

    “이렇게 사라질 거면,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았어야지.... 남김없이 다 두고 갔어야지....”

    ***

    이신은 정갈한 차림새로 반듯하게 앉아 결재 서류를 훑는 제 상사를 뚫어지게 보았다. 예의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눈길이 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의문 가득한 시선을 느낀 독경이 서류 위에 얼굴을 고정한 채,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이 비서님,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아, 아닙니다!”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그녀가 눈에 띄게 동요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태연한 저 남자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미친 사람처럼 흐릿한 눈을 하고는 성마른 웃음을 터뜨리며 모두를 혼란에 빠뜨렸었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이신과 선하는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독경은 멀쩡한 몰골로 출근해 업무를 보았다.

    그러나 꽤 오랫동안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해 온 이신은 알았다. 그는 지금 간신히 버티는 중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는 눈가와 말라 가는 뺨이 이를 증명했다. 필시 온종일 먹지도, 자지도 않는 것이 분명했다.

    “제가 부탁한 건 알아보셨습니까?”

    독경이 다시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아, 그게 현 상무님께서 워낙 흔적을 남기지 않으셔서....”

    상사의 질문에 이신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내리 무단결근을 한 다음 날, 그는 출근하자마자 제 비서부터 호출했다. 그러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인을 찾아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신은 화들짝 놀랐다.

    이미 태성 쪽에 현도경 상무가 휴가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독경마저 그녀의 행방을 모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제야, 이신은 그날 독경이 보였던 기행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또한 주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졌던 것이다.

    그녀의 잠적이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라는 심증을 굳힌 것은, 바로 그날 도착한 한 통의 이메일 때문이었다.

    태성그룹 임직원들에게 보내는 공식 메일을 통해, 주인은 사업총괄 상무 직을 사임하겠다는 폭탄선언을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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