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51)

등 뒤로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익숙하다고, 문득 그렇게 느꼈을 찰나였다.

그제야 이벨린은 이 자가 아멜리아도 하녀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훤칠한 그림자가 그녀를 머리에서부터 집어삼킨 채, 발아래로 길게 늘어졌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다.

시더의 향, 잠깐이라도 다른 누구와 착각할 수조차 없는….

이벨린은 머리카락을 애써 그러모아 쥐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

그의 긴 손가락이 이벨린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제치고, 둥근 단추를 느릿하게 채웠다. 헐벗은 등줄기를 하나씩 꾹꾹 누르듯 거꾸로 거슬러 올랐다.

차가운 공기에 얼마간 노출되었던 등은 그의 손을 아주 뜨거운 것으로 느꼈다.

온 신경이 등으로 쏠렸다. 감각이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그의 손가락이 스치고, 얽고, 빠져나가며 잠깐의 온기를 선사하는 순간마다.

“…….”

비센테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이벨린은 초조했다. 그가 화를 낼까? 브리타냐로 돌아가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도 않고, 위험하게도 카스트로와 연루되었다고…. 단테와 루카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했던 잔소리들이 이제야 현실로 닥치는 것 같았다.

변명을 미처 짜내기도 전에 마지막 단추까지 모조리 채운 그가 손을 뗐다. 아주 느리게 추락했다.

“…….”

이제는… 더 피할 수가 없는 순간이 왔다. 이벨린은 아직도 끄트머리가 조금 젖어 있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을 빗처럼 사용해 매만졌다.

그를 바라보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밖에 폐하의 기사들이, 엄청 많다고 들었는데.”

“…….”

“저도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알았으면 진작 도망갔겠죠. 전하께서 제게 주신 게 너무 많으니까, 조금만 은혜를 갚는다는 게.”

“…….”

“아무래도 화나셨죠?”

이벨린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가 좋아하리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지만, 아주 반응도 안 할 것이라곤 예상치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그를 마주 보기 위해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엘레나.”

그녀는 숨을 들이쉬었다가, 뱉지도 못한 채 얼어붙었다.

“빌어먹을…. 엘레나 데 카스타야.”

아.

엔리케가 내민 서명을 본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기울어진 E, 날카롭게 획을 긋는 L과 N…. 닳기라도 할까, 펼쳐보는 것조차 아꼈던 편지에 있던 서명을 정확히 절반으로 잘라낸 모양새였다.

‘엘레나 데 카스타야’의 친필로 쓰인 편지들은 반역자의 물품으로 모조리 불태워진 지 오래였다. 그가 간직하고 있던 한 통을 제외하면, 전부.

아무리 이벨린이 그 외양을 닮았다고 한들, 본 적도 없는 서명을 베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진 종이를 그는 어쩌지도 못한 채 숨만 몰아쉬었다. 깨달음은 절망처럼 닥쳤다.

아, 엘레나…. 입 속에서 그녀의 이름이 신음처럼 뭉그러졌다. 숨이 절박하게 차올랐다.

여자의 행동, 사고방식, 삶을 관조하는 눈빛이나 태도, 그가 버릇처럼 인지해 내고야 말았던 엘레나의 습관들…. 그 모든 것이 착각이나 환각, 간절함이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니었다. 확고한 편견과 아집으로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장막이 그제야,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말을 잡아타고 황궁으로 내달리는 동안 그는 절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기사들의 놀란 눈과 만류조차 무시한 채 정문으로 들이닥쳤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지금 당장 그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정말 죽을 것만 같아서. 그의 모든 잘못을 돌이킬 방법이 그것뿐인 것처럼. 그야말로 불가해한 맹목으로.

“전하! 전하….”

그는 제 어깨를 잡아끄는 루카스와 단테에 의해 본궁의 앞에서 저지당했다. 그들을 무시하고 성큼 걸음을 옮기자, 우악스러운 힘에 밀려났던 루카스가 다시금 그의 팔을 붙들었다.

“이러시다가 폐하께서 보시기라도 하면… 부디 정신 차리십시오.”

“이벨린 때문이라면, 제가 있는 곳을 압니다. 전하! 제발….”

그의 정신을 돌아오게 만든 것은 루카스의 이성이 아니라, 단테의 호소였다. 그는 겨우 단테의 손에 이끌려 사람들의 이목으로부터 벗어났다. 가까운 건물의 뒤편으로 자리를 이동한 즉시 물었다.

“어디지?”

“…예?”

“영애께서 지금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다.”

“별궁에…. 아니, 잠시만요. 지금 폐하께서 거기 계신다니까, 그, 그렇게 가시면 안 된다니까요?”

그는 듣지 않았다. 발걸음이 조급했다. 황제의 호위들이 배치되는 방식은 서른 가지가 넘었고, 그중 무작위였으나 문제는 안 되었다. 그는 그 배치들을 모조리 외웠고, 거기서 파생되는 열 가지의 변형도 모두 알았다.

기사들의 눈을 피해 별궁의 복도로 스며드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웃음이 날 지경으로 쉬웠다.

그래서 이 많은 방들 중 네가 대체 어디에 있는지….

간절한 만큼 목이 탔다. 그는 어둑한 그늘에 숨어 기사들의 움직임을 피했다. 그의 시선에 하녀가 잡힌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도 쥐새끼처럼 조심스러운 낯을 하고 돌아다니기에….

심지어 하녀는 누군가에게도 갈 음식과 옷가지를 들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던 병사가 그녀를 알아보고 아는 체를 했다.

“그게 그 방으로 갈 건가?”

“쉿. 폐하의 기사들이 지척에 있으신데.”

“대체 그 방에 누가 머물길래 그래?”

“백작 부인의 개인적인 손님이시지 뭐. 가 볼게. 음식 식겠다.”

하녀는 요령좋게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끊어내며 병사를 지나쳤다.

그는 하녀의 뒤를 조심스럽게 밟았다. 하녀가 멈춘 것은 인적 없는 복도의 끄트머리 문 앞에서였다. 미행은 없는지 양옆을 두리번거리며 확인한 하녀가 그 안으로 쑥 들어가더니,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바깥으로 나와 문을 잠갔다.

하녀는 한시라도 빨리 이 복도에서 멀어지고 싶은 사람처럼 왔던 길을 빠르게 되짚어 사라졌다.

“…….”

그는 천천히 걸어서 문 앞에 섰다.

잠금쇠는 당겨서 밀면 풀리는 단순한 종류였다. 열쇠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니 정말로 문을 열고, 젖히면 끝나는 문제였다.

“…….”

당장 그 얼굴을 볼 수 없으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치솟았던 충동은, 정작 문 하나를 앞두고 덜컥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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