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습격 (1)
긁힌 쇳소리처럼 새된 부름에 보안 요원의 발걸음이 주춤거렸다. 혹시 자신을 기억하는가 싶어 간이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악연은 상대가 만취했을 때, 일어났다. 그가 기억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젊은 요원이 떨떠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상현이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상대편으로 던졌다.
“그거, 내 자리에 갖다 놔.”
그가 퉁명스럽게 명령을 내리고는 그대로 뒤돌아섰다. 잠시 멍한 얼굴로 우두커니 있던 보안 요원이 이내 원하던 기회라도 얻은 것처럼,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냈다.
그가 여유만만하다 못해 느긋하게 부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휴대 전화의 플래시를 켜 둘러본 내부는 너저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젊은 요원의 눈에 무언가가 포착됐다. 책상 뒤쪽에서 금고를 발견한 것이었다. 중요한 서류나 귀중품은 모두 이곳에 보관해 두는 모양이었다.
그가 늘 지니고 다니던 초소형 카메라를 주머니에서 꺼내 금고 쪽이 잘 보이도록 조정하며 책상 밑에 붙였다.
이 작은 기계가 자신에게 금고 안으로 향하는 길을 알려 줄 것이다.
그가 전원을 켜기 전 마지막으로 카메라 쪽을 바라보며, 기계도 반할 만큼 상큼하게 웃었다.
“잘 부탁한다, 그레이스.”
유선하가 은밀한 행동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그늘 없이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는 이내 유유히 그곳을 벗어났다.
***
“기자가 왜 욕먹는지 알아요?”
주인의 맞은편에 앉은 짧은 머리의 여자가 무심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주인이 은은한 미소를 띠며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약하고 만만한 사람은 물어뜯지 못해 안달이고, 돈 많고 강한 사람에겐 알아서 설설 기거든요. 솔직하면 솔직하달까, 노골적이라면 노골적이랄까. 참, 권력 지향적이죠?”
여자가 날 선 독설을 한바탕 쏟아 낸 뒤, 냉소 짙은 표정으로 커피를 마셨다. 그러고는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드러냈다.
“솔직히 전, 약자한텐 관심 없어요. 제 관심사는 강자죠.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쥐락펴락하는지 궁금했고, 그걸 알아내면 나도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근데 이 일을 하다 깨달았어요. 올바른 방법으로 꼭대기에 오른 강자는 매우 드물다는 걸요. 대개는 부정과 편법으로 누군가를 희생하곤 그 시체들로 산을 쌓아 깃발을 꽂더라고요. 특히, 우리 사회에선 더더욱.”
주인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꺼냈다.
“태성과 악연이 있으시다고요?”
“아, 그거요? 김 기자가 말했어요?”
여자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윤희와는 다른 매체에서 근무했지만, 한 기업 조찬회에서 우연히 만나 안면을 텄다.
윤희는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선배 기자를 멘토처럼 따랐고, 종종 연락을 주고받으며 인연을 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윤희가 자신에게 딱 맞는 정보가 있다며 제보자를 만나 보라고 했다.
그 사람이 바로, 눈앞에서 기품 있게 그러나 어딘가 치명적인 발톱을 숨긴 채 앉아 있는 현주인이었다.
“음, 태성에서 하청 업체를 상대로 강매를 한 적이 있어요. 피해자가 자신이 직접 녹음한 파일을 들고 찾아왔었죠. 그분은 꽤 심각한 상황이었어요. 정신적인 충격은 물론, 금전적으로도 큰 손해를 입었으니까요.”
여자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다시 커피를 죽 들이켰다.
“전 그 사실을 취재해 편집까지 마친 상태였는데, 인쇄 직전에 빠졌어요. 알고 보니, 태성 쪽에서 광고를 중단하겠다는 압력을 윗선에 넣었다고 하더군요.”
“참, 치졸한 수법이네요!”
주인이 자신이 겪은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발끈했다. 상대의 공감에 동의하며 여자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 정돈 사실, 고약한 축에도 못 끼는 거예요. 이 바닥에서 제일 흔한 협박이거든요. 하지만 당시에 전, 혈기 왕성했고 회사에 항의했죠. 그러다 잘렸어요.”
여자가 해맑게 지난했던 과거를 털어놓으며, 자신을 멍하니 보는 상대에게 눈을 찡긋했다.
“아, 그래서 광고 없는 독립 언론 쪽으로 옮기셨군요.”
주인이 약간 감탄 섞인 어조로 말했다. 여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쓸데없이 제 얘기가 너무 길었네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그 말에 주인이 서류 가방에서 두툼한 자료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혹시 금장회계법인이라고 들어 보셨어요?”
“흠....”
주인이 비장하게 포문을 열었다. 여자가 대답 대신 흥미롭다는 양 턱을 괸 채, 예리한 눈을 크게 치켜떴다.
“얘기는 잘 나눴어요?”
주인이 차 문을 열고 들어가자, 독경이 다정하게 웃는 낯으로 맞아 주었다.
“응, 꽤 흥미로운 사람이더라. 대화해 보니 우리 말고 제보한 사람이 더 있는 것 같아. 팀원들이랑 서류 검토해 보고 연락 준대.”
그녀가 한결 홀가분한 얼굴로 미소를 띠었다.
“집으로 바로 갈 거죠?”
그가 시동을 걸며 물었다. 그러자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갈 데가 있어. 근데 좀 멀어서 혼자 가는 게 나을 듯싶어.”
“어딘데요?”
“고순시.”
“흠, 자세한 얘기는 가면서 하죠. 출발할게요.”
두 사람이 탄 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
“너, 안 바빠?”
주인이 운전에 집중하는 진한 이목구비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독경이 보조석을 슬쩍 곁눈질하더니 짤막하게 대꾸했다.
“바빠요.”
“근데, 왜 나 쫓아다녀?”
“쫓아다니다니요? 보좌 중인 건데....”
그가 입을 샐쭉거렸다. 그녀가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 옆에만 있지 말고, 다른 사람도 좀 만나. 친구도 사귀고....”
“싫어요. 선배가 나한텐 친구고, 애인이고, 가족이고 게다가 이젠 동료잖아요. 그냥 선배가 그때그때 맞는 역할을 해 주면 되죠. 이렇게 간단한 해결책이 있는데 왜 애먼 짓을 하죠?”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사춘기 소년처럼 반항하는 독경을 향해, 주인이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힘들어서 그래....”
“뭐가 힘들어요? 내가 이렇게 운전까지....”
“이독경.”
주인이 엄숙하게 이름을 불렀다. 독경은 이제 아주 잘 알았다. 저 목소리는 자신을 혼내거나 타박할 때 내는 일종의 신호탄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쳇, 알았어요.”
“그리고 이제 나 데리러 오지 마. 내가 알아서 다닐게.”
“......”
그가 고집스레 침묵했다. 그녀가 살짝 말랐지만 다부진 뺨을 상냥히 쓸며 달랬다.
“섭섭해하지 마. 난 더 많은 사람이 네 진가를 알아보면 좋겠단 말이야. 네가 얼마나 잘생기고, 다정하고, 능력 있는지 사람들한테 자랑하고 싶어.”
“남들 생각은 관심 없어요. 선배만 알아주면 돼요.”
“넌 그렇겠지. 하지만 난 안 그래.”
수연과의 만남 이후, 주인은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강석의 삶에서 자꾸만 독경이 겹쳐 보였던 탓이었다.
강석이 현 회장의 그늘에서 살았다면, 독경은 주인의 그늘에서 살았다. 그림자 속에서 더러운 일을 뒤처리하며 살아온 자의 최후가 어떤지 그녀는 똑똑히 목격했다.
그리고 그녀는 대물림이라도 받듯, 그가 비참하고 쓸쓸하게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 때문에 한번 죽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똑같은 고통을 다시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양지로 끌어 올리기로 결심했다. 더러운 공작은 제 몫이었다.
“근데, 우리 왜 가는 거예요?”
독경의 질문에 주인이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구성만 씨라고 태성 하청 업체서 일했던 사람인데 본사에서 강매하는 걸 언론에 제보했다가 계약 해지를 당했대.”
“그래서요? 대기업 갑질이야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새삼스러울 게 있나?”
누구보다 기업의 부조리를 많이 보아 온 독경이 여상하게 반응했다.
“양면 작전을 쓰려고. 솔직히 횡령 건으로는 부족해. 사람들은 ‘거악’은 애써 외면하면서, ‘소악’에는 제 일처럼 쉽게 흥분하거든.”
“설득이 쉽지 않을 거 같은데....”
주인의 말에 독경이 손끝으로 운전대를 툭툭 쳤다.
“한번 해 봐야지.”
***
두 사람은 기자가 일러 준 대로 구도심의 낡은 아파트를 찾았다. 초인종이 고장 나 눌리지 않자, 주인이 똑똑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비쩍 마른 중년의 남성이 문틈으로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기자님 소개로 오셨소?”
꺼칠한 입에서 기운 없는 목소리가 흘렀다. 초점 없는 두 눈에 긴장과 의심이 가득했다. 그녀가 특유의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구성만 선생님 맞으시죠?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남자는 작은 거실에 나란히 앉은 남녀를 번갈아 보았다. 한눈에 봐도 값비싼 옷에 반듯한 얼굴을 지닌 선남선녀였다.
여자는 변변치 않은 집 안을 은근한 눈길로 훑었고, 남자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을 꿰뚫어 보았다. 한 명은 자애로운 천사, 한 명은 무자비한 악마 같았다.
“기자님이 한번 만나 보라고 권하셔서 이리합니다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구려....”
성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인이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귀한 시간 허락하셨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선생님께서 가지신 그 녹취록 저희가 사겠습니다.”
남자의 구부정한 어깨가 흠칫 흔들렸다.
“태성 사람도 아니고, 언론도 아니고.... 대체 어디서 오셨기에 이걸 사겠다는 거요? 뭘 어떻게 하려고....”
성만이 침음을 삼키며 혼란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태성에 할 말이 많은 사람이라 그래요.”
주인이 안심하라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차분하게, 그러나 은은한 분노를 품으며 말했다.
“그 일로 선생님께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으셨는지, 전 잘 모릅니다. 어쩌면 고통스러운 시간과 상처받은 마음을 돈으로 사려는 저희가 못마땅하실 수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저희가 선생님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선생님께서 저희를 이용하시는 거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