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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50화 (50/76)
  • #50화. 습격 (2)

    묘하게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주인의 말에 성만의 하얗게 센 눈썹이 움찔거렸다.

    “저흰 그 녹취록을 인터넷에 공개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뒤이은 말에, 그가 체념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소. 기사가 막히고, 기자님이 해고당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그 방법도 고려했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하셨죠. 혼자선 엄두가 나질 않았을 테니까.”

    독경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매섭게 정곡을 찔렀다. 성만이 대답 대신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괴로운 표정만 지었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다를 겁니다. 저희가 다 지원해 드릴 거니까요. 당분간 가족들과 조용히 지내실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법률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도 책임지고 해결해 드릴 겁니다. 물론, 녹취록을 넘겨주신 값도 충분히 치르겠습니다.”

    주인이 냉정하지만 사려 깊게 덧붙였다.

    “이 일로 태성 쪽에서 책임 있는 사과나 보상을 해 주진 않을 겁니다. 도리어 협박할 가능성이 크죠. 다 막아드릴게요. 그러니 선생님께선 저흴 맘껏 써먹으세요.”

    성만이 누렇게 빛바랜 채 군데군데 곰팡이가 핀 벽지를 보며 고민에 휩싸였다.

    주인과 독경이 그런 그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육 년을 참은 복수인데, 몇 시간쯤 기다리는 것은 두 사람에게 아무 일도 아니었다.

    ***

    몇 주 뒤 그날, 기사가 터졌다.

    탈세와 횡령을 목적으로 해외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이들의 명단이 공개된 것이다. 그리고 그 명단에는 재계의 유명 인사들은 물론, 태성그룹의 현상현 부회장도 끼어 있었다.

    당연히 기업들의 방만한 경영과 도덕적 해이가 도마에 올랐다.

    그리고 그 폭풍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유명 동영상 사이트에 녹취록 하나가 공개됐다.

    흔하다면 흔한 사례였다. 본사 측에서 상품을 강매하면 하청 업체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떠안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 녹취록이 뜨거운 화제에 오른 것은 대화 내용이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탓에 수많은 유교인의 분노를 건드린 점에 있었다.

    새파랗게 어린 본사 담당자가 지긋한 중년의 하청 업체 직원에게 폭언을 쏟고 갑질을 하는 것만큼, 자극적이고 원색적인 소재가 또 있을까 싶었다.

    조회 수는 순식간에 폭발했다.

    공중파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후속 취재에 들어갔다. 곳곳에서 유사한 제보들이 쏟아졌다.

    국정 감사에 오를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노사 분쟁 전문가로 유명한 야당의 국회의원이 관련 자료를 수집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당사자인 구성만을 만날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잠적한 뒤였기 때문이다.

    이 여파로 태성에 대한 평가는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불매 운동도 적극적으로 벌어졌다. 얼마 전 공개된 탈세 혐의와 맞물리면서 기업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장이 저 모양이니 직원도 개차반이지.’였다.

    부정적인 평가는 곧, 주식 시장에도 반영됐다. 주가가 폭락했던 것이다.

    태성 측에서 긴급회의가 소집됐다.

    풍문에 따르면, 화를 주체 못 한 현태성 회장이 임원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현상현 부회장에게 물 잔을 집어 던졌다고도 했다.

    회의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결국,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현 회장은 직접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기로 했다. 그러나 뒤로는 이번 일을 벌인 주동자를 찾아내라는 엄포를 놓았다.

    상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사측은 그를 해임하는 대신, 직무 정지 처분만을 내렸다. 당연히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현 회장 입장에서는 못난 놈이나 어쨌든 제 아들이었고, 태성을 물려받을 하나뿐인 후계자였기에 차마 해임까지 할 수는 없었다.

    “주가가 떨어졌으니, 이참에 상현이 지분율이나 높여야겠군....”

    간교한 자들은 아흔아홉 가지의 악재에서 단 한 가지라도 이득이 있다면, 그 점을 교묘히 파고들었다. 그것이 그들이 생존하는 방식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금이 부족해 매수 시기를 저울질하던 중이었다. 현 회장은 주가가 폭락한 이 시점이야말로 지분율을 올릴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그가 지시를 내렸다.

    “상현이 지분을 담보로 대출받을 수 있는 거 다 끌어다 매수해.”

    “저... 근데....”

    자금담당 임원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렸다.

    “매물이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다 팔렸습니다.”

    “뭐? 대체 누가?”

    현 회장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 그건 지금 조사 중입니다....”

    “이, 이... 미련한 놈이 그따위 걸 대답이라고....”

    그가 치밀어 오르는 노기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최, 최대한 빨리 알아 오겠습니다!”

    임원이 창백하게 질린 낯빛으로 허리를 푹 숙였다.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그 말에 회장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허둥지둥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수상해. 모든 게 우연 같지 않아....”

    현 회장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즈음, 상현에게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뭐, 뭐라고? X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그가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사방에서 폭탄이 펑펑 터지니,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도 안 왔다.

    “혹시 미래투자 쪽에서 우릴 노리고 꼼수를 쓴 건가? 야, 박 팀장! 김주환인지 뭔지 미래투자 대표 찾았어?”

    다른 직원들이 있는 앞에서도 상현은 중우를 하대했다.

    “아, 저 그게 짐작 가는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만....”

    “X발, 여태껏 안 찾고 뭐 하다 이제 지X들이야! 그럼, 오늘 주식 매수한 새끼는 누구야?”

    “그것도 파악 중입니다....”

    중우의 목소리가 점점 더 기어들어 갔다. 상현이 그를 잠시 노려보다, 옆에 서 있던 다른 남자에게 몸을 휙 돌렸다.

    “야, 진 비서! 페이퍼컴퍼니 건 언론에 흘린 새끼도 찾아내. 분명, 내부에서 서류 빼돌린 거야. 누군지 알아 오란 말이야!”

    상현이 제 성질에 못 이겨 주먹으로 책상을 쾅쾅 내리쳤다.

    “아, X발! 김 실장 아저씨만 있었어도 진작 찾아냈을 텐데.... 멍청한 새끼들만 남아서....”

    그가 강석의 각진 얼굴을 떠올리며,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좌중을 노려보았다. 언제 깨질지 모를 살얼음판 같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 순간, 상현의 머릿속에 어떤 장면 하나가 퍼뜩 스쳐 지나갔다.

    그가 숨을 고르며 머리를 차게 식히고는 차근차근 생각했다. 언론에 공개된 자료 중 하나는 분명, 자신이 보관 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졌다, 감쪽같이.

    이 방에는 자신과 몇몇 임원들, 그리고 비서를 빼고는 드나드는 사람이.... 아니다, 최근에 한 명 있었다.

    얼굴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검은 정장과 어울리지 않는 어리고 여리여리한 분위기의 젊은 새끼 하나 말이다.

    “야, 박중우! 보안팀에 연락해서 요원 중에 젊은 놈 하나 있는지 확인해 봐. 있으면 도망 못 가게 잡아 두라고 해!”

    급박한 명령에 중우가 숨이 넘어갈 것처럼 빠르게 휴대 전화를 들었다. 짤막한 통화를 마친 그가 더욱 사색이 된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팀에... 젊은 사람이 한 명 있긴 한데.... 이번 주부터 휴가라서 지금은 자리에 없답니다....”

    “뭐?? X발, 빨리 신원 파악해서 집부터 뒤져. 그 새끼가 누구 사주를 받았는지 알아야 해!!”

    상현의 괴성에 방에 있던 모든 이가 손발을 어지러이 놀렸다.

    그 시각, 주인이 외출을 마치고 예상보다 조금 일찍 돌아왔을 때 독경은 거실에서 낯선 남자와 대화 중이었다.

    남자는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학생처럼 앳된 티가 역력한, 연약한 외형이었다. 피부도 하얗고 머리 색도 밝아서 더 그런 인상을 받는지도 몰랐다.

    “그래, 살던 곳은 정리했고?”

    “네. 그냥 싹 비워 버려서 눈치챈다 해도 건질 만한 게 없을 거예요.”

    그 말에 독경이 고개를 끄덕이다, 현관 쪽에 멀뚱히 서 있는 주인을 발견했다. 그러자 낯선 남자도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선배, 일찍... 왔네요...?”

    곤혹스러운 목소리가 허공에 퍼졌다.

    주인은 일순, 자신을 바라보는 두 남자의 표정이 몹시 대조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독경은 들키기 싫은 것을 들킨 사람처럼 언짢은 기색이었고, 소년미가 넘치는 남자는 반가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가 벌떡 일어섰다.

    “주인 누님! 만나서 영광입니다! 독경 형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실내를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주인은 당황했다. 독경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직이 명령했다.

    “유선하, 앉아!”

    “네? 넵!!”

    유선하라 이름 불린 청년이 멋쩍게 앉았다.

    주인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한가득 떠올랐다. 그녀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그들 곁으로 침착하게 다가섰다.

    “유선하 씨,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주인이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악수를 청했다. 선하가 약간 감격에 떨리는 음성으로 화답했다.

    “앗! 안녕하세요, 누님.”

    그가 우아한 손을 맞잡으며, 상대의 얼굴을 홀린 듯 빤히 보았다.

    “이 비서님 말씀대로 진짜 미인이시네요.”

    “유선하, 빨리 손 떼라. 안 그럼 죽는다!”

    독경이 어금니를 지그시 씹으며 낮게 경고했다. 선하가 재빨리 손을 뺐다.

    “이독경.”

    그녀가 고저 없이 이름을 불렀다. 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나한테 유선하 씨 소개 안 해 줄 거야?”

    그 말에 독경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별놈 아니니 신경 쓰지 마요. 아직 식사 전이죠? 뭐라도....”

    화제를 돌리며 슬쩍 일어나려는 그의 어깨를, 주인이 뒤에서 꽉 눌렀다. 독경이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도로 앉았다.

    “선하 씨, 식사 안 했으면 같이 할까요?”

    “하하, 좋습니다.”

    그녀의 제안에 선하는 독경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기뻐하는 것 같았다.

    잠시 뒤, 세 사람은 식탁에 빙 둘러앉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주인이 입을 열었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먹어요. 그나저나 선하 씨는 어디 소속이에요? 일만? 미래투자? 아니면 이 비서님처럼 둘 다?”

    “아, 그게....”

    선하가 큰 눈알을 도르르 굴렸다. 그때, 독경이 불쑥 끼어들었다.

    “제가 태성에 심었다는 스파이가 얘예요.”

    주인은 몹시 당황했다. 이렇게 해사하게 생긴 청년이 그런 대범한 짓을 벌이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 그렇구나! 선하 씨, 너무 고마워요. 위험한 일에 직접 나서 줘서.”

    그녀가 고마움에 상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독경이 두 눈을 섬뜩하게 부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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