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7/151)

“제게는 어울려 놀 친구가 필요하지 않아요.”

“물론, 그렇기야 하십니다만. 황녀 전하의 나이에는 힘차게 뛰어노시는 것도….”

“노는 것은 시간 낭비예요. 저는 언젠가 이 넓은 에스페다를 다스려야 하는 사람인걸요.”

언제 부끄러워했냐는 듯 아드리아나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그러다 문득 제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깨닫기라도 한 듯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그 간극은 일견 가증스러워 보일 만했으나, 나이를 생각하면 그저 속이 빤하게 들여다보이는 것이 귀여울 따름이었다.

“그런 의미로 공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요.”

하물며 제안이라니. 이쯤 되자,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 흥미진진한 기색이 어렸다. 도대체 저를 왜 여기다 불러다 놓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울상이 된 소공작 디에고만 제외하면, 전부.

“제안이라니요?”

“저는 공의 총명함과 여유로운 태도가 좋아요. 얼굴도 그럭저럭 생기다 말아서 제 총기를 흐릴 정도로 불편하지도 않고, 적당한 가문 출신인 것도요.”

보자마자 얼굴을 붉힌 것과는 달리 평가는 제법 냉정했다. 디에고는 그 거침없는 평가에 입을 떡 벌렸다가, 얼이 빠진 얼굴로 웃고 있는 제 아비를 바라보았다. 에스페다의 몇 없는 공작 가문이 졸지에 ‘적당한’ 가문이 되어 가는데도, 심지어 그럭저럭 생기다 말았다는 데도, 마냥 좋다는 듯 풀어진 얼굴이 우스웠다.

“혹시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까?”

“저는 공의 국정 수행 능력을 높이 사요. 이번 조세 개혁안의 초안을 직접 작성하셨다고 들었어요.”

국정 수행 능력. 또박또박 그 언어를 뱉은 순간, 방 안 인물들의 얼굴에 아연한 기색이 어렸다.

“…전하께서 그것을 어떻게.”

“기초 세법을 공부하는 자료로 기메라 백작께서 조금 잘라 보여 주셨어요.”

과거를 회상하는 아드리아나의 목소리가 조금 더 꿈같이 젖어 들었다. 기메라 백작은 그저 감격에 겨워 새 개혁안이 전과 비교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줄줄이 늘어놓았을 뿐이었지만, 바로 그 순간 아드리아나는 얼굴 한 번 뵌 적 없는 올리바레스 공작과 일방적인 사랑에 빠졌다.

아드리아나는 제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열 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평범한 열 살짜리에게 조세니 개혁안이니 하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어렴풋이 이해했다. 물론, 그녀는 평범한 열 살보다는 뛰어나게 우수하긴 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그 조세 개혁안이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저는 머지않은 미래에 에스페다를 이끌어야 하고, 그때 제 곁에서 함께 할 이는 제국에서 가장 우수한 자여야만 해요.”

머지않은 미래. 여전히 새파랗게 젊은 황제와 황후를 두고 말하기엔 지나치게 야심만만한 발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에도 공께서 제 곁이 있기를 바라요.”

“…지금 제게 청혼하신 겁니까?”

“네!”

황녀는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과 발그레하고 앳되어 통통한 뺨은 평범한 열 살의 그것이었으나, 그 제안이라는 것부터 계산 속까지 도무지 그렇지 못해 문제였다.

올리바레스 공작은 대체 이것을 어쩌면 좋으냔 듯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시녀들에 이어 황태후인 시에나마저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얼굴마다 미소가 그득한 것을 보니 다들 제 일이 아니라고 흥미진진하게 관람하는 와중인 듯했다.

공작은 혀를 차고는 황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법 진지한 낯으로 황녀를 마주했다.

“일단, 전하, 저는 이미 결혼을 했습니다.”

“그것은… 알지만….”

“제가 이혼하고 전하와 결혼을 하게 되면 이 녀석이 어머니를 잃게 되는데요.”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 황녀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그건, 그것은… 안 될 일인데….”

“한데, 왜 결혼을 생각하셨습니까?”

황녀는 양손을 맞잡고 꼬물거리다가 비밀을 실토하듯 속삭였다.

“어머니께서 제게 말씀하시길, 충성심은 기본적으로 거래니까 똑똑한 인재는 확실히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셨어요.”

“…….”

“그리고 기메라 백작께서는 혼인으로 이어진 관계만큼 확실한 내 편이 없다고 하셨고요.”

“…….”

“또… 황녀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일단 마음에 들면 청혼을 날려서 어떻게든 붙잡아 두라고….”

올리바레스 공작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도대체가 기메라 백작은 어린아이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혼을 제안하는 황녀의 나이가 열 살이 아닌 열여덟쯤 되었다면 더 인상적으로 들렸겠지만.

“그러면 전하께서는 제 조건을 보고 청혼한 것이네요?”

“그거야 그렇죠?”

그 외에 청혼할 이유가 달리 있냐는 듯, 황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만약 황녀께서 말한 조건에 다 들어맞는 다른 사람이 있다면요?”

“그런 사람이 또 있다고요?”

아드리아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올리바레스 공작은 이 촌극을 죽은 생선 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제 아들을 황녀의 앞으로 떠밀었다.

“적당한 가문에, 저보다 수 배는 예쁘장한 얼굴, 성격도 순하니 괜찮고, 제 아들이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머리도 이만하면 또래에 비해 뛰어납니다.”

곁에 서 있다가 얼떨떨하게 끌려 나온 디에고는 기막힌 눈으로 제 아비를 올려다보았다. 이거야말로 떨이 가격으로 물건을 떠넘기는 상인이나 다를 바가 없다. 가장 비참한 건 그 와중에도 황녀로부터 달갑지 않다는 시선을 받는 자신이었고.

“또래에 비해 똑똑하다고요?”

…게다가 졸지에 지능까지 의심받았다. 오늘 이전까지는 이런 취급을 받았던 역사가 없었던 소공작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였다. 디에고는 눈물이 치밀 것 같은 기분을 간신히 억눌렀다.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기 위해 내리뜬 시야에 갑자기 무언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

새하얗고 앳된 뺨과 인형보다도 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아드리아나 황녀였다. 냉대를 받는 와중에도 흘긋흘긋 넋을 잃고 바라볼 수밖에 없던 얼굴이 그의 바로 앞에 와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디에고의 얼굴은 토마토보다도 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황녀는 성의 없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아, 안….”

“말도 제대로 못 하는데요?”

황녀는 단 두 마디 만에 그에게서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올리바레스 공작을 바라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상인에게서 산 물건이 하자품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따져 대는 것처럼. 올리바레스 공작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황녀를 만나서 긴장해서 그런 겁니다. 저래 봬도 아카데미에서 전 과목 수석을 한 놈인걸요.”

“흠….”

“지금이야 예쁘장하게 생겨 먹었을 따름이지만, 또래 중에 저만한 외모가 없습니다. 추후에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거야 모르는 일 아닌가요? 지금 똑똑하다고 해서 나중까지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고.”

“뛰어난 군주가 되시려거든, 현재의 볼품없는 상태를 보고서도 미래의 가치를 읽어 낼 줄 아는 안목을 지니셔야 합니다.”

볼품없…. 디에고는 도저히 제 편인지 아닌지 모를 아비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마주 보았다. 떠넘기고 싶다면 있는 힘껏 포장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듯 포장지로 감싸다 말 게 아니라….

그 순간 황녀가 다시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열 살짜리 답지 않은 깐깐한 눈이 그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었다. 디에고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바르게 하면서도, 제가 왜 황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지 회의감부터 치밀었다.

“흐음.”

아드리아나는 그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려는 듯 두어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당혹해 내리뜬 시야의 끝에 구불구불한 흑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 순간, 디에고는 황녀의 몸에서 희미하게 나는 제비꽃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제비꽃을 좋아하나 보다. 제 눈과 같은 색이라 그런가…. 얼빠지게 그런 생각이나 하다가 무심코 시선을 들었을 때였다.

“…….”

말갛고 투명한 청보라색 눈동자가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깜짝 놀란 심장이 퍼드득 뛰었다. 종이 한 장 거리에서 마주친 시선과 호흡이 낭창하게 섞였다. 시간이 멎은 걸까? 모든 순간이 아주 느릿했다.

생각보다도 더 우아한 속눈썹과 연약한 눈매, 무방비한 입술, 자그마한 콧등….

“…….”

그는 황녀가 제게서 등을 돌리고 나서야, 제가 여태 얼어붙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디에고는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한 제 심장을 손으로 꾹 눌렀다. 이상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좋아요. 공작의 안목을 믿어보죠.”

좋다고. 그러니까… 그가? 디에고는 반쯤 넋이 나간 채로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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