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급히 휘갈겨 쓴 필체는 후작의 것이 맞았다. 급한 용무라도 생기신 걸까? 우선 판단은 제쳐 두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했다. 조금이라도 미적거리면 불호령이 떨어질 테니까.
엘레나는 영애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겨우 빽빽하게 둘러앉은 사람들을 헤치고 연무장의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아주 시끄러운 곳에서 빠져나온 여파인지, 황궁은 평소답지 않게 적막하게만 느껴졌다. 일손들이 모조리 서약식이며, 이후에 있을 성대한 무도회에 차출됐기 때문일까?
아무리 그래도 주변을 지나다니는 기사나 하인, 병사 한 명까지도 보이지 않는 건 수상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후작의 경계대로 끔찍한 사건의 전조일지도 몰랐다.
‘서두르자.’
그녀가 잰걸음으로 막 후원 쪽 회랑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엘레나의 어깨를 누군가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그쪽으로 가지 마.”
엘레나는 놀란 눈으로 저를 붙잡은 비센테를 돌아보았다. 서약식에나 참석하고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지도 의문이었지만, 가장 거슬리는 것은 하룻밤 사이에 냅다 짧아진 말투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예의 반듯하던 사람이 오늘은 이렇게 무도하게 구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가지 마. 위험하니까.”
그녀가 대답도 못 하고 눈만 깜박이고 있자, 그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세상에서 그녀보다 더 거슬리는 것도 없다는 듯, 아주 성가셔하는 기색이 온몸에서 뚝뚝 묻어났다.
그녀는 미심쩍은 얼굴로 되물었다.
“위험하다고요? 제가요?”
“그래.”
그녀는 차분하게 그를 관찰했다. 뺨에 열이 올라 있고, 머리카락이 살짝 젖어 든 것은 그만큼이나 절박하게 그녀를 찾아다녔다는 증거였다.
그러니까, 왜. 엘레나는 다시 처음의 의문으로 돌아갔다.
“제가 어디로 가는 줄은 어떻게 아시고….”
“지금 그게 중요한가?”
“어제는 절 알아보지도 못하셔 놓고, 오늘은 말씀도 짧아지셨네요.”
“…아.”
그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지적받은 사람처럼 표정을 굳혔다. 그는 당혹감으로 다물린 입매를 오른손으로 가리듯 매만졌다.
“실례했군요. 당장 급급하여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쉽게 납득이 가는 대답은 아니었다. 게다가 위험하다니. 아무리 인적이 드물다고 해도 그들이 있는 곳은 저잣거리가 아니라 수도의 한복판, 그것도 황궁이었다. 수상쩍기로 따지자면 차라리 비센테가 더했다.
그는 이번 서약식이 ‘간소하게’ 치러지게 된 원흉이었다. 황제는 제 조카가 어떤 식으로든 주목받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고, 제 손으로 주관한 서약식에서 제멋대로 구는 조카를 너그럽게 용서해 줄 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이번 서약식의 주인공이나 다름없었다. 여러모로 한 몸에 쏟아지는 시선을 받아야 할 사람이, 정작 여기서 농땡이나 피우고 있다니.
비센테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강제로 움켜쥔 채 데려가고 싶은 것처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일단 여기서 빨리 벗어나야….”
“어디서 어떻게 입수한 정보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의 단정한 얼굴이 다시금 인내를 잃고 구겨졌다.
“영애와 실랑이를 벌일 때가 아닙니다. 일단, 저를 따라오시면….”
“제가 전하의 무엇을 믿고 따라가야 하죠? 저에게는 전하도 충분히 수상한 분이세요.”
하. 그는 한숨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것을 차갑게 뱉어냈다. 그녀의 얼굴에 대고 글자 하나하나를 짓씹어 뱉듯이 쏟아 냈다.
“나야말로 영애가 아주, 성가십니다.”
이제는 숫제 밑도 끝도 없는 매도였다. 그녀는 기막힌 얼굴로 눈만 깜박이다가 되물었다.
“제가 전하를 성가시게 했다고요?”
“대체 내게 무슨 짓을 저지른 겁니까? 무슨 끔찍한 저주를 건 거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전하를 저주했다고요?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세요?”
“영애가…!”
펑! 퍼버벙!
그의 눈이 커지는 것과 그녀의 몸이 확 당겨지는 것, 그리고 축포가 터지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다음 순간, 엘레나는 비센테의 품에 처박히듯 안겼다. 머리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깨달았다. 주변에 매캐하게 피어오른 연기는 연무장에서 터진 축포 때문이 아니었다.
이건, 근거리에서 발포된 총이었다.
총알이 날아온 쪽을 향해 비센테도 재빠르게 총을 겨누는 것 같았다. 그럴 것 ‘같다’라고 한 것은, 그녀는 그 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센테가 총을 들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붙잡아,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막았으니까.
제 몸으로 시야를 차단해 끔찍한 광경을 보지 못하도록….
퍼벙! 탕! 탕!
두 번째 폭죽이 터진 순간, 총성이 교차하듯 울렸다. 이번에는 분명하게 구분이 되었다. 엘레나는 제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제 품에서 떼 내듯 밀어냈다.
“도망, 가.”
“전하?”
“어서.”
그게 한계였던 것처럼 그의 몸이 천천히 무너졌다. 그녀는 다소 현실감 없이 비센테의 몸을 받아 들었다.
“전하!”
의미를 알 수 없는 욕설을 짓씹은 비센테가 그녀의 어깨에 가까스로 고개를 묻었다. 자잘한 신음과 숨이 터지며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녀는 문득 축축하게 젖어 든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 피였다.
경악으로 벌어진 입술이 냅다 비명부터 지르려던 참이었다.
“계집부터 잡아.”
우르르 달려든 남자들이 그녀를 비센테로부터 잡아떼내며 입을 틀어막았다.
나머지 셋은 비센테를 양옆에서 짓누르듯 붙잡고, 그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흐… 읍…!”
엘레나는 홉뜬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우습게도 황궁 경비대의 복식을 갖춰 입은 남자들이었다. 비슷한 것을 아무렇게나 주워 입은 게 아니라, 번듯한 정식 복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