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유혹 (1)
주인은 그날 밤 일을 모른 척 넘어갔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독경을 상냥한 무심함으로 대했다.
독경 또한 태연하게 주인을 깍듯이 모셨다. 어느새 제법 편해진 선후배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때때로 그를 바라보는 주인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를 좇는 독경의 눈길 또한 진득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속셈을 깊숙이 감춘 채 주변을 맴돌며 기회를 엿보았다.
***
“아아, 시험이란 건 대체 왜 존재할까?”
윤희가 도서관 복도에 서서 카페인 음료를 물처럼 들이켜며, 우는 시늉을 했다. 나란히 서 있던 주인이 피식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엠티도 다녀오고 실컷 놀았으니, 슬슬 공부해야지. 네 신분은 백수가 아니라 학생이야.”
어쩌면 저렇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바른 소리만 내뱉는지....
윤희가 친구의 얼굴을 새삼스레 응시했다. 따가운 눈초리를 느낀 주인이 고개를 돌렸다.
“왜?”
“난 다시 태어나도 너처럼은 못 살 것 같다. 애초에 글러 먹은 놈이라....”
“음, 그런가? 너나 나나 비슷한 거 같은데....”
“뭔 소리야? 장학금 한번 안 놓친 모범생이랑 맨날 수업 빠지고 술 처먹는 불량 학생이랑 같냐?”
윤희가 속사포처럼 빠르게 지껄였다. 주인이 어딘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읊조렸다.
“그거야 장학금 때문에 그런 거지. 나도 가끔은 수업 빼고 싶을 때가 왜 없겠니.”
그 말에서 묻어나는 쓰디쓴 자조 때문일까, 윤희의 미간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너희 집은, 여전하지?”
“뭐, 그렇지....”
“아유, 까짓것 그냥 모른 척하고 지원받아.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집에서 단물만 쪽쪽 빨아먹음 좋잖아. 네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왜 사서 고생이니?”
윤희가 혀를 끌끌 차자, 주인이 앙칼지게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그 집에선 단 한 푼도 안 받을 거야. 너도 알잖아!”
상대의 날 선 반응에 윤희가 기가 죽은 듯 끙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덩달아 어색해진 주인도 애꿎은 발끝만 내려다보며 침묵했다.
그때, 낯익은 중저음이 나른하게 복도에 퍼졌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두 사람이 뒤를 돌자, 감색 티셔츠를 단정히 차려입은 채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친 독경이 우뚝 서 있었다.
명품도 아닌 흔한 티셔츠 하나 걸쳤을 뿐인데도, 그는 빛이 났다. 타고나기를 눈에 띄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눈썰미 좋은 주인은 알았다. 그가 입은 옷이 구김 하나 없이 빳빳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의 진가는 외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정에 있었다.
설령 온몸이 구정물로 뒤덮이더라도 진흙 한 방울까지 깨끗이 털어 내고는 제 가치를 증명해 내고야 말 집요한 완벽함, 그것이 이독경의 본질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꿰뚫어 보는 이는 현주인 같은 혜안을 지닌 사람이었다.
“독경 후배도 공부하러 왔어?”
“네, 근데 자리가 없네요. 너무 늦게 왔나 봅니다.”
윤희의 질문에 독경이 어깨를 가볍게 들썩였다. 그사이, 휴대 전화로 시각을 확인한 주인이 말했다.
“내 자리 앉아. 어차피 난, 이제 알바 가야 하거든.”
“아, 그래도 괜찮습니까?”
독경이 약간 황망한 표정으로 반응하자, 주인이 픽 웃었다.
“안 될 건 뭐야, 내 전용석도 아닌데. 혹시 몇 시까지 있을 계획이야?”
“음, 글쎄요?”
그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알바 끝나고 조금 더 하다 가려고. 자리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럼 제가 그때까지 있다가, 오시면 자리 비우겠습니다. 아홉 시쯤 끝나시죠?”
뜻밖의 제안에 주인이 약간 놀란 눈으로 독경을 쳐다보았다.
“아, 괜찮은데.... 괜히, 나 때문에 그럴 필요는 없어.”
“선배 덕분에 편하게 자리 얻었으니, 이 정도 보답은 해야죠. 어차피 그때쯤 마무리하려고 했습니다.”
그 말에 주인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짐을 챙기러 떠났다.
“알겠어. 그럼, 이따 봐. 윤희 너도 공부 잘하고 가고.”
윤희가 웃으며 손을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주인이 다시 눈인사를 건네고는 사뿐거리며 사라졌다.
독경은 주인이 조금 전까지 있었던, 그 자리에 차분히 앉았다. 그러고는 명상이라도 하듯 지그시 눈을 감고는 그녀의 잔향과 온기를 느긋하게 음미했다.
그런 그를 윤희가 예리한 눈으로 관찰했다.
여덟 시 반이 조금 넘은 시각, 주인은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도서관 건물로 들어섰다. 시험이 코앞이라 그런지 늦은 저녁임에도 학생들이 제법 많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뚫어지게 책을 보고 있는 독경 뒤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러고는 얼굴을 살짝 앞으로 내밀며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경영학 원론? 이거 신동선 교수님 수업 맞지?”
책장을 넘기려던 마디가 굵직한 손끝이 우뚝 멈췄다. 뒤이어, 곤혹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 선배.... 벌써 이렇게 됐나요...?”
독경이 제 손목을 들어 시각을 확인하려 하자, 주인이 미소 띤 얼굴로 그의 손목을 살포시 잡았다.
“아니야, 내가 일찍 왔어. 사장님께서 시험 기간이라고 일찍 끝내 주셨거든.”
그 말에 그가 머쓱한 얼굴로 자신의 손목을 가볍게 그러쥔 흰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잡은 손을 스륵 놓았다.
“공부는 많이 했어?”
“그럭저럭요. 안 피곤하십니까?”
독경이 커다란 상체를 등받이에 기대며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밤이라 그런지 약간 초췌해 보였지만, 헝클어진 나른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좋았다. 묘하게 고혹적이었다.
“음, 좀 피곤하긴 해. 오늘은 한 시간만 하고 가려고.”
“그럼, 뭐라도 하나 드시죠.”
그가 자리에서 불쑥 일어서더니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오가는 복도 맨 끝에 두 사람은 나란히 섰다. 독경이 건넨 음료를 빤히 보던 주인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독경 후배는 왜 매번 나한테 유자차를 줘? 자기는 커피 마시면서.”
엉뚱한 질문에 당황한 모양인지, 그가 컥 하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아, 그게.... 일하는 데서 커피는 많이 드실 것 같아서요. 카페인 너무 많이 마시면 안 좋잖아요.”
“흠, 그런가?”
주인이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독경이 그런 그녀를 슬쩍 곁눈질했다.
“싫으시면 바꿔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그녀가 풋 웃더니,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노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날이 흐리네. 비가 오려나?”
“그러게요, 일기 예보에 비 소식은 없었는데.... 혹시, 우산 가져오셨습니까?”
그가 먹구름이 잔뜩 낀 검푸른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아니. 일기 예보대로라면 오늘은 안 오겠지, 뭐. 독경 후배는 집으로 가는 거야?”
“네, 씻고 책 좀 보다 자려고요.”
“음, 그렇구나....”
주인이 나직이 혼잣말을 하며 손으로 목 뒤를 매만졌다.
“아, 잠시만....”
그때 머리카락에 가려 있던 목덜미가 드러나자, 독경이 갑작스레 손을 쭉 뻗었다.
그녀는 제 뒷덜미에 낯선 손길이 닿자, 흠칫 몸을 떨었다. 놀란 상대를 달래려 그가 상냥한 어조로 설명했다.
“여기 먼지가 묻어 있어서요. 아니, 원두 가루인가?”
독경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주인이 약간 달아오른 얼굴로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게 왜 묻었지? 일하다 그랬나?”
흔들리는 눈빛으로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는 소리 없이 웃었다.
어쩐지 놀리는 것이 즐거웠으므로. 이렇게 눈에 띄게 반응하는데, 재미없는 것이 이상할 지경 아닌가.
하지만 독경은 이쯤에서 장난을 멈춰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전 이만 정리하고 가 보겠습니다. 밤길 위험하니 너무 늦게까지 있진 마세요.”
“응? 으응....”
어딘가 맹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그녀의 뺨은 여전히 발그레했다. 그는 홍조 띤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휙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주인이 가만히 눈여겨보았다.
***
집으로 돌아온 독경은 가볍게 샤워를 마친 뒤, 젖은 앞머리를 손으로 툭툭 치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때, 창밖에서 빗방울이 쏴 하고 쏟아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렸다.
그가 혀를 차며 밖을 살펴보았다. 자신이 씻는 동안 얼마나 비가 많이 내렸는지, 거리는 이미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아, 주인 선배....”
독경이 안타깝게 신음한 뒤, 체크 셔츠를 다급히 걸치고는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우산도 없이 발만 동동 구를 주인을 떠올리니, 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나 도서관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가방은 물론이고 책도 모두 사라진 것으로 보아, 아예 자리를 뜬 모양이었다.
독경은 혹시나 싶어 다른 층도 둘러보았으나, 어디에서도 주인을 찾을 수 없었다.
‘비가 이렇게 퍼붓는데, 대체 어딜 간 거지? 집으로 바로 갔나?’
그가 바깥 풍경을 슬쩍 내다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저 장대비를 뚫고 지하철역까지 가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혹시 우산을 찾으러 갔나?’
결론을 내기도 전에 몸이 먼저 자연스럽게 과방으로 향했다.
중앙 도서관에서 경영대 건물로 이동하는 동안, 독경은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와 단절된 이 상황이 이상하게 초조하고 불안해져, 그는 더욱 발길을 재촉했다. 캄캄한 복도에 자신의 발소리만이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그때, 절망으로 질식하려는 마음에 한 줄기 희망이 비쳤다. 복도 끝 과방에서 형광등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던 것이다.
그 빛을 보는 순간, 독경은 맥이 탁 풀렸다. 저도 모르게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애간장이 끓듯 외쳤다.
“선배!”
그러자,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던 여자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온몸이 흠뻑 젖은 상태였는데, 검고 긴 생머리가 새하얀 목덜미에 쩍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바들바들 떨리는 갸름한 턱 선을 따라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아...!!”
그 모습에 독경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탄식했다.
“이독경....”
주인이 한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