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협상 (2)
“아버지, 언제까지 오빠를 봐주실 거예요? 승계를 받기도 전에 이렇게 온갖 전횡을 일삼는데, 회장 자리에 오르면 얼마나 더 태성을 망가뜨리겠어요? 현실을 직시하세요. 현상현은 태성을 망칠 거예요.”
주인의 고언에 현 회장이 비릿하게 웃었다. 딸이 무슨 속셈으로 이런 일을 꾸몄는지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나한테 그 자리를 넘겨라, 그 뜻이냐? 제법이구나. 하지만 과연 네 마음대로 될까?”
현 회장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비열한 미소에 그녀는 침을 삼켰다. 역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열의가 더욱 불타올랐다.
“왜 제가 그 자리에 오르면 안 되죠? 똑같이 아버지 자식인데. 능력이 의심스럽다고 기회까지 박탈하진 마세요. 설마, 딸이라서 그런 건 아니시죠?”
주인이 일부러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현 회장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미소를 가장할 수 있는 부친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주인아, 너한테 그 자리는 독이 든 성배가 될 거다. 잘해도 본전, 못하면 독박. 그래도 할래?”
“네, 주세요. 그 자리! 그 자린 오빠보다 제게 더 어울려요!”
주인이 큰 눈을 부릅떴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눈동자에 탐욕이 아른거렸다.
채울 수 없는 격정에 휩쓸린 두 눈을 현 회장이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처음부터 이리 굴었다면 한번 키워 볼 것을,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는 잠시간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책상 위에 놓인 난을 만지작거렸다. 분명, 자신에게 닥칠 손해와 이익을 계산하는 것이리라.
“좋다, 내부가 정리되는 대로 연락하마. 현상현!!”
현 회장이 아량을 베풀 듯 시원스레 답하고는, 날카롭게 제 아들을 불렀다. 주인이 원하는 답을 얻어 내자마자, 막힌 숨을 탁 터뜨리며 돌아섰다.
그때, 상현이 허겁지겁 들어오다 방을 나오는 주인과 어깨를 부딪쳤다.
주인이 그를 올려다보며 교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상현은 모욕감과 더불어 강렬한 불길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현실로 닥쳤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현 회장이 그를 향해 온갖 비난을 퍼부었던 것이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 묵직한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틈으로 간간이 억울함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섞였다.
주인이 우뚝 서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딸 앞에서 여유로운 척했지만, 사실 현 회장의 노여움은 이미 한계점을 넘은 지 오래였다.
제 목숨과도 같은 회사를 감히 쥐새끼 하나가 야금야금 좀먹고 있었다니. 아들놈이어도 용서할 수 없었다.
주인은 핏줄보다 회사를 더 끔찍이 아끼는 부친의 성향을 누구보다 일찌감치 알아챘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작은 약품 공장을 제 이름인 ‘태성’으로 바꾸는 순간, 회사는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게 됐으므로.
그런 현 회장이 제 아들의 잘못을 여태껏 눈감았던 이유는 뾰족한 대안이 없어서였다.
그러나 불량품을 갈아 끼우듯 대체할 것을 찾은 이상, 그는 쭉정이만도 못한 아들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
그녀의 입에서 진한 한숨이 샜다. 독경이 곧장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다.
“괜찮아요?”
“아니, 토할 것 같아. 여기서 나가고 싶어....”
주인이 다리를 휘청거리며 그의 옷소매를 꽉 쥐었다. 독경이 재빨리 어깨를 다잡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나가요, 우리.”
비틀거리는 그녀를 부축해 안은 그가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독경은 그녀를 안은 채, 진정될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 주었다.
주인은 자신의 오목하게 파인 등줄기를 쓰다듬는 그의 애틋한 손길을 온전히 느끼며, 탈진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주인이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제게 얼굴을 딱 붙인 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독경의 모습이 보였다.
주인이 상체를 부스스 일으키며 물었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어? 너 불편했겠다. 팔 저리지?”
독경이 어쩐지 쓰게 입맛을 쩝 다시더니,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시간은 별로 안 지났고, 팔도 그다지 저리진 않아요. 근데, 좀 불편하긴 하네요.”
그녀가 내내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굵은 팔뚝을 주물러 주려다,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불편해? 어디가? 팔이, 아니면 다른 데가? 얘기해, 주물러 줄게.”
“흠, 진짜요?”
독경이 어딘가 오묘하게 풀린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주인이 그런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눈동자를 아래로 슬그머니 내리깔며, 자신의 하반신을 보았다.
“여기....”
“여기?”
그녀가 상대의 시선을 따라 아래쪽으로 눈을 내렸다가,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후다닥 얼굴을 쳐들었다.
“이 저질아! 미쳤어, 정말. 여기가 어디라고.”
주인이 독경의 어깨를 퍽퍽 치며 타박했다.
“그럼, 어떡해요. 잠든 걸 보기만 해도 저절로 반응하는데....”
그가 몹시도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그러고는 여전히 자신의 어깨를 내리치고 있던 손목을 꽉 붙들며 말했다.
“이건 순전히 다, 선배 탓이에요. 그렇게 생기질 말았어야죠. 아니면, 잠이라도 좀 험하게 자든가. 너무 얌전히 있으니까, 숨은 쉬는지 확인하려다 그런 거라고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궤변에, 어이가 없어진 주인이 결국 헛웃음을 지었다.
“팔불출....”
“이왕이면 순애라고 해 줄래요?”
그녀의 나직한 말에 독경이 씩 웃으며 뻔뻔하게 나왔다. 그러고는 느긋하게 운전대를 돌리며 말했다.
“오늘은, 진짜 긴 하루였어요. 이제 집으로 돌아갈까요?”
***
그로부터 일주일 뒤, 주인은 태성그룹 사업총괄 상무로 전격 발탁됐다.
펜트하우스 거실에 틀어 놓은 경제 관련 방송에서 아나운서의 또렷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늘 태성그룹은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습니다. 현태성 회장의 장남이자 부회장인 현상현 씨를 해임하고, 차녀인 현도경 미래투자 이사를 사업총괄 상무로 발탁했는데요. 전문가와 함께 자세한 이야기 나눠 보겠습니다.]
곧바로 둥근 안경을 쓴 중년 남성이 화면에 잡혔다.
[보통 후계자들이 입사해서 임원으로 승진하기까지, 평균 사 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승진 속도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르죠. 하지만 이번 태성그룹 사례처럼 처음부터 임원급으로 출발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굉장히 파격적인 선임이죠.]
그러자, 여자 아나운서가 말을 이어받았다.
[일각에선 현상현 부회장의 오너 리스크를 감당 못 한 현 회장이 직접 지시를 내렸다는 설도 있던데요?]
[맞습니다. 현상현 부회장은 그동안 경영적인 측면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고, 여러 구설에 오르며 자질도 의심받았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탈세에 연루되며 곤욕을 치르기까지 했죠. 그렇지 않아도 하청 업체에 대한 갑질 논란으로 위기를 맞은 태성에 기름을 부으며, 경영난을 가중했다는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번 인사도 그 결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겁니다.]
[그럼, 이번엔 조금 다른 얘기를 해 볼까요? 파격 인사의 주인공 현도경 상무, 어떤 사람입니까?]
주인의 얼굴이 뉴스 화면 한쪽에 자리 잡았다. 전문가가 물 흐르듯 답했다.
[현태성 회장의 차녀인 현도경 상무는 민국대 경영학과를 졸업 후, 유수의 컨설팅 업체에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이후 투자사로 전직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밖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일찌감치 후계 수업을 받은 현상현 전 부회장과는 대조적이죠. 그래서 일각에선 우려 섞인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현태성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손을 뗀 지 오래고 현상현 부회장은 해임으로 공석이기 때문에, 현도경 상무가 실질적으로 사업을 주도해야 하는 상황이죠.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
뚝.
소파에 앉아 멀거니 화면을 보는 주인을 못마땅한 눈길로 훑던 독경이 기어이 TV 전원을 꺼 버렸다.
“왜? 잘 보고 있었는데....”
주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독경이 퉁명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진, 실물보다 못 나왔어요. 태성그룹 홍보실 새끼들은 뭐 하기에 저런 것도 확인을 안 한담....”
나직하게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그녀가 픽 웃었다.
“잘 나와서 뭐해. 얼굴로 일하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 무신경한 발언에 그가 발끈했다.
“선배의 아름다움은 온 세상이 알아야 해요. 그게 인류애라는 겁니다.”
짐짓 엄숙한 말에 주인이 경악했다.
“팔불출....”
“나 참, 순애라니까요.”
독경이 넉살 좋게 웃으며, 그녀의 무릎을 베고는 벌러덩 누웠다.
“취임식이 언제죠?”
“다음 주.”
“떨려요?”
“음, 약간? 넌 어때? 너도 그때 같이 소개될 거잖아. 아, 이런 일엔 익숙한가?”
주인이 일만에서 활약했을 그를 상상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독경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늘어진 단발머리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답했다.
“내부 행사선 한두 번 얼굴 비춘 적 있지만, 이렇게 외부에 공개되는 행사에 참여하는 건 나도 처음이에요.”
“흠....”
주인이 어딘가 꽤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잠겼다. 그 얼굴이 재밌고 신기해 보였는지 독경이 그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잠시 뒤, 그녀가 슬며시 입술을 뗐다.
“그럼, 너나 나나 공식적으로 나서는 건 처음이네?”
“그런 셈이죠.”
그가 선선히 동의했다.
그러자 주인이 느닷없이 벌떡 일어섰다. 독경이 떠밀리듯 상체를 따라 일으켰다.
“우리 쇼핑 가자!”
주인이 그의 팔을 잡아끌며 외쳤다. 독경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가는 허리를 껴안고는 탄탄한 아랫배에 제 볼을 비볐다.
“오늘은 그냥 집에 있으면 안 돼요? 우리 안 한 지 열 시간이나 됐다고요. 내 몸에서 사리 나올.... 윽!!”
그때, 그녀가 그의 양 뺨을 우악스럽게 잡으며 단호하게 외쳤다.
“안 돼! 넌 내 ‘최종 병기’란 말이야! 사람들한테 근사하게 보여야 해!”
“최종 병기라....”
독경이 만족스럽게 실눈을 뜨며 찬찬히 말을 곱씹더니, 이내 입꼬리를 들썩였다. 태세는 급격히 전환됐다.
“좋아요, 가죠! 선배 옷도 내가 골라 줄게요!”
독경은 이동 중에 이신에게 전화를 걸어 매장 한 곳을 통째로 예약하라고 지시했다.
이신은 명품을 두루 갖춘 적당한 편집 매장 한 곳을 골라 예약한 뒤, 위치를 전달했다.
운전대를 잡은 독경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주인이 옆자리를 보며 빙긋 웃었다. 일직선으로 죽 뻗은 도로가 한여름의 열기로 후끈 달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