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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8화 (8/76)

#8화. 함정 (3)

독경이 천천히 물병을 따서는 입안 가득 투명한 액체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마디가 굵은 손가락으로 주인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짝 눌렀다.

그러자 입술 사이가 더욱 벌어지며, 가지런한 치아가 설핏 드러났다.

그가 자신의 입을 그녀의 입술에 맞대며 벌어진 틈으로 조금씩 물을 흘려 넣었다. 주인의 목젖이 위아래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입안의 물을 모두 흘린 독경이 제 입술을 주인의 입술에 부드럽게 비볐다.

그러고는 혀끝을 살짝 내밀어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쓸었다. 물기를 머금은 입술은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완전히 만족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갈급한 허기는 약간이나마 채울 수 있었다.

독경은 잠결에 헝클어진 주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주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밤새 끌어안고 부대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떠나자, 실내는 언제 그랬냐는 양 적막해졌다. 멀리서 울리는 풀벌레 소리만이 텅 빈 공간을 미약하게나마 채웠다.

그리고 잠시 뒤, 주인이 감았던 눈을 스르륵 떴다.

기지개를 켜듯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앉은 그녀가, 사슴의 탈을 벗듯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느른하게 쓸어 올렸다.

“재밌네, 이독경....”

여우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은밀하게 속삭였다.

독경은 주인을 완벽하게 오독했지만, 그녀는 그를 처음 보는 순간 한눈에 알았다. 그가 아직은 미숙한 늑대 새끼라는 사실을 말이다.

독경은 자신이 먼저 그녀를 발견했다고 믿었지만, 실은 주인이 그를 더 빨리 알아본 셈이었다.

아무리 거대한 인파 속에 섞여 있어도,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 더 큰 그에게 눈길이 가지 않기는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를 돋보이게 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적당히 그은 피부, 짙고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썹, 거칠고 굵은 이목구비에 날카로운 눈매가 단순히 잘생긴 얼굴이라고만 단정 짓기에는 강렬하게 야성적인 위엄이 느껴졌던 것이다.

주인은 그와 처음 만난 날, 짤막한 눈인사를 마치고 널찍한 어깨를 스쳐 가며 한 가지 생각에만 골몰했다.

‘갖고 싶다!! 가지고 싶다!!’

잔잔한 호수와 같던 맑고 깊은 눈동자가 격랑에 휩싸였다. 난생처음 느끼는 강렬한 욕망이었다.

주인은 언제나 김 실장처럼 충직한 사냥개를 거느린 부친을 부러워했다.

어떠한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고,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도 하는 유일무이한 제 편처럼 보였기에.

혹시나, 이독경이라면 자신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주인의 적이라면 집요하고 잔혹하게 물어뜯어 버리고야 말, 적어도 달아날 시간만큼은 벌어 줄 ‘그런 존재’ 말이다.

하지만 과연 가능할까? 섣불리 길들이려다 도리어 잡아먹히지는 않을까? 불안과 의심이 본능적으로 솟아났다.

그런데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털을 잔뜩 곧추세우며 낯선 이를 경계해야 할 야생의 새끼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곁을 맴도는 것이 아닌가.

때때로 그것은 아주 가까이 다가와 탐색하듯 냄새를 맡기도 하고, 또 가끔은 대범하게 제 몸을 치대며 장난을 걸어 왔다.

주인은 그때마다 어이가 없어져 저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짓고야 말았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포식자라니, 이토록 다정한 맹수라니....

하지만 단정은 금물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릴 때마다, 조용히 되뇌었다. 어쩌면 저것은 상대를 기만하기 위한 연기일지도 모른다고.

방심해 등을 보이는 순간, 숨겨 둔 발톱을 세우고 뾰족한 송곳니로 목덜미를 물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그러나 주인은 카페에서의 사건 이후, 그의 태도를 보며 점차 기이한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저 난폭한 사냥꾼은 길들여지기를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말도 안 돼....’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그가 왜 그런 손해를 감수한다는 말인가? 단순한 호기심? 정복욕? 혹은, 진지한 구애라 할지라도 타고난 성정과는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납득할 수 없는 것과는 별개로, 상대는 변함없이 천진하게 다가와 제 몸을 비비며 애정을 갈구했다. 희한한 일이었다.

***

그러니까 독경이 3학년 선배를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팬 다음 날, 윤희는 날이 밝기 무섭게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약속을 어긴 채 밤새 남자 친구를 들들 볶아 얻은 정보를 자랑스레 떠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독경 후배가 그 선배를 거의 일방적으로 팼대! 자기는 딱 한 대만 맞고! 그것도 먼저 때릴 수 없어서 봐준 거라나? 아무튼 원우 말에 따르면, 거의 압살 수준이었다더라. 걔가 남중, 남고 나와서 웬만한 사내새끼들 싸움은 다 봤는데, 이독경은 차원이 완전 달랐대. 대박이지?]

윤희는 마치 제 무용담을 늘어놓은 것처럼 기세등등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주인은 친구의 말에 묵묵하게 귀를 기울일 뿐, 별다른 반응을 내비치지 않았다.

[야, 현주인. 내 말 듣고 있냐?]

“어, 들었어.”

[뭐야? 대답이 그게 다야?]

“음, 윤희야. 독경 후배가 올해 신입생 중 수석이라고 했지?”

[어, 그럴걸? 왜?]

“아니, 그냥. 혹시 더 아는 거 없어? 집안 사정이라든가....”

[왜 갑자기 뜬금없이 그런 걸 물어? 없던 관심이라도 생겼냐?]

“그냥, 왠지 어떻게 살았는지 좀 궁금해져서....”

주인의 질문에 윤희가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 슬쩍 입을 열었다.

[음, 나도 잘은 모르는데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나 봐. 행정실에서 얼핏 부모님이 안 계신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거든.]

“두 분 다?”

뜻밖의 사연에 주인이 굳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윤희가 심각해지는 분위기를 느꼈는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응, 그런 거 같아. 제법 고생 많았겠지. 그래서 그런지 거친 생활에 익숙해 보이기도 하고. 물론, 이것도 다 편견일 뿐이지만.]

“그렇구나....”

주인이 손끝으로 제 입술을 찬찬히 문지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참, 윤희야. 그날 왜 싸움 안 말렸어? 나한테도 나서지 말라고 신호 줬잖아.”

[아, 그거?]

전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윤희가 숨죽이듯 작게 말했다.

[그게 말이야. 음, 그냥 내 짐작일 수도 있고 착각일 수도 있는데....]

“응, 괜찮으니까 얘기해 봐.”

평소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친구의 태도에 주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재촉했다.

[그게, 아마 너도 느꼈을걸? 이독경, 마지막에 일부러 도발한 거잖아....]

자신이 의심하던 지점을 상대가 정확하게 짚자, 그녀는 도리어 입을 꾹 다물었다. 전화기를 쥔 손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 윤희가 말을 이었다.

[근데 내가 진짜 어이없는 건 따로 있어. 이독경 그 자식, 상황을 즐기더라고.]

“즐긴다고?”

[그때 넌 선배들 말리느라 못 봤지만, 난 걔 표정을 봤거든. 웃고 있었다니까, 그 인간.]

주인은 당황한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듯, 활짝 미소 짓던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것은 분명, 억지로 짜낸 표정이 아니었다.

[응, 처음엔 내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었는데.... 얘길 듣고 나니 제대로 본 게 맞는 것 같아. 일부러 그런 거야, 걔.]

“대체, 왜?”

주인이 탐스러운 머리를 세차게 털며 중얼거렸다. 휴대 전화 너머로 장난기 가득한 친구의 웃음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독경 후배가 그 선배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너한테 집적거리지 말라고 했대! 걘 무슨 고백을 그렇게 과격하게 한다니?]

윤희가 다시 킥킥거리며 웃었다.

“고, 고백은 무슨.... 그냥 내가 곤란하니까 도와준 거지....”

주인이 볼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그래, 뭐 너 좋을 대로 생각해라. 앗, 원우 깼다. 오늘 얘긴 비밀이야! 나만 알고 있기로 원우랑 약속했단 말이야. 모른 척해야 해!!]

윤희가 작지만 다급한 어조로 말을 쏟아 내더니,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덜컥 전화를 끊어 버렸다. 주인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렀다.

그 뒤, 독경이 잔뜩 주눅 든 얼굴로 찾아와 사과했을 때,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애정을 바란다는 것, 기꺼이 몸을 낮춰 길들여지기를 원한다는 것을 말이다.

“한번 시험해 볼까?”

희미한 열기를 머금은 혼잣말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

괴괴한 어둠 한가운데 꼿꼿이 앉은 주인은 길고 하얀 손가락 끝을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손끝으로 입술을 가볍게 매만졌다. 마치 조금 전 느꼈던 감촉을 다시 살려 보려는 것처럼.

하지만 아무리 재현하고 싶다 해도, 찰나 동안 스친 감각을 똑같이 흉내 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녀는 밀려드는 아쉬움에 혀끝으로 제 입술을 핥은 뒤, 살짝 깨물었다.

그러자 단단하면서도 보드라운 입술이 제 입에 스륵 닿았던 느낌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기대만큼 대범하고, 생각보다 신중한 동작이었다. 아마 상대가 깰까 봐 걱정스러우면서도, 어떻게든 제 욕심을 채우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주인의 새까만 눈이 검은 장막 속에서 번들거렸다. 우아한 입꼬리가 슬며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기묘한 만족감과 성취욕이 깊은 곳에서 서서히 끓어올랐다.

그녀가 놓은 덫에 독경은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이렇게 통쾌하면서도 기쁘기는 처음이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주인이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스무 해 남짓을 살면서 단 한 가지 외에 무언가를 특별히 열망한 적 없는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제 것으로 만들고 싶은 존재가 생겼던 것이다.

이독경, 그 새끼 늑대를 길들여야겠다.

그래서 주인밖에 모르는 사납고 무자비한 사냥개로 만들어야지. 그리하면 아주 오랫동안 꿈꾸던 일도 그리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였다.

“하하!”

주인이 낮은 웃음을 시원스레 터뜨렸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덧붙였다.

“좋아, 이독경. 네가 원하는 걸 줄게. 대신, 내게도 원하는 걸 줘.”

그녀의 시선이 아직은 서늘하지만 생의 욕구로 들끓는 봄밤의 풍경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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