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케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영애께 제안드리고 싶은 부분은 이겁니다.”
엔리케는 제 말이 주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침묵했다. 그는 숨을 짧게 들이쉬고는 내뱉는 힘으로 말했다.
“황태자에게 투항하세요.”
엘레나는 새파란 눈을 들어 엔리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선과 시선이 팽팽하게 맞부딪쳤다. 이윽고 그녀는 입술만을 움직여 웃었다.
“당연히 맨몸으로 그런 자살행위를 시키시진 않으실 테죠.”
“물론, 가짜로 작성된 서류들을 들려드릴 겁니다. 군 정보를 넘겨주는 대가로 일신의 안전을 보장받으세요.”
“저는 이미 지명 수배자인데 애써 탈출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시는군요.”
그녀는 무어라 말하려던 엔리케의 말을 막듯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재차 말을 이었다.
“제가 당신의 말을 따른다고 쳐요. 황태자 전하께서 제 목숨을 살려 주신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죠?”
“그자가 당신에게 유독 호의적이지 않았습니까.”
“…….”
“지명 수배된 것이 두려워 돌아왔다, 그 김에 겸사겸사 2황자의 군 정보까지 빼돌렸다고 하면 아주 내치시진 않을 겁니다.”
“아주 내치시지 않는다면.”
“기껏해야 엄중한 감시쯤 받으시겠죠.”
그녀는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오려던 비웃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엔리케는 카스트로를 잘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그녀를 잘 몰랐거나.
그녀가 멍청하게도 저런 말에 설득당해 군 정보를 들고 카스트로에게 간다고 한들, 그게 거짓으로 밝혀지는 순간 뒷감당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의 고민이 지나치게 길어진다고 생각했는지, 엔리케가 조급한 투로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당신을 브리타냐로 보내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는 걸 이제 압니다.”
그는 스스로의 말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을 치우다니. 그런 순진한 짓은 전하께서 당신을 찾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을 때에나 하는 거지.”
“…….”
“이제, 당신은 우리의 불씨가 되어 주셔야만 합니다.”
“불씨.”
“당신이 황태자 전하께 억류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전하께선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즉각 군대를 움직이실 겁니다.”
엘레나는 입술을 살짝 비틀었다. 말이야 거창했다. 따져 보면, 너를 인질로 세우겠노라는 소리였고.
“…군대를 움직이면요.”
“결국 명분 싸움입니다. 황태자 측은 백작 부인이 반역을 저질렀다고 공표하겠죠. 우리 측도 황궁에서 군을 먼저 움직인 것은 황태자였으니, 황태자를 반역자로 규정하는 성명을 발표할 겁니다.”
“…….”
“아가씨께 들려 보낼 문서는 우리 측 군 정보를 교묘하게 조작해 둔 서류입니다. 그 내용대로라면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우리 측 군대는 열흘 안에 황궁에 도착할 수조차 없죠.”
“…….”
“황태자의 보고 체계는 망가졌습니다. 가도마다, 관문마다 매수를 해 두었으니 보고는 올라가지 않을 테고, 황태자는 우리가 후계 구도에서 꼬리를 말았다고 생각하겠죠. 그 방심을 틈타 진격할 겁니다.”
그리고 비센테는 이 절호의 잡을 생각조차 없단 소리겠고. 고작해야 그녀의 곁에 조금이라도 더 붙어 있겠다고…. 그녀는 막막한 숨을 터트렸다.
대체 그는,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무엇까지 포기할 작정이었던 걸까.
“전하를 사랑하시는 것, 압니다.”
엘레나는 그제야 다시금 시선을 들어 엔리케의 눈을 마주했다. 그는 아주 진지했다. 그녀의 존재를 증오하는 척하던 시늉도 집어치웠다.
“2황자 전하께선 황제의 운명으로 태어나셨어요. 태생은 천성입니다. 일개 범부의 행복으로는 쉽게 만족하지 못하실 겁니다.”
“…….”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일상이 처음에야 좋고 기쁘겠죠. 그러나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 변합니다.”
“…….”
“여자라면 누구든 쉽게 줄 수 있는 위안 말고, 오로지 당신만이 그분께 줄 수 있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그녀만이 그에게 줄 수 있는 것. 엔리케의 말은 아주 교묘했다. 결국 그를 위해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 무엇이든 내어 줄 수 있었다.
그가 그녀의 행복을 바라듯 그녀 또한 그의 행복을 바랐다. 그가 그녀 때문에 어떤 것도 잃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일생 동안 손에 쥔 것이 없었고, 없어서 풍족하면서도 가난했으니까. 불행했으니까.
그러니 그의 손에 최대한 많은 선택지를 돌려놓는 것, 그것이 그녀가 아는 유일한 사랑법이었다.
“저만, 줄 수 있는 것….”
어차피 몸을 되찾지 못하면 그녀에게 예정된 미래는 하나뿐이었다. 소멸.
예정된 미래가 죽음뿐이라면, 그의 미래를 위해 제 한 몸을 희생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기회를, 곧 죽어 없어질 저 때문에 그가 놓치게 둘 수도 없었다.
누구에게 보일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속이 시렸다.
“이벨린. 이제 오로지 당신뿐입니다.”
그래. 오로지 그녀뿐이었다.
***
“…결국 돌아왔군요.”
엘레나가 마차에서 내리자 아멜리아가 묘한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저 초조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멜리아는 황궁의 뒷문을 지키는 경비병에게 돈 몇 푼을 건네주고는, 그녀에게 얼굴을 가릴 수 있는 후드를 던져 주었다.
“그거 쓰고 고개 숙이고 얌전히 따라와요. 가방은… 무겁지 않으면 그대로 들고요.”
궁을 가로지르는 동안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쳤으나, 누구도 그녀가 ‘이벨린 로즈 레녹스’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심지어 기사 몇몇은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도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